두려움 (5)
134화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땅이 쪼개지고 하늘이 갈라졌다.
일국의 군주와 비견되다 하여 오버로드, 혹은 로드 급이라 묶어서 칭해지는 소드 마스터와 9서클 대마법사조차 레이의 칼질 한 번에 갈려나갔다.
눈치 볼 게 없어진 레이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놈들을 죄다 두드려 패자 레이의 위명은 끝도 모르고 높아졌다.
기분 좋게 하루 일을 마친 레이는 신분을 감춘 채 술집에 들어가 구석에서 술을 홀짝였다.
술집에서조차 심심찮게 레이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유난히 목소리가 큰 술꾼 하나가 자기 친구의 등을 탕탕 두들기며 외쳤다.
"자네는 레이, 그분의 출신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음? 잘 모르네만. 자네는 알고 있나?"
"듣기로는 멸망한 드워프 족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더군!"
"오오, 일리 있는 이야기군!"
...?
아니,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인간인데 드워프 소리가 왜 나와?
레이는 술꾼들의 헛소리가 어처구니가 없어 한마디 하려고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헌데 자리에서 일어서보니 부쩍 주변 사람들의 기골이 장대해 보였다.
흡사 9살 꼬맹이 시절로 돌아간 것마냥 어른들의 모습이 커다래 보이자 레이가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어째 머리 끝이 테이블 모서리와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테이블은 높아 봤자 1 미터가 조금 넘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이가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는데, 갑자기 풍경이 뒤바뀌었다.
레이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산들바람을 느끼며 멍하니 서 있던 레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카렌이 해질녘 노을을 닮은 아름다운 눈동자로 레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를 내려다보며 서로의 키 차이를 가늠해보던 카렌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키 작은 남자는 싫어."
"...?"
레이가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이번엔 요하나가 나타나 레이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허접 꼬맹이."
"...?"
연이어 나타난 루나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작아."
"...?"
마지막으로 나타난 알레시아는, 무릎을 꿇은 채 레이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의 기사는 쪼끄만하구나아..."
그제야 레이는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레이의 성장은 9살 때를 크게 넘기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던 레이가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악!!"
다급히 병상에서 허리를 일으킨 레이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식은땀을 질질 흘리던 레이는 이내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른 세수를 몇 번이나 한 레이는 가장 먼저 욕설을 지껄였다.
"시발."
좇 같은 꿈이었다.
사실 이 세계의 신성력 성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랐다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꿈이었다.
"젠장, 그렇다고 해도 드워프라니."
정말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악몽에서 느꼈던 공포를 간신히 털어낸 레이는 얼마 못 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고통이 점점 심해져 갔다.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고통은 뇌리를 쿡쿡 찌르며 경기를 일으키게 했다.
부상을 당한 직후엔 엔도르핀 같은 게 마구 분비된 덕분인지 그나마 통증이 덜했는데, 휴식을 좀 취하고 일어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아이고, 이러다 진짜 죽겠다."
앓는 소리를 질질 흘린 레이가 병상 옆에 있는 탁자 위를 더듬었다.
방 안이 어두웠던 탓에 치료사가 놓고 간 진통제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물약 형태의 진통제를 집어서 다급히 입에 털어 넣은 레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후우..."
시선을 내리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왼팔은 천으로 둘둘 감겨 있었고 온몸이 가루 약재 투성이였다.
얼굴도 거울을 봤을 때를 상기하면 왼팔에 비해 결코 덜 심각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죽은 뻔 했다는 게 와 닿자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괜찮아."
괜찮다. 걱정할 것 없었다. 레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2-3년만 더 경과해도 필립스 백작령은 어떤 재난이 찾아와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영지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까짓 거 사람만 멀쩡하면 잠깐 대피했다가 돌아와서 영지를 복구하면 됐다.
본래 세상을 뒤덮었을 혼란 또한 많이 약화된 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근거 없는 확신이긴 했지만, 레이는 자신이 환생한 이후 이루었던 성과가 가치 있는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레아'였다.
레이가 보호해주지 않는 레아는... 그냥 가치 없는 폭탄이었다.
레이가 없다면 레아는 목숨을 지키기 힘들었다.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레아를 맡기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레아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을, 레이는 아이들에게 떠넘기기 싫었다.
레이에게 레아는 카렌, 루나, 요하나,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의 인연들보다 결코 가치 있지 않았다.
"레아, 너는..."
본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였지? 정말 존재하기는 했을까?
'...본래 역사에서 유사한 사건이 터져서 황실 사생아가 태어났다고 해도 레아와 유전적 차이는 있었겠다만.'
이쪽 세계 인간의 염색체 수가 지구와 같다고 가정하면 황태자 놈의 로얄 시드가 품고 있을 유전 정보의 경우의 수만 최소 2의 23승이었다.
뭐, 이런 세세한 부분이야 어쨌든.
본래 역사에서 황실의 사생아가 벨라에게서 태어났다면 금방 발각되었을 터다.
발각된 이후엔 바로 처분됐을까, 아니면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다면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레아를 데려갔을까.
신분 천한 어미에게서 나온 황가의 핏줄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
머리가 복잡해진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아만 없다면, 레아라는 존재만 배제한다면 레이는 훨씬 쉽사리... 자기가 죽고 난 다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레아는 출신 성분만으로 너무나 많은 위험을 내제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레이는 짜증이 서린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주객이 전도된 생각이었다.
레이가 가장 우선하는 건 벨라의 행복이었고, 레아가 있었기에 벨라는 진정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느날 레이가 사라진다 해도, 벨라는 레아가 있기에 삶을 충실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레아가 벨라의 첫번째가 되어 주었기에, 레아가 벨라의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기에, 레이는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좀 더 덤덤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남은 삶을 바쳐.
"해야만 하는 일은..."
중얼거리던 레이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방 구석에서 누군가가 가만히 서서 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오,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친 레이가 상대를 알아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루나,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레이의 목소리엔 당황이 묻어나왔다.
원래는 얼굴이라도 나으면 만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이 바로 안 떠올랐다.
자기 혼자 흰소리를 하며 어버버거리던 레이가 옆에 있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서 플로리아에게 받았던 스태프가 잡혀 나왔다.
"이, 이거 선물 사 왔어."
아무 말이나 막 던진 거였다.
어둠 속에서도 루나의 표정이 굳어진 게 눈에 보였다.
혹시 스태프가 마음에 안 들었나싶었던 레이는 더욱 당황한 채 스태프를 잡아 돌렸다.
스태프 안에 숨겨져 있던 검날이 툭 튀어나왔다.
"짜잔! 신기하지?"
"..."
루나가 말 없이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괜히 긴장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루나는 레이 앞에 선 채 라이트 마법을 작게 피워 올렸다.
화악!
방이 조금 밝아지자 레이가 전신에 입은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망가진 얼굴도, 고목처럼 눌어붙은 왼팔도, 그리고 온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도, 전부 드러났다.
루나의 눈치를 보던 레이가 지팡이를 슬그머니 내려놨다.
"지팡이는 장난친 거고, 진짜 선물은 따로 있..."
"레이."
루나가 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레이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상처가 레이의 온몸을 뒤덮고 있어 손을 댈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루나는 주먹을 말아쥔 채 한참을 헤매다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레이의 우측 허리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본디 감정 표현이 적었던 루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떨리는 주먹 너머로 루나가 느끼는 격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기에, 레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오랜 적막 끝에 루나가 목소리를 힘겹게 쥐어 짜냈다.
"레이... 이러지 말아요."
루나의 눈가에 가득 어렸던 습기가 결국 형태를 이루어 떨어져 내렸다.
루나가 자꾸만 아파오는 심장을 붙잡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눈을... 눈을 감으면 항상 떠올라요."
지치고, 상처 입고, 피 흘리고, 괴로워하면서도, 언제나 덤덤한 척 하는 당신의 모습이.
홀로 불길을 헤쳐 가면서도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 웃음을 가장하는 당신의 모습이.
"항상, 항상 나를 아프게 해."
레이는 고통을 모르는 전사처럼, 죽음을 모르는 불사신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레이 또한 남들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보통의 인간임을, 루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치지 말아요. 제발 아프지 말아요."
과거엔 힘이 없어서 레이의 희생을 지켜만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기에, 루나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난 이제 레이를 지킬 수 있어요. 레이가 준 힘으로 레이를 지킬게요. 모자라면 더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날 두고 떠나지 말아요."
루나의 서클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났다.
아름다운 빛의 고리 위로 영혼에 각인될 글자가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인연을 묶어, 언제나 상대의 존재를 느끼고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맹약이 루나의 서클을 거쳐 레이의 서클에 흘러든다.
루나가 맺어가는 계약 각인을 레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어딜 가든 루나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아직 루나를 지켜줄 수 있을 때, 몸이 조금이라도 더 멀쩡할 때 루나를 최대한 성장시키고 또한 루나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어야 했다.
레이는 계약 각인이 서클에 안착되는 것을 느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 넌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왜냐하면.
"너는 착하고 위대한 마법사가 될 거니까."
루나의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착한 마법사도, 위대한 마법사도 될 수가 없다.
당신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고, 당신은 나의 전부였다.
루나는 그리 소리치고 싶었지만, 계약 각인이라는 억지를 들어준 레이가 고마웠기에 그날은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