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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32화 (132/446)

두려움 (3)

132화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으로 향하면서 아프텔에게 유물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아프텔은 자신도 모르는 종류의 유물이라 답하며, '우리' 이전 시대의 사도가 사용한 무기일 것이라 추측했다.

레이는 처음 유물을 강탈했을 때 바로 부쉈어야 한다고 투덜댔다.

레이가 앞으로는 악신의 유물을 보이는 족족 깨부수겠다고 선언하자 아프텔은 그러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그리 말싸움을 이어가던 도중 클레멘스가 깨어났다.

"화, 황실에서 보내서 오신 것 아니었소?"

"이야, 그걸 믿었어? 그동안 장사꾼 노릇 하면서 사기 안 당한 게 용하네."

"?"

얼을 타는 클레멘스에게 상황을 대략적으로 인식시켜준 레이가 말을 세웠다.

필립스 백작령에 클레멘스를 데려가려면 만약을 위한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일단 옷부터 벗어."

"...전부?"

"속옷까지 전부."

"..."

클레멘스는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었다.

레이는 클레멘스를 알몸으로 만든 후 소지품을 꼼꼼히 검사했다.

잠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레이가 클레멘스의 가슴 주위로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서클에 맺어진 계약 각인을 외부로 투영해 보라는 뜻이었는데, 클레멘스는 한참을 헤맨 끝에 레이가 원한 것을 해냈다.

해독 권능을 이용해 계약 각인을 살핀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계약 하나는 어디 갔지?"

클레멘스가 맺고 있던 계약 각인은 총 세 가지였다.

가문과의 계약, 정령과의 계약, 그리고 플로리아와의 계약.

그중 가문과 맺었던 계약이 사라지고 없었다.

뒤늦게 변화를 깨달은 클레멘스가 곧 슬픈 얼굴을 했다.

"...각인을 맺었던 분이 배에 타고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클레멘스는 대답을 하고 나서 뒤늦게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죽은 가문 사람을 존대한 걸 혹시 거슬려하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레이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상단을 이끈 경험과 지식은 백작령에 도움이 되겠지만... 넌 갇혀 지내다시피 해야 할 거야."

얼굴을 가린다 해도 클레멘스의 굳은 반신은 너무 특징이 명확했다.

네 목숨을 구해준 정령과 헤어질 각오도 해야 한다며 말을 덧붙인 레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어?"

"...살고 싶습니다."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라지."

복잡한 얼굴을 한 클레멘스에게 옷가지를 던져준 레이가 말을 덧붙였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영지야. 지내기 나쁘진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다 입었으면 출발하지."

레이와 클레멘스를 태운 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로필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나가 손에 쥐고 있던 장검을 놓았다.

장검 위에 새겨진 술식이 환히 빛나더니,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장검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실험이 성공한 것 같자 로필렌이 신음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오우..."

"..."

루나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사라졌던 장검이 루나의 손에 잡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장검은 이리저리 뒤틀려 고철이 되어 있었다.

아공간에 진입할 때 발생한 부하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결과였다.

비록 무기는 망가졌지만, 무기가 망가졌다는 건 실험 자체는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루나와 로필렌은 아공간에 수납 가능한 아티펙트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봤다면 기절했을 거야."

로필렌이 연거푸 감탄했다.

아공간 수납에 관련된 마법 이론은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오벨리스크에서 얻었다.

허나 책에 적힌 이론을 직접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공간 수납을 위해 새겨 넣어야 할 마법회로의 경우 대상이 된 물건의 형태, 재질, 무게에 따라 일일이 구조를 재설계해야 했다.

게다가 마법회로를 새겨 넣는 과정에서도 물건이 변형되기에, 실시간으로 회로를 수정하고 보완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은 고도의 연산 작업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전문적으로 아공간 마법을 연구한 마법사 수십이 관련 아티펙트까지 총동원해서 협력해야 시도해 볼만한 작업이었다.

헌데 루나는 마나회로를 새기는 작업을 로필렌 한 명의 보조 아래 완수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성과였다.

로필렌은 루나의 재능이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는 자들과도 궤를 달리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잘 적응되지 않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러니?"

루나는 실험에 성공해 놓고도 감흥을 느끼긴커녕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나가 실망스러운 눈으로 뒤틀린 장검을 바라봤다.

기왕이면 레이에게 선물할 수 있는 아티펙트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어지간한 금속은 아공간 진입 시 발생하는 부하를 견디지 못한다.

로필렌이 뒤틀린 장검을 건네 받아 살피며 말했다.

"이 촌구석에 공간 괴리를 버틸 수 있는 재질이 있을 리가... 아, 하나 있다."

"?"

"드래곤 하트라면 충분히..."

"..."

루나가 떫은 얼굴로 로필렌을 바라봤다.

과거 드래곤 하트의 연구를 급히 완성해야 했을 때 로필렌을 도왔던 루나는 드래곤 하트가 지금 누구 가슴에 들어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로필렌이 입 꼬리를 올린 채 농담이었다고 해명했다.

깔깔 웃은 로필렌이 뒤들린 장검을 다시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너도 참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구나."

질투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아끼고자 한다.

언뜻 보기엔 아름다웠으나, 그건 맹목적이고 뒤틀린 사랑이었다.

"그런 태도를 견지해봤자 좋은 결과를 얻지는..."

"루나!"

실험실 밖에서 루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렌이었다.

문을 열어주자 카렌은 웃음꽃을 피운 채 레이가 오늘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같이 마중하러 갈래?"

"...응."

고개를 끄덕인 루나가 잠시 고민하다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책을 뒤적이던 루나가 특히 단단하고 두꺼운 책을 품에 챙겼다.

이번에도 여행 갔다 온 선물이랍시고 서적 같은 걸 건네면 품에 있던 책으로 머리를 두드릴 생각이었다.

허나 영주성으로 향했음에도 루나와 카렌은 레이를 만나지 못했다.

레이가 마차 안에 숨어 영주성에 들어갈 때까지 얼굴을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디디에와 요하나는 다른 임무를 하나 맡게 되어서 귀환이 며칠 늦는다고 젠킨슨이 전해주었다.

카렌은 레이 얼굴을 보겠다고 영주성 정문에서 기다렸다.

허나 백작가 시종이, 레이는 임무 보고 때문에 며칠 동안 영주성에서 머물러야 되니 그만 돌아가라고 손을 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카렌은 풀이 죽어 툴툴거렸다.

"얼굴이라도 잠깐 보여주지..."

괜히 돌맹이를 툭툭 차는 카렌을 보고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 안 돌아왔어."

"응...?"

"레이, 마차에 없었어."

루나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번에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고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듯했다.

하루 이틀 안에는 귀환할듯 싶었는데, 과연 레이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줄까 확신이 안 갔다.

불안해진 루나가 조용히 입술을 씹었다.

*

레이는 말을 타고 달린 끝에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디디에와 요하나가 만약을 위해 야영을 해가며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로브를 뒤집어쓴 레이가 말을 타고 달려오자, 처음엔 긴장을 끌어올리던 요하나가 이내 레이를 알아보고 화색했다.

사람도 안 다니는 길에서 야영을 한다는 게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남에게 발각되면 안 되기에 은신한 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던 요하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에 신이 났다.

"빨리 와!"

요하나가 제자리서 방방 뛰었다.

레이가 클레멘스를 실은 채 가까이 다가오자 디디에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된 거냐?"

"예, 뭐... 자세한 건 돌아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레이가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검 빌려줘서 고마워."

"응."

레이는 요하나와 헤어지기 전 제플린의 X 시리즈를 빌려 갔다. 잠깐 쓰고 돌려주겠다며 말이다.

당시 레이가 얻을 수 있는 검 중 요하나의 검이 압도적으로 성능이 좋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하나가 히히 웃으며 검을 돌려받았다가, 경악했다.

"어, 어...?"

입을 쩍 벌린 요하나가 다시 한 번 검을 훑어보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 내 검!! 내 검이 왜 이래!!"

레이를 믿고 빌려주었던 검이 크게 손상되어 되돌아왔다.

검신은 그을리다 못해 부분적으로 녹아내려 형태가 무너져 있었고 검 자루 또한 이리저리 찌그러져 있었다.

이건 뭐 수리해서 써먹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요하나가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거 어떡할 거야아!!"

요하나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요하나는 몇 년 동안 레이가 선물한 검을 애지중지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 항상 검을 손질하고는 했다.

품에 안고 자는 날도 많았다.

그만큼 레이가 선물한 검은 요하나에게 소중한 검이었고, 또한 값비싼 물건이기도 했다.

헌데 잠깐 쓰고 '무사히' 돌려주겠다고 했던 소중한 검이 고철이 돼서 돌아왔다.

거품을 물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야아!! 내 검 돌려내! 내 검 돌려내라고오!! 이거 어쩔 건데!!"

"..."

요하나의 책망을 들은 레이가 로브를 덮어쓴 채 축 처진 얼굴을 했다.

사실 요하나의 반응 자체는 타당했다. 빌려준 물건이 저 꼴이 돼서 돌아오면 레이 또한 뒷목을 잡았을 터다.

거기다 제플린의 X 시리즈가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니지 않은가.

허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목숨 걸고 불순분자를 제거하고 왔는데 저런 소리를 들으니... 마음속에서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레이는 괜히 옛날 생각이 났다.

아직 레이가 한참 어렸을 때, 지미가 갱단과의 다툼에서 열심히 구르고 귀환한 날이 있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돌아온 그날의 지미에게 레이는 보육원 예산 좀 더 지원하라고 바가지를 긁었었다.

그때 지미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머리카락이 빠져가는 지미의 얼굴을 떠올린 레이가 눈물 훔치는 시늉을 했다.

지미, 이제야 깨달았어요. 어찌 그리 사셨나요. 돌아가면 효도할게요.

레이가 자기 반성을 하고 있는 사이 요하나의 언성은 계속해서 높아졌고, 디디에의 표정은 급격히 심각해 졌다.

제플린의 X 시리즈가 그리 쉽게 녹아내리는 재질로 된 검이 아니다.

더군다나 '레이의 마나를 머금은 상태의 X 시리즈'를 고철로 만들려면 최고위 섬멸 마법에 비견되는 화력이 필요했다.

"레이, 부상은 괜찮은 거냐?"

"뭐... 아직은 버틸만 합니다."

답변이 이상했다.

디디에가 다급히 손짓했다.

"로브를 벗어봐라."

잠깐 요하나 눈치를 본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감춰봤자 부상을 계속해서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는 껄끄러워 하면서도 진물에 젖은 로브를 벗었다.

직전까지 징징대던 요하나가 레이의 모습을 보고 덜컥 굳었다.

"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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