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2)
131화
사슬이 얼음섬을 뒤덮는다.
뒤늦은 지원처럼 보였으나, 축성된 창은 레이가 바라던 타이밍에 성공적으로 전장에 도착했다.
신성 결계는 결코 무적이 아니다.
레이를 상대로 도리어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창 하나에 새겨진 신성 결계 따위는 손쉽게 박살 낼 수 있었다.
만약 레이가 도착하자마자 배 위에 신성 결계가 펼쳐졌다면 5초도 안 되어서 무너져 내렸을 터다.
그렇기에 레이는 10분 이상 전투가 지속되었을 때를 한정해 창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지금, 기사 전력을 대부분 희생한 데다 마법사들의 마나까지 소진한 적들은 결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시간만 있다면 큰 피해 없이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결계의 한가운데서 레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질 끌리는 몸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던 레이가 이내 몸을 숙인 채 가속했다.
하나 남은 적들의 그래듀에이트가 사슬을 끊어내던 도중 레이의 돌진을 인지했다.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찰나 결계를 이루던 사슬이 두 사람을 향해 휘몰아쳤다.
화르륵!
그래듀에이트의 몸을 뒤덮은 사슬이 갑옷을 파고들어 살가죽을 태우기 시작했다.
근육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래듀에이트는 레이 또한 비슷한 꼴을 겪어야 되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종류의 신성 결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듀에이트의 판단은 옳았으나, 레이의 몸을 뒤덮은 사슬은 레이를 태우지 못했다.
트드득!
도리어 스스로 불타올라 바스러져 나가는 신성한 사슬들.
이 사슬이 누구를 위해 안배된 기적인지 깨달은 그래듀에이트는 탄식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불타오르는 몸으로 휘두른 검격이 레이를 빗겨갔다.
허나 레이의 검격은 정확히 상대의 목을 갈랐다.
레이는 두 걸음을 걸을 동안 양옆으로 휘청인 뒤 또 다시 앞으로 가속했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을 견뎌내며 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항전했다.
이미 레이의 몸뚱이는 한계에 다다른 듯이 보였다.
그건 사실이었지만, 레이의 뇌리에 각인된 기술은 의지가 남아있다면 끊어진 힘줄로도 검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레이의 모습은 조금도 고결하지 못했다.
악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자마냥 처절함으로 점철된 레이의 투쟁을 마주한 적들은, 레이를 죽여야만 멈춰세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끌어모아 사슬을 끊어내며 결계를 부수고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극히 불리한 환경인 결계 내부에선 레이를 멈춰세울 수 없었다.
결계만 깨뜨리면, 검기를 방출할 마나와 체력조차 없는 레이를 쉽사리 해치울 수 있었다.
허나 레이는 악착 같이 그들을 물고늘어지며 목을 베어냈다.
촤악!!
또 한 명의 마법사가 희생되는 순간.
마침내 브리기테가 결계의 영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결계를 무너뜨렸다.
생존에 성공한 것은 브리기테와 6클래스 고위 마법사 한 명.
6클래스 고위 마법사는 다 타들어간 살가죽을 움켜쥐며 태세를 정비하려 했다.
허나 정신을 제대로 다잡기도 전에 무너져 가는 결계 속에서 레이가 솟구쳤다.
고위 마법사가 황급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트드득!
얼음 송곳이 빙판에서 튀어나와 레이를 막아섰다.
고위 마법사는 잠깐 안심했지만,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막대한 기운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콰가각!!
도약 검기를 막아내며 팔 하나가 날아갔다.
어느새 얼음송곳을 부수어낸 레이가 고위 마법사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다.
"..."
움직임을 멈춘 고위 마법사가 빙판 위로 쓰러졌다.
홀로 남은 브리기테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분명 대비를 했었다.
시그니 산맥에 공간검의 사용자가 찾아왔다는 정보가 레인저를 통해 전해졌기에, 어쩌면 오시리스 백작령에도 동일한 추격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만약을 위해 공간검의 사용자를 상대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진행했었다.
허나 공간검의 사용자가 홀로 배 위에 떨어져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그 강함 또한 예상을 상회했다.
경지는 아직 그래듀에이트 수준에 머물고 있는 주제에 절대적인 강함은 이미 로드 급에 근접해 있었다.
"..."
이대로 끝까지 저자와 싸운다면 승리할 수 있을까.
거리는 가까웠고, 마나를 소진한 브리기테는 한동안 2~3 서클 마법만을 쓸 수 있었다.
물론 레이가 훨씬 극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평생을 멸시의 시선 속에 살아온 브리기테보다 더욱 더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분명 열 번을 싸운다면 열 번 모두 내가 패배하겠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한 브리기테가 마지막 마법을 준비했다.
우드드드득!
브리기테가 서클로부터 뽑아낸 마나를 퍼뜨리자 기현상이 일어났다.
조각났던 뱃조각 몇 개가 바닷속에서 떠올라 저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뭉쳐진 뱃조각 위로 떠오른 것은 다섯 개의 마법진이었다.
레이는 마법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지막 기운을 짜내 모로스 위로 검기를 발현해 돌진했다.
정체로 모를 마법진을 막아내기 위해 체력을 소모할 바에야 브리기테를 죽여야 했다.
다섯 개의 마법진과 브리기테의 서클이 발광함과 동시에 레이의 검이 브리기테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푸욱!!!
브리기테의 가슴으로부터 핏줄기가 터져나왔다.
레이는 잠시 당황했다.
브리기테의 마법진이 성공적으로 전개된 건 분명한데, 주변 어디에도 마법이 발현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핏물이 섞인 숨을 몰아쉬던 레이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브리기테의 지팡이가 사라져 있었고, 악신의 축복이 떠나간 브리기테의 반신은 다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브리기테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비록 승리하진 못했으나... 내 역할은 마쳤어."
브리기테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의 거래가 함정일 것이라 추측했음에도 직접 나섰다.
마티아스 후작가가 가져올 유물이 진품이라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허나 유물을 확보한다고 해도 귀환하지 못하면 그냥 개죽음이다.
때문에 오시리스 백작령에 정박한 배에 새겨진 가장 핵심적인 마법진은 '장거리 전이'였다.
아공간 기술을 응용한 전이 마법은 설령 배가 침몰한다고 해도 전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유감이군, 제국의 개야..."
만약 레이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전이 마법을 감지하는 것도, 공간검으로 전이 마법을 저지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레이는 도약 검기조차 쏘아낼 여력이 없었다.
"...그래, 유감이군."
완성된 악신의 유물을 놓친 것은 입맛이 썼으나, 레이 또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악신을 숭배하는 왕국의 가문이 제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레이가 천천히 검을 뽑아내자 브리기테의 시신이 힘 없이 무너졌다.
레이는 브리기테의 로브를 벗겨서 자기가 덮어썼다.
"크흡... 흡..."
전투가 끝났음을 깨닫자, 억눌렀던 고통이 터져나오며 뇌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다.
곧 근해에서 발생한 전투를 조사하기 위한 정찰선이 다가올 텐데, 발견돼도 문제고 안 돼도 문제다.
되도록이면 들키지 않고 자력으로 귀환하는 게 최선이었다.
고민하던 레이가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네 주인은 운이 좋군."
레이가 도마뱀 형태를 한 얼음 정령을 향해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얼음 토막 위에 기절한 클레멘스가 축 늘어져 있었다.
물에 빠진 후 전투에 휩쓸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실 레이는 클레멘스가 목숨을 잃을 확률이 더 높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얼음정령이 어떻게든 힘을 써서 클레멘스가 물에 빠져 죽거나 더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막은 모양이었다.
이리 주인을 생각하는 정령은 잘 찾아보기 힘들었다.
레이는 얼음판을 만들어 올라탄 후 바람 정령을 소환했다.
플로리아의 도움을 받아 계약한 정령이었는데, 사실 레이는 정령과의 계약을 웬만하면 맺지 않으려 했다.
심장을 이루는 서클이 오직 공간검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정된 서클인지라 정령 계약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바다 위에서 귀환할 방법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잠깐 계약을 맺었다.
촤아악!
정령이 만들어낸 바람이 얼음판을 밀어냈다.
레이는 기절한 클레멘스까지 옮겨 태운 후 미리 봐두었던 해안을 향해 얼음판을 이끌었다.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졌지만, 레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의 초점을 다시 잡았다.
어느덧 얼음판이 해안에 닿았다.
"...부상을 좀 치료해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소."
굳은 얼굴로 해안에서 대기하던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는 수평선 너머에서 불길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번져왔음을 분명히 느꼈다.
또한 레이가 얼마나 강대한 적과 맞서서 승리했는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로브를 살짝 들춰내 레이의 상처를 확인한 알베르트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부상이 너무 심각하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움직일 수 있게만 만들어.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그리 하겠소."
알베르트는 품 속에서 가느다란 침을 꺼내 레이의 상처에 찔러넣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침술에 레이는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뭐야?"
"침을 통해 신성력을 침투시켜 신체를 내부에서부터 회복시키는 시술이오. 중상자를 회복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이오."
물론 얇은 침을 통해 신성력을 체내에 안정적으로 흘러넣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알베르트는 가능했다.
레이는 더는 대꾸 않고 바위에 몸을 기댔다.
온몸을 뒤덮은 고통은 신성력을 투입한 후 몇 시간 지나서야 조금씩 가라앉았다.
알베르트는 토마스에게 주변 경계를 맡긴 채 땀을 줄줄 흘리며 신성력을 불어넣다가 간신히 숨을 돌렸다.
호흡 기관의 화상을 치료했고, 박살난 왼팔을 손 봤으며, 그밖에 손상을 입은 주요 장기를 회복시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였고, 살가죽을 태운 화상 같은 건 아예 그대로였다.
알베르트는 레이가 치료 도중에 기절하리라 확신했으나 레이는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침을 뽑아낸 알베르트가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를 지원하는 세력이 내 생각보다 힘이 부족한 것 같소만... 다른 곳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떻겠소?"
알베르트는 레이를 위해, 또한 대의를 위해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레이는 제대로 된 후방 지원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엘-람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가 이리도 위험천만하게 방치되다니.
알베르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레이가 교단에라도 몸을 의탁한다면 템플러 수십을 쉽사리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고려해 주시오."
"...이봐, 템플러. 내가 엘-람의 사도라 인정받는다고 해도 황제를 새롭게 앉히거나 귀족을 멋대로 처형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알베르트는 독실했지만 순진하지는 않았기에,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추잡해질 수 있는지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엘-람의 사도라 해도 권력에 위해가 된다면 칼을 들이댈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레이가 입을 다문 알베르트를 보고 킥킥거렸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레이는 스스로를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초월자가 용사 역할을 맡길 생각으로 환생을 시켰다기엔 스타팅 포인트가 너무 불리했다.
몸뚱이 상태도 글러먹었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한 군데야."
필립스 백작령.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지도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레이를 알베르트가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날 찾아오시오. 도움을 드리겠소. 교단은 언제든지 당신을 환영할 것이오."
"나는 네 생각만큼 호인이 아니야."
당장도 레이는 템플러를 죽여 입을 막는다는 선택지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로브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나 너무 많이 이들과 접촉했다.
허나 템플러가 실종된다면 교단이 움직일 것이고, 이는 더욱 큰 위험을 초래했다.
또한 짧은 시간이지만 알베르트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던 레이는 템플러들에게 손을 쓰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교단 또한 네 생각만큼 깨끗하지 않아. 네놈이 유별날 뿐이지, 죄가 깊은 놈들이 많아."
알베르트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물론 동료 템플러들 중에서도 행동이 부적절한 자들이 있긴 하나, 그 정도가 아주 지나친 경우는 없었다.
허나 레이는 알베르트가 모르는 걸 알고 있었다.
레이는 환생 전에 친구가 들려준 소설 내용을 대부분 망각했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내용 또한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교단에 관한 것이었는데, 레이는 '불쾌함' 때문에 그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어쨌든 신세를 졌어."
마지막엔 사람 좋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한 레이가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너한테도 신세 졌다."
토마스의 어깨를 한 번 쳐준 레이는 준비됐던 말을 끌고 와 아직까지 기절해 있던 클레멘스를 말 위에 실었다.
이별을 앞두고 알베르트가 가볍게 물었다.
"그자는 왜 챙기시오?"
"아, 이놈 말이지."
챙겨줄 의리가 있는 놈도 아니었고, 안전을 위해서는 죽여서 묻는 게 옳긴 했다.
그럼에도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건...
"동질감 때문이겠지."
빌어먹을 초월자 때문에 좆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그런 동질감.
물론 클레멘스의 쓰임새가 없고 위험하기만 할 것 같으면 다시 처분하리라.
작게 중얼거린 레이가 말을 몰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레이를 보며 알베르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거친 꿈을 한 번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레이가 먼저 찾아오지 않는다면 평생 함구해야할 인연을 떠나보낸 알베르트가 토마스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
토마스는 잠시 레이가 떠났던 길을 바라봤다.
개처럼 처맞았던 토마스였기에, 모습을 가리고 목소리를 변조한 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돌아가서 기도를 올려야겠다.
당신의 사도를 보호하시고, 부디 세상이 어려운 시기를 굳세게 이겨낼 수 있게 하소서.
*
기절했던 클레멘스는 몸이 위아래로 계속해서 울렸던 탓에 멀미를 느끼며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말의 엉덩이와 흙먼지, 그리고 레이의 뒷모습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클레멘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궁으로 가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필립스 백작령으로 가지."
"...?"
잠깐 얼을 탄 클레멘스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거, 거긴 왜 가는 겁니까?"
"내가 필립스 백작령 사람이니까."
"...?"
눈을 깜박인 클레멘스가 말을 떠듬거렸다.
"화, 황실에서 보내서 오신 것 아니었소?"
"이야, 그걸 믿었어? 그동안 장사꾼 노릇 하면서 사기 안 당한 게 용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