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1)
130화
찢겨나간 뱃조각들을 밀어내고 떠오른 얼음섬 위에서.
레이가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기사 두 명이 돌격을 감행했다.
츠즉!
기사들이 쥔 검에서 검기가 치솟는다.
그들의 검기는 바위쯤은 쉽사리 잘라낼 수 있는 만큼 날카로웠으나 검강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사들의 검은 검강과 맞닿는 동시에 빛을 잃고 꺾여버렸다.
검을 쥐고 있던 기사들의 육체 또한 검강에 짓이겨져 양단됐다.
언뜻 의미 없는 죽음처럼 보였으나, 두 명의 기사는 목숨을 희생해 레이의 검이 완전히 휘둘러지는 걸 막았다.
마법사들을 노리고 도약 검기를 쏘아내려던 레이가 검을 회수했다.
그 사이 그래듀에이트 두 명이 레이에게 달라붙었다.
콰가가가각!!!
맞부딪친 검강이 서로를 할퀴어대며 섬광을 뱉어냈다.
레이는 이들이 공간검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음을 인지했다.
이들은 도약 검기를 활용한 후방 타격을 저지하기 위해 악을 쓰며 들러붙고 있었다.
처음 예상보다도 훨씬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 속에서 레이가 서클을 강맹히 회전시켰다.
마법사들은 교전이 발생했을 때 지형지물을 변형시켜 효율적으로 전투를 이끌고는 한다.
이는 바다 위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발을 디디는 곳의 얼음 상태를 뒤바꾸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됐다.
때문에 레이는 서클의 냉기로 주변을 뒤덮어서 일종의 결계처럼 사용했다.
마법사들은 레이 주변의 마나를 제어해 자세를 무너뜨리는 걸 포기하고 다른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려는 순간 기사들이 검기를 난사했다.
콰가가가가각!!!
레이는 검기의 폭격을 받아내며 도리어 그래듀에이트 둘을 찍어눌렀다.
얼음섬 일부가 전투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순간, 검은 벽이 불쑥 치솟아 레이의 시야를 가렸다.
"..."
레이가 정신을 집중했다.
검은 벽 너머에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응집되어 가는 게 느껴진다.
저 응집된 마나가 어떠한 마법으로 발현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불덩이로 변해 쏘아진다면 그 궤적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레이는 일단 왼손에 쥔 검을 휘둘러 도약 검기를 마법사들에게 쏘아내려 했다.
그 찰나 검은 벽이 무너지며,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작살이 레이를 향해 쏘아져 왔다.
레이는 감지도 못했던 작살을 향해, 마나에 의해 한계까지 강화된 반사신경에 의지해 검을 휘둘렀다.
쩌억!!
레이의 검격이 작살의 정중앙을 뭉갰다.
그 순간, 수십 가닥으로 잘게 바스러진 작살의 파편이 다시 한 번 레이를 덮쳤다.
쫘아악!!!
마나가 담기지 않은 금속이었기에 살상력에 한계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살갗을 거칠게 찢어내긴 충분했다.
피투성이가 된 레이가 몸을 숙인 채 밀려났다.
쐐애애액!!
작살이 만들어냈던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뒤늦게 레이의 귓가를 후려쳤다.
입에서 피를 토해낸 레이가 뒤통수를 노리던 그래듀에이트의 검강을 받아냈다.
파가각!!
레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무언가 거대한 마법이 발현됐는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 건 순수 금속으로 이루어진 작살이었다.
다급히 머릿속을 뒤진 끝에 가설을 하나 도출했다.
마법을 통해 발생시킨 전자기력을 활용한 금속 탄자 발사.
'...이러다 죽겠군.'
대비가 되어 있던 탓인지,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에 비해 전술 수준이 궤를 달리했다.
높은 경지에 이른 마법사나 기사는 '개안'을 이루며 마나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는데, 때문에 시야를 잠시 차단당해도 대부분의 상황에 쉽사리 대처했다.
저들은 이 점을 역이용해 마나가 제거된 금속 탄자를 쏘아내 레이의 허를 찔렀다.
육감을 믿고 방심했던 레이는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생각을 바꿔야겠어.'
레이는 본래 도약 검기로 마법사들을 먼저 처치할 생각이었다.
허나 상황을 보니 마법사들을 우선해서 끊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전술적으로 완성된 부대를 어쭙잖은 임기응변으로 상대해봤자 더 큰 피해만 입을 터.
이제 레이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정면 돌파.
물론,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어두운 감정이 흘러나와 레이의 가슴을 잠식했다.
콰앙!!!
앞 뒤로 휘둘러지는 검강을 받아낸 레이가 핏물을 머금은 채 웅얼거렸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
원치 않았던 두 번째 삶이다.
빌어먹을 꼴을 너무 많이 봤다.
때문에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다만.
"이별을 앞두고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그게 두려웠다.
쩌엉!!
레이의 움직임이 급격히 가속됐다.
뒤에 있던 그래듀에이트를 걷어차서 밀어낸 레이가 모로스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제국의 신검으로부터 공간검의 검강이 세차게 터져 나온다.
레이가 정면에 선 그래듀에이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각!!!
오버드라이브로 가속된 검격이다.
표적이 된 그래듀에이트가 다급히 검을 들어 방어를 시도했지만 자세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떨어져내리는 섬광에 의해 어깨가 분쇄되는 순간.
다른 기사가 끼어들어 레이의 검을 밀어냈다.
레이의 검을 밀어냈던 기사는 상체가 통째로 찢겨나갔으나, 본래 목적대로 그래듀에이트의 목숨을 구해내는 것은 성공했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눈앞에 있는 그래듀에이트를 집요하게 노렸다.
제 아무리 그래듀에이트라 해도 레이의 검을 두 번 이상 연속으로 받아내지 못했다.
엑스퍼트 급 기사들이 고기 방패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레이에게 걷어차였던 그래듀에이트 또한 악착 같이 레이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
빙판이 붉게 얼어붙어가는 광경을 브리기테가 조용히 지켜봤다.
레이를 정면에서 막아내기 위해선 그래듀에이트가 최소 둘은 필요하다.
둘 중 하나라도 죽는 순간 삽시간에 진형이 붕괴될 것이고, 레이의 검강은 거리를 벌리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닿을 것이다.
때문에 브리기테는 기사 전력이 전멸하기 전에 레이에게 반드시 치명상을 입혀야 했다.
퉁!
브리기테의 지팡이가 허공을 두드렸다.
검은 에너지가 뻗어나와 레이의 표적이 된 그래듀에이트에게 쏟아졌다.
갈려나갔던 그래듀에이트의 어깨가 검고 끈적이는 무언가에 의해 뒤덮였다.
치료가 된 게 아니라, 찢어진 인형을 꿰매듯 그저 이어 붙였을 뿐이었다.
보기엔 흉측했으나 이어 붙은 어깨는 다시 제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것은 저주라 불렀고, 누군가는 축복이라 불렀다.
쫘아아아악!!
사방에서 마법사들의 화력 지원이 이어졌다.
마법사들이 지금 벌어지는 전투에서 택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었다.
일단 시야를 가릴 가능성이 있는 마법은 사용해서는 안 됐다.
서로의 시야가 가려지면 유리해지는 건 도약 검기를 방출할 수 있는 레이였다.
전투 시작 직후 시야를 가려 레이의 허를 찌르긴 했지만, 상대가 그런 수에 두 번이나 당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소극적으로 마법을 쏘아내면서, 브리기테를 중심으로 고위 마법을 새롭게 준비했다.
우우웅!!
허공에 거대한 자기장이 생성된다.
레이 또한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고위 마법이 형태를 갖추어 가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악신의 축복 아래 기사들은 더욱 끈질겨 졌고, 레이는 주인 모를 핏물을 뒤집어쓴 채 앞을 막는 기사를 하나 더 베어냈다.
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자기장 안으로 브리기테의 마나가 흘러든다.
마나에 의해 발생한 열기가 자기장 속에서 플라스마화 되어 극한까지 압축된다.
제어에 실패해 뒤틀려 번져나온 열기조차 악신의 축복 아래 하나의 점으로 뭉친다.
저건 한순간이나마 바다를 갈라낼 수 있는 섬멸 마법이다.
레이는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릴 재앙을 상상하며, 결국 여덟의 엑스퍼트를 죽인 끝에 앞을 막아서던 그래듀에이트를 양단했다.
촤악!!!
악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사도가 아닌 이상 몸이 반으로 갈라지면 죽어야 했다.
그래듀에이트의 시신이 양옆으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브리기테의 지팡이가 레이를 가리켰다.
"플레어(Flare)."
마지막 영창과 함께.
태양을 닮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쫘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수평선 너머까지 밝게 비칠 빛줄기가 번져 나오며 바닷물이 폭발하듯 기화했다.
버섯처럼 피어오르는 증기 봉우리 아래 잠시 잠깐 모습을 드러낸 해저가 붉게 녹아내렸다.
8서클 섬멸 마법, 플레어.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라 해도, 악신의 축복까지 받아 완성된 최고위 마법은 인간이 감내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재앙이었다.
별이 자아내는 열기를 지상에 강림시켰던 마법이 이윽고 빛을 잃었다.
촤아아아악!
밀려났던 바다가 메워지며 파도가 높이 쳤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의 존재감이 여전히 느껴졌다.
서클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내고 공간검을 사용해 빛줄기를 상쇄하고 빗겨낸 소년이 새롭게 만들어낸 얼음 위를 디디고 섰다.
레이는 새삼스레 왼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검의 무게가 거추장스러워 버리려고 했으나, 검 자루에 눌어붙은 손이 떼어지질 않았다.
레이가 움직이지 않는 왼 팔을 무시한 채 다음 발을 내디뎠다.
레이는 상대의 기사 전력이 마법에 휩쓸려 전멸했길 바랐지만, 제때 몸을 뺀 그래듀에이트 하나와 엑스퍼트 하나가 마법사들의 도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마법사들은 서클의 마나를 대량으로 소모해 더 이상 고위 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무사했다.
그리고 레이는, 이제 한계였다.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육체가 버텨주기 힘들었다.
쩌저적!
바다 한가운데가 다시 얼어붙는다.
마법사들이 얼음섬을 만들어 레이가 발을 디딘 빙판에 이어 붙였다.
그래듀에이트가 검강을 뽑아냈고, 마법사들이 지원을 준비했으며, 그들의 수장인 브리기테가 악신의 축복 아래 광휘를 뿜어냈다.
레이가 말 없이 모로스 위로 검기를 발현했다.
이 전력 차는 제 아무리 공간검의 사용자라 해도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브리기테의 눈동자에 희열이 스쳤다.
역사에 새겨진 가장 강대했던 숙적의 후예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가, 바로 내가 저 교만했던 자를 죽일 것이다.
브리기테의 의지에 반응한 마나가 들끓어 오르던 찰나.
브리기테는 뒤늦게 하늘을 바라봤다.
축성된 창이 하나 새롭게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창을 요격하기엔 마나도 모자랐고 거리도 너무 가까웠다.
콰악!!!
떨어져 내린 창이 레이 옆에 박혔다.
그제야 브리기테는 레이의 손등에 성흔이 새겨져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레이가 배에 착지했을 때는 이미 피투성이였기에 성흔을 알아볼 수 없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
치유 결계라 해도 레이가 입은 중상을 단번에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목숨은 조금 연명시켜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브리기테가 심장을 부술 터였다.
허나 창에 새겨진 결계는 치유 결계가 아니었다.
창에 새겨진 결계는, 죄악을 태우는 결계였다.
촤자자작!!
빛의 사슬이 창으로부터 솟구쳐 사방에 떨어져 내린다.
알베르트가 스스로 팔을 긋고 흘린 피로 강화시킨 참회의 결계가 얼음섬을 뒤덮는다.
레이가 준비한 최후의 전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부디."
레이의 눌어붙은 입꼬리가 뒤틀렸다.
"너희들의 죄악이 가볍길 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