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브리기테는 클레멘스의 우는 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손을 옆으로 저었다.
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이 클레멘스를 붙잡고 선원실로 끌고 가려 했다.
그때 피 한 방울이 갑판 위로 떨어졌다.
피 한 방울의 존재감 따위 파도 소리와 바다 짠내에 금세 묻혔지만, 브리기테는 다시 고개를 돌려 클레멘스를 바라봤다.
무언가가 다가온다.
오랜 시간 마나를 다루었던 고위 마법사의 감각이 밀려나가는 마나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브리기테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한 발 늦게 이변을 눈치챈 기사 하나가 눈을 부릅뜨더니 검으로 클레멘스의 목을 겨누었다.
캉!
브리기테의 지팡이가 기사의 검을 막았다.
쉽사리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탁한 눈동자를 지닌 브리기테는, 말없이 클레멘스를 지나쳐서 갑판을 걸었다.
기사는 거친 기세를 클레멘스에게 쏘아내다, 결국 검을 거두고 브리기테를 따랐다.
안도가 내려앉았던 갑판 위의 분위기가 변질된다.
고강한 경지에 이른 자들부터 차례차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브리키테는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 속에서 치솟은 한 줄기 섬광을 눈에 담았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더니... 애초에 황가는... 우리를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군."
쿵!!
오랜 세월이 지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지팡이가 갑판을 찍었다.
얇게 전개된 마나의 장막이 삽시간에 반경을 넓혀가며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훑었다.
장막의 경계선에 하늘에서 비행하는 무언가가 닿는 순간, 초고열의 열선 두 줄기가 갑판 위에서 쏘아졌다.
쫘아아아아악!!!
4서클 마법 레드 레이가 하늘에 자상을 남기며 길게 휘둘러졌다.
하늘을 유영하던 무언가 또한 잠시 잠깐 두 줄기의 열선에 맞닿았지만 푸른 섬광으로 마법을 분쇄한 채 다시 한 번 가속했다.
유성을 닮은 무언가는 잔상을 길게 이어가며 갑판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고함을 치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브리기테는 방어막을 전개했다.
허나 임시방편으로 짜낸 헐거운 방어막 따위론 저것을 막아낼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투를 준비해라."
브리기테가 담담한 음성으로 명령한 직후.
굉음과 함께 배를 감싼 방어막이 바스러졌다.
*
레이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모래사장을 걸었다.
해안가에는 이미 알베르트가 토마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레이는 토마스를 흘깃 보더니 별말 없이 알베르트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끝났어?"
"당신이 요구한 대로 창에 새로운 결계를 덮어씌웠소."
"현재 표적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지?"
알베르트가 눈을 감았다.
명상을 하듯 한동안 조용히 자세를 유지하던 알베르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성흔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져 가고 있음이 느껴지오. 9 km 이상 떨어졌을 것이고, 이제 곧 연결이 끊길 것이오."
답을 들은 레이가 턱으로 슬쩍 축성된 창을 가리켰다.
자신의 오랜 기도가 새겨진 창을 매만진 알베르트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괜찮겠소?"
"괜찮아야지."
레이가 담담한 걸음걸이로 알베르트와 거리를 벌렸다.
축성된 창을 투창할 때 불순물이 닿아있으면 안 됐다.
알베르트의 투창은, 단순히 창을 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었기에 함부로 변주를 줄 수 없었다.
말인즉슨 알베르트가 투창하는 즉시 레이는 알아서 매달려야 했다.
알베르트가 레이와 눈빛을 나눈 후 왼발을 내디뎠다.
"무운을 빌겠소."
알베르트가 팔을 뒤로 당겼다.
동시에 레이가 바다를 향해 모래사장을 박찼다.
레이가 지나간 자리에서 모래가 솟구쳐 오르고, 알베르트가 던진 창이 솟구친 모래를 뚫고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낸 레이가 뒤에서 다가오는 창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그 찰나, 축성된 창이 급격히 가속하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까드득!
레이의 어깨 관절이 뒤틀리며 탁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레이가 이를 악문 채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몸 전체가 뒤로 꺾이며 시야에 담긴 풍경이 일순 고무마냥 길게 늘어졌다.
"큽...!!"
막대한 관성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약 20초 간의 가속을 버텨낸 끝에 간신히 자세가 안정됐다.
레이는 세찬 바람을 이겨내며 오른 다리에 몇 겹으로 묶어두었던 밧줄을 창 끝에 매달았다.
창을 놓쳤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장치였다.
하늘을 갈라낸 창이 이내 성흔의 주인을 찾아냈다.
저 멀리 바다 위의 점처럼 보이는 배를 향해, 창 끝이 서서히 돌아간다.
레이가 코로 들이 마신 숨을 적당히 뱉어냈다.
성흔의 주인과 공명한 창이 푸른 바다를 향해 다시 한 번 가속했다.
공기가 찢어지며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후려쳤다.
허나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배 위의 누군가가 레이의 존재를 눈치챘다.
얇은 마나의 파장이 몸을 훑고 간다 싶더니 붉은 열선 두 가닥이 하늘을 향해 쏘아진다.
쫘아아아아악!!!
신성한 힘이 깃든 창이 급조된 마법을 찢어발기고 떨어져 내렸다.
검은 로브가 마법이 남긴 잔열 탓에 타들어 간다.
레이의 코어와 서클이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했다.
급격히 거대해지는 배의 형태를 인지한 레이가 다리에 묶인 밧줄을 끊어내고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몸뚱이의 속도는 이미 한참 전에 음속을 넘어섰다.
조금 먼저 앞서간 창이 방어막을 바스러뜨렸다.
그 틈을 파고든 레이가 몸을 감속시키기 위해 마법을 발현했다.
허나 감속할 거리가 너무 짧아 큰 효과는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배의 갑판 일부가 터져나가다시피 부서져 내렸다.
마나로 강화되고 강화된 레이의 전신에서 핏물이 위로 훅 솟구쳤다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허나 레이는 쓰러지지 않았다.
찢어진 로브를 몸에서 벗겨낸 레이가 두 다리로 갑판을 딛고 섰다.
잠깐 뒤로 기울었던 거대한 배가 균형을 되찾기 위해 출렁인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기괴한 광경이 경지의 고하를 막론하고 숨을 죽이게 만든다.
레이의 착지 과정에서 발생한 후폭풍에 휩쓸린 몇 명은 패닉에 빠진 채 갑판을 뒹굴었다.
레이가 입에 물었던 물주머니를 터뜨렸다.
물주머니 속의 포션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창에 새겨져 있던 신성 결계가 발현됐다.
일정 범위 안의 생명체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결계가 배를 감쌌다.
레이는 충격이 조금 해소됨을 느끼며 코어와 서클을 회전시켰다.
허나 신성 결계의 축복은 레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상처를 입고 패닉에 빠졌던 자들 또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악신과 야합한 자들이 엘-람의 축복을 딛고 일어선다.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이가, 널브러져 있던 클레멘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억?!"
풍덩!
레이에게 던져진 클레멘스가 바다 위로 떨어졌다.
누구도 클레멘스 따위에게 집중을 분산하지 않았다.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허공에 손을 뻗었다.
수많은 전설과 함께했던 제국의 신검이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섬광이 터져 나온다.
콰가각!!!!
레이가 쥔 두 자루의 검에서 뻗어나온 검강을 각기 다른 기사가 막아 세운다.
두 기사 모두 검강을 발현해낼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였다.
사방에서 다른 자들이 휘두른 검기가 쏟아져 내린다.
도저히 귀족 가문 하나가 홀로 타국에 파견 가능한 전력이 아니었다.
레이를 막아세운 그래듀에이트만 둘이었고 엑스퍼트의 숫자는 열이 넘어갔다.
그리고, 배 위엔 마법사 또한 다수였다.
츠즈즈즉!!
배 위에 미리 새겨져 있었던 마법진에 마나가 흐른다.
갑판이 한 번 꿀렁거리더니, 마법적인 수단으로 액화된 금속들이 갑판을 뚫고 레이에게 쏟아졌다.
삽시간에 레이의 하반신을 덮은 액체 금속이 본래의 모습대로 경화된다.
단단한 강철에 허리 아래가 묶인 순간 다시 한 번 마법진이 발현되며 모든 마법사가 레이를 향해 손을 뻗는다.
마법진에 의해 공명된 마법사들의 마나가 불꽃으로 화한다.
사방을 푸르게 물들인 바다 한가운데서.
붉은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화아아아아아악!!!
마법사들은 오직 하나의 표적을 녹이기 위해 한정된 공간에 대량의 열에너지를 가뒀고, 압축되고 압축된 화염은 두꺼운 결계조차 뚫고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갑판 위를 달구는 막대한 열기를 느끼며 몇몇은 희망을 품었다.
지금 전개한 합동 마법은 어지간한 고위 마법 쯤은 가볍게 상회하는 화력을 자랑했다.
레이 또한 이런 마법을 연거푸 맞았다간 결코 버티지 못하리란 걸 깨달았다.
화염 속에서 레이의 서클이 강렬한 빛과 함께 회전한다.
역사에 새겨진 대마법사가 안배한 최후의 서클이 코어의 힘까지 역으로 끌어들여 냉기를 발산한다.
레이는 기세를 잃고 멀어지는 화염을 보며 판단했다.
이 배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고, 무수한 마법진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새겨져 있었다.
승리를 위해선 반드시 전장을 바꾸어야만 했다.
쐐애애액!!
서클의 성능이 한계까지 발현된다.
코어를 억눌러야 할 서클이 자기 혼자 날뛰어대자 심장이 발작했다.
레이가 혀를 씹어내며 고통에 저항하는 사이, 흘러나간 냉기가 공간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쁘드드드드드드득!!!
화염이 사그라지고 성에가 번져나간다.
배를 뒤덮은 냉기가 만족할 줄 모르고 탐욕스럽게 열을 집어삼켰다.
모두가 더는 숨을 들이쉬지 못하고 호흡을 멈췄다.
근방의 기온이 절대영도에 가깝게 하강한다.
똑
똑
어디선가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갑판을 적시더니, 이내 얼어붙은 대기가 액화되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마법사의 서클이 만들어낸 괴이한 풍경 속에서.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검에 맺혔던 검강이 통째로 증발한다.
직후, 배를 감싸고 있던 공간이 사방에서 갈라지며 수십 개의 검기가 동시에 내리꽂혔다.
배에 새겨졌던 방어 마법진은 마나를 머금은 냉기에 얼어붙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마법사와 기사는 공간을 갈라내고 나타나는 검기를 전부 방어할 수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배를 유지시키는 중심 골조가 검기에 의해 박살 났다.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배는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졌다.
찢겨나간 뱃조각들이 흩어지거나 가라 앉았다.
배가 침몰한 자리에 남은 것은 레이가 만들어낸 얼음섬이었다.
기사들은 개의치 않고 얼음섬에 발을 디딘 후, 얼음섬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레이를 향해 검강과 검기를 발현했다.
마법사들은 어렵지 않게 바닷물을 밟고 서거나, 아예 공중에 떠 있었다.
적의 중심 전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전투는 이제부터였다.
레이의 눈동자가 시푸르게 빛났다.
*
플로리아는 손님들을 마중한다는 핑계를 대고 항구에 나와 있었다.
활기가 도는 평화로운 항구에선 신분이 귀한 자들도 여럿 돌아다니며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진, 분명 그랬을 터다.
허나 이제는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화염 줄기가 구름과 맞닿을 듯 치솟아 오른 이후.
지평선 너머 항구에 있던 사람들조차 위협을 느낄 만큼 위력적인 섬광과 굉음이 연거푸 파도를 타고 흘러오기 시작했다.
항구에 있는 이들 중 오직 플로리아만이 저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플로리아는 제자리서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