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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28화 (128/446)

128화

악마 혹은 악신.

본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물체들이 간섭받을 일이 없어야 할 다른 차원의 초월적 존재들.

그들의 계약자가 남긴 유물들은 악마와의 소통과 계약을 수월하게 해주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또한 그 자체로 강력한 병기인 경우가 많기에, 의심 가는 세력에게 유물이 넘어가는 것은 되도록 저지해야 했다.

레이는 이러한 정보를 아프텔에게 얻었지만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비교적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엔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 감수해야 할 리스크의 종류도 많았으며, 나비 효과도 신경 써야 했다.

예컨데 레이가 벌인 일이 시발점이 되어 제국과 왕국이 급격히 적대적인 상태로 들어선다면 필립스 백작령 또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신경 쓰여 몸을 사렸는데, 템플러의 방해 탓에 유물의 처분에 실패한 이후 레이는 마음을 바꿨다.

만약 악마 숭배와 연관된 가문이 마티아스 후작가를 등에 업고 제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면 장기적으로 훨씬 커다란 위협이 될 터다.

되도록이면 그들의 영향력을 왕국 내부로 가둬두어야 한다.

그리하기 위해선...

'강력한 경고가 필요해.'

섣불리 그들이 제국 내부로 손을 뻗지 못하도록, 차라리 제국을 완벽한 적으로 인식시키는 게 나았다.

배를 타고 왔던 왕국의 사람들을 전멸시킨다.

배에 탔던 이들 중 죄 없는 자 또한 존재하겠지만 이를 감수하고 완벽히 말살한다.

레이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까다로워.'

항구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머무는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올 테고, 설령 죄 없는 그들을 전부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뒷수습이 안 됐다.

레이는 출항한 배를 노려야 했다.

'배에 잠입할 수 있다면 일이 쉽겠지만...'

배가 항행을 시작했다가 바다 위에서 문제가 생기면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배는 출항하기 전 검수 절차가 대단히 까다로웠으며, 이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범한 상단의 배라면 다르겠지만, 고급 전력을 다수 파견한 타라니스 가문의 배라면 어설픈 분장이나 마법으로 신분을 속이고 탑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출항한 배를 뒤늦게 따라잡아야 했다.

되도록 흔적 없이 타라니스 가문의 배를 추격해야 했는데 이 또한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어떻게든 타라니스 가문의 배를 추격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너무 빨리 추격이 발각되면 변수가 많아졌다.

레이는 고민 끝에 그럴듯한 작전을 하나 고안했다.

'축성된 창을 이용한 고속 강하 및 타격이 가능하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알베르트는 핼쑥한 얼굴을 했다.

축성된 창을 이용한 장거리 강하 타격은 알베르트로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신박한 전술이긴 했지만, 오랜 교단의 역사 속에서 유사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작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여전히, 강하 타격 따위의 전술은 교단 내에서 제대로 쓰인 적이 없었다.

창을 붙잡고 강하 후 착지할 때 견뎌야 할 충격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충격이 아니오."

"이봐, 템플러. 질문에 대답해. 창에다 사람을 태울 수 있나?"

"...가능하오."

"사거리는?"

"비슷하다고 알고 있소."

중량이 무제한인 건 아니지만 축성된 창은 사람 하나의 무게까지는 버틸 수 있었고, 일단 버틸 수 있는 무게라면 사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 되긴 했지만 본디 기적엔 논리를 들이대는 게 아니었다.

입술을 지긋이 씹어본 알베르트가 말을 이었다.

"창은 비행 중에 두 번 가속되오. 몸의 관절이 이때의 부하를 견디기 힘들 것이오."

"괜찮아. 내 관절들이 워낙 혹사에 익숙한 놈들이라서."

오버드라이브라고, 아주 좆 같은 기술이 있어.

홀로 중얼거리는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알레르트가 이제 2개 남은 축성된 창을 가져와서 꺼내 보였다.

"비행 도중 창을 억지로 감속시키면 착지점이 어긋날 것이오. 당신이 감속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소."

평범한 사람이라면 땅에 꽂히는 즉시 육편으로 변할 것이다.

엑스퍼트 급을 넘어선 기사 정도 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부상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착지하자마자 부상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굉장히 불리한 일이었다.

레이가 축성된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 위에다 결계 말고 다른 기능을 덮어씌울 수는 없나? 사용자를 치유해주는 기능 같은 거."

"일정 범위 안의 생명체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상처의 치유를 돕는 결계가 펼쳐지도록 개량할 수는 있소."

"괜찮네. 거기다 입에 포션 물고 떨어지면 기절하지는 않겠지."

배와 충돌 직전 마법을 사용해서 충격을 분산시킬 수 있다.

무릎 관절이 좀 돌아가긴 하겠지만 신성력과 포션으로 응급처치가 가능했다.

"뭐, 좋아. 그럼 창에 어떻게 매달릴지 고민 좀 한 다음 다시 올게. 아, 그리고 내일 사람 하나 보낼테니까 성흔 좀 새겨주고. 나한테 새겼던 걸로."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린 레이가 등을 돌렸다.

알베르트는 잠시 창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결계를 새롭게 새긴 창을 준비해 두겠소."

이미 새겨진 결계를 다른 종류로 고치려면 짧지 않은 기도가 필요하다.

레이가 원하는 기한까지 아슬아슬 했지만 알베르트는 쓸데 없는 걱정을 마음에서 지웠다.

저자가 정녕 엘-람의 의지를 대행한다면, 자연스레 축복이 찾아올 것이다.

*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오시리스 백작령을 떠났다.

아쉽게도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 클레멘스의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했지만, 오시리스 백작은 썩 격식을 갖춰 알레시아를 배웅해 주었다.

디디에와 젠킨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실력 행사를 했는가 신경 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알레시아가 떠나고 다음 날 클레멘스의 상단이 항구에 출항하게 되었다.

출항 직전, 두꺼운 장갑을 착용한 클레멘스가 배에 승선하려 하자 타라니스 가문이 고용한 마법사가 다가왔다.

마법사는 클레멘스를 붙잡더니 빛나는 원형의 고리를 만들어내 클레멘스를 훑었다.

일종의 탐지 마법인듯 싶었는데, 이내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가 클레멘스를 배 안으로 들여보냈다.

클레멘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아쥔 주먹에서 기분 나쁜 축축함이 느껴졌다.

꼼꼼한 검수와 신원 확인 과정을 거친 뒤 드디어 배가 출항했다.

몇몇 마법사가 주기적으로 배에 얇은 막을 씌워 배에 달라붙은 침입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배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가속했다.

이내 항구도시가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갔다.

사방이 넓은 바다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승선한 사람들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그때 선원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배가 오시리스 백작령 항구에서 머무는 내내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이 무리의 진짜 주인이 갑판 위로 다리를 옮겼다.

터벅- 터벅-

늙은 노인이었다.

나이 탓에 얇아진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의 걸음걸이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허나 걸음을 걷는 모습이 무언가 이상했는데, 흡사 반신이 굳어있는 것처럼 오른 다리를 움직일 때는 몸 전체가 통째로 끌려갔다.

오른 팔 또한 장식품마냥 허리에 딱 붙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브리기테.

왕국에 존재하는 쌍둥이 마탑의 부탑주였다.

마탑에서도 대외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말이 많은 자였다.

마법을 사용해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갈 수 있다고 해도 걸음걸이가 이리 눈에 띄니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브리기테가 말없이 아공간에서 지팡이처럼 보이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브리기테의 지팡이는 무언가에 잘려나간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고, 깊게 파여 있는 내부엔 둥글어 보이는 물체 하나가 옅게 빛나고 있었다.

"...가져와라."

"여기 있습니다."

마법사 한 명이 공손하게 브리기테에게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마티아스 후작가에게 건네받은, 깨진 구슬 조각처럼 보이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브리기테가 깨진 구슬 조각처럼 보이는 유물을 꺼내 들었다.

손질하듯 유물을 쓰다듬어본 브리기테가 지팡이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츠즈즉

반응이 일어난다.

깨진 구슬 조각 형태의 유물이, 지팡이 속 보주의 균열 사이로 정확히 맞아들어간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몇 번이고 확인을 거쳤지만, 여전히 마티아스 후작가가 건넨 유물이 진품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게 함정일 수도, 예상치 못한 폭발이 발생해 모두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허나 비극적인 결말이 그들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부숴졌던 보주가 결합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완벽한 형태의 보주를 품속에 지니게 된 지팡이가 자주빛으로 점멸한다.

자주빛 기운이 브리기테를 타고 흐르다 이내 흡수됐다.

뿌드드드득!!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가만히 굳어있던 반신의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제자리서 휘청인 브리기테가 오른 발을 내디뎌 중심을 잡았다. 오른 발을, 내딛어 중심을 잡았다.

빼빼마른 가죽 위로 검은 진물이 흘러나와 갑판을 적신다.

보기에 좋지는 않았으나, 브리기테에게 그따위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악신의 축복이 브리기테의 반신에 다시 자유를 찾아주었다.

수십 년 동안 굳어가다 못해 괴사하기 시작했던 오른 다리와 오른 팔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으, 흐흐흐흐..."

웃음이 자기 혼자 흘러나왔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거친 신음에 가까운 환호를 흘린 브리기테가 마법사답게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브리기테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공간검을 사용하는 강력한 처단자를 시그니 산맥으로 보냈다.

헌데 이제와서 제국의 후작가가 접근해 유물을 건네주며 정치적 동맹 관계를 원했다.

함정을 파놓고 계략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였다.

제국 황가가 자국의 귀족들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거나, 혹은 시그니 산맥에 나타났던 공간검의 사용자가 제국과 관계 없는 제 3세력 출신이거나.

후자는 말이 안 되니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황가가 오명을 감추기 위해 진실을 숨겼다면 이는 타라니스 가문에게 큰 기회였다.

마티아스 후작가와 손을 잡게 되었으니 제국에 영향을 행사하기도, 제국의 정보를 얻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황가가 훼방을 놓기 전에 최대한 여러 군데 손을 뻗어놓아야 된다.

브리기테가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본래 클레멘스 상단 출신이었던 자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번 동행 때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괜히 후환을 남겨두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검이 몇 번 휘둘러진 끝에 클레멘스가 고용했던 인물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

클레멘스는 목에 검이 겨눠진 채 제자리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타라니스 가문은 왜 하필 제 상단을 고른 겁니까."

클레멘스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이켜 보면 이번 일에 반드시 클레멘스가 이끄는 상단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타라니스 가문은 클레멘스에게 상단의 이름을 빌려주길 강요했다.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토해내는 클레멘스의 물음에, 브리기테는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왕국에 도착하면 가문으로 돌아가라. 밖에서 추태를 내보이지 말고."

추태.

굳어가는 클레멘스의 반신을 뜻했다.

클레멘스는 외쳤다.

가문의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계약 각인까지 맺었음에도 어찌 이럴 수 있냐고.

브리기테가 듣기에는 철없는 소리였다.

상단주 노릇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 모두가 정령 핑계에 속아주진 않을 것이다.

클레멘스가 유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시선은 타라니스 가문에게까지 닿을 것이다.

클레멘스는 가문이 진즉 자기 목숨을 뺏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했다.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브리기테를 보며 클레멘스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배신감? 물론 마음 한 편에 그런 감정 또한 작게 존재했다.

허나 클레멘스가 울음을 터뜨렸던 이유는, 피를 타고 흐르는 저주에 묶여 이런 선택을 해야 했던 가문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처량함 때문이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두 다리로 갑판을 딛고 선 브리기테를 비난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이런 운명을 타고났을 뿐이다. 우리는 질책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할 환자였다.

허나 클레멘스는 가문 사람들을 비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다.

클레멘스의 장갑을 타고 흐른 피가 갑판 위로 떨어졌다.

강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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