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27화 (127/446)

127화

재차 뒤통수를 맞은 알레시아가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플로리아가 이리 음란할 줄은 몰랐구나! 나는 아직 키스도 못해봤거늘!"

레이가 해주지 않아서 못해봤다.

밧줄에 묶어서 어디 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입맞춤 좀 해보자는데 레이는 번번이 자리를 피했다.

"헌데 플로리아는 벌써 입술을 물고빨다 못해..."

"아니 오해라니까! 이상한 말씀 좀 그만 하세요!"

레이가 알레시아의 입을 막고 가볍게 흔들었다.

"어찌 매번 이상한 타이밍만 골라서 찾아오십니까. 제 뒤만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신 것 같은데."

"그게 바로 여자의 촉이니라!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나의 기사가 한눈을 팔고 있다는 확신이 찌릿하고 찾아오느니라."

"착각이니까 앞으로 믿지 마세요."

"여자의 촉을 무시했다가 남자를 뺏긴 여자들이 수두룩한데 어찌 그리 단언하느냐?"

"그거 소설 얘기잖아요."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니라. 첫 장에 그리 적혀 있었다."

"첫 장에 실화라고 써 놓은 창작물들 중 99%는 날조입니다."

그에 반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라 강조하는 창작물들은 실화일 확률이 높은 법이었다.

한숨을 쉰 레이가 중얼거렸다.

"언제 한 번 방 검사 해야겠네요."

방구석에 또 [바람의 정령 루시아 : 제국 여행기]와 유사한 성격의 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을지 몰랐다.

물론 알레시아는 방을 뒤지겠다는 레이의 선언을 듣고 바로 기겁했다.

"레이! 내 나이가 몇인데 방 검사 타령을 하느냐!"

"그럼 좀 나이에 맞게 구시지요."

"나는 억울하구나. 조신하게 지내보려 했더니 나의 기사는 내게 관심도 안 주고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지 않았느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의 기사는 거짓말쟁이구나!"

툴툴대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어거지로 달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본 플로리아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골치 아픈 얼굴로 미간을 붙잡았다.

레이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플로리아는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마음 또한 함께 다잡았다.

*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 클레멘스는 최근 몇 달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도착한 후 불면증은 더욱 심해졌다.

자칫하다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얼마 없는 살이 쭉쭉 빠졌다.

타라니스 가문은 옛날부터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클레멘스 본인도 유전병을 앓는 만큼, 가문 사람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들이 지닌 심연이 너무나 깊어 보여, 그 심연을 들여다보길 거부하고 아예 가문과 연을 끊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결국엔 힘을 키운 가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지금 여기서 발이 묶이게 됐다.

클레멘스는 상단을 이끄는 동안 위험한 정보를 멀리했고, 위험해 보이는 일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클레멘스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의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클레멘스가 할 수 있었던 건 기껏해야 '살아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멍'을 몇 개 만드는 것 뿐이었고, 그중 하나가 레이와의 접촉이었다.

허나 클레멘스가 불안에 떨었던 것에 비해 상황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흘러갔다.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타라니스 가문과 마티아스 후작가는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무리 했다.

마지막 합의 당시 분위기는 훈훈했으며 서로를 향한 악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잘못 생각 한 건가?'

클레멘스는 본인의 가문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제국과 갈등을 겪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허나 모든 일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자기 추측에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제국은 실제로 타라니스 가문을 의심했지만, 조사 끝에 별다른 혐의가 없다고 판단내렸을 지도 몰랐다.

레이가 정말로 제국이 보낸 첩자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클레멘스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다행이야.'

클레멘스는 이번처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에 떠는 건 질색이었다.

넓고 위험한 바다가 아닌, 자기가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웅덩이 안에서 지내고 싶었다.

이번 항행을 무사히 마친다면 어떻게든 가문과 다시 거리를 벌리리라.

클레멘스는 그리 다짐하며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상인으로서 인맥을 관리하는 건 가장 우선되어야할 일이기에, 왕국으로 출항하기 전 인연이 있는 자들에게 연락해 돌아가 식사 자리를 가졌다.

오늘 점심 시간에는 플로리아와 독대를 할 예정이었다.

플로리아는 오시리스 백작이 아끼는 막내딸이니 만큼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시간과 재화를 투자한다 해도 아깝지 않은 상대였다.

영주성에 들러 시종에 안내를 받은 클레멘스가 옷차림을 정돈하고 방에 들어섰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

인사를 하려던 클레멘스가 말을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 플로리아의 곁에 있었다.

레이였다.

가만히 서 있는 클레멘스를 향해 레이가 웃어 주었다.

"뭐하십니까, 앉지 않으시고."

"..."

클레멘스는 일단 자리를 찾아 앉았다.

레이는 문 너머의 시종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배우자나 자식이 있나?"

너무나 뜬금 없고 직설적이며 무례한 질문이었다.

클레멘스가 플로리아를 돌아봤으나 플로리아는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클레멘스가 일단 답했다.

"...둘 다 없습니다."

더 젊었던 시절 가정을 차릴 기회는 있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반신이 굳어가는 고통을 자식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과자를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과자를 다 씹고 이어진 레이의 질문은 마찬가지로 굉장히 무례했다.

"왕국으로 돌아갈 배에 혹시 오래된 인연들이 같이 타고 있나?"

"..."

클레멘스는 상단을 이끌기 위해 많은 인재들을 고용했지만, 이번 항행 때 상당수가 임시 교체됐다.

빈 자리 대부분이 타라니스 가문을 비롯해 왕국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채워졌다.

허나 클레멘스와 길게 인연을 이어갔던 자가 배에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클레멘스의 표정을 살핀 레이가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그들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기적이라면 좋겠군."

"이보시오! 이게 대체 무슨 무례...!!"

촥!!

클레멘스의 항의가 이어지려던 순간 허공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은백색 검으로 가슴이 겨누어진 클레멘스가 덜컥 입을 멈추었다.

클레멘스의 당혹이 가라앉기도 전에 강렬한 빛 무리가 터져 나오며 서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방 공기의 온도가 급격히 하락하며 입에서 김이 흘러나온다.

클레멘스는 오직 기절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갑작스레 심장을 향해 검강이 겨누어지니 눈앞이 자꾸만 까마득해 졌다.

플로리아조차도 레이의 기세에 노출된 탓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크르...]

클레멘스의 정령이 겁 없이 레이를 향해 이빨을 들어댄다.

클레멘스가 다급히 정령을 뒤로 미뤄내고는 끅끅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아공간에 수납 가능한 최상위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는 그래듀에이트다.

어설픈 기싸움이 성립할 상대가 아니었다.

"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제국은 너희들은 처분할 거다. 너는 공을 세운 게 있으니,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주도록 하겠다."

"기회... 말입니까? 제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제국은 되도록 조용히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네가 제국을 돕는다면, 자비를 베풀어주도록 하겠다."

"..."

클레멘스가 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탁자를 적시다가 얼어붙었다.

결국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다가왔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클레멘스는 살고 싶었고, 여긴 제국의 손바닥 안이었으니, 결국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

템플러, 알베르트.

알베르트는 검을 다루는 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지만, 기도를 올려 무기를 축성하고 활용하는 능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템플러들 사이에서도 신실하고 독실하다 평가받는 알베르트는 간이 기도실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멍한 눈동자로 고민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

죄악을 태우는 신성한 사슬이 스스로 불타올랐다.

그 현상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악을 범한다.

교단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신을 섬기는 이라고 해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헌데 신성한 사슬이 스스로 불타올랐다.

죄악을 범한 이는 누구인가.

내가 죄악을 저질렀는가.

그를 가두고, 그를 심판하려 한 행위가 하늘 아래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었단 말인가.

"엘-람의 의지를... 대행하는가."

홀로 중얼거린 알베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이 기도실이라 해도 기도실이다. 기도실에 방문할 때는 정해진 복장을 입고 몸을 단정히 해야 한다.

허나 알베르트는 상대를 타박하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상대를 마주봤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

"어디서 오셨는지는 말해줄 수 있으시오?"

"알아서 뭐 하게?"

레이는 썩 당당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양해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고 이름이 드러나 봤자 거동만 불편해지거든."

알베르트는 레이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번 유물의 거래 건만 해도, 정치적인 사유 때문에 다양한 곳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때문에 본래 거쳐야 할 신성한 절차가 몇 개 생략된 채 거래가 진행됐다.

상대가 정녕 신성을 타고난 존재라면, 밖으로 드러나 봤자 탐욕에 휩쓸릴 것이 뻔했다.

한편 레이는 알베르트의 반응을 보고 자기 추측에 확신을 얻었다.

결계를 뚫어낼 때 무언가 이상 반응이 있었고 템플러들이 그걸 눈치챈 게 틀림 없어 보였다.

레이는 목을 좀 더 거만하게 세웠다.

허세를 부릴 거면 제대로 부려야 했다.

"의도치 않았다고 하나, 내 일을 방해했으니 도움을 좀 주어야 겠어."

"...말씀하시오."

"네가 축성시킨 창, 최대 사거리가 얼마나 되지?"

탄도 미사일마냥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진 못할 것이다.

레이의 질문에 알베르트는 고민해야 했다.

신의 축복을 응용한 신성한 기술들을, 감히 일일이 실험해보며 수치화시켜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대략적인 사거리는 파악 가능했다.

"10 km까지는 닿을 것이오. 그 이상은 장담할 수 없소."

"충분하군."

5 km만 넘어가도 지평선을 벗어난다.

10 km 밖이라면 아예 감지도 안 되는 거리에서 기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창에다 사람도 태울 수 있나?"

"...?"

"사람을 태운다면 최대 사거리는?"

"자, 잠깐만."

얼을 탄 끝에 레이의 말을 이해한 알베르트가 말을 더듬거렸다.

"차, 창을 한 번 쏘아내면 감속이 불가능하오."

"아,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고. 되는지 안 되는지만 대답해봐."

강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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