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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26화 (126/446)

126화

외부에 공개된 서적에는 템플러에 관해 단편적인 정보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때문에 레이는 템플러가 잡기를 조금 쓸 줄 아는 튼튼한 기사쯤 되리라 착각했다.

허나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신성력에 기반한 기술이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도를 좀 올려서 축성시킨 창으로 4 km 밖 저격을 행하니 정말이지 기가 찼다.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기술은 마법보다 비논리적이었고, 그렇기에 우민들이 흔히 칭하는 '기적'에 가까웠다.

촤자자자작!!!

창을 기점 삼아 솟구친 빛의 사슬이 제대로 대응할 새도 없이 레이를 포박했다.

잠깐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찾아오더니, 이내 레이의 신체가 웬 검은 구덩이 속을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사방에 칠흑이 내려앉았고 오로지 빛의 사슬만이 홀로 빛났다.

무저갱을 베껴 놓은 듯한 공간 속에서 레이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레이를 속박한 사슬은 그 밝기가 어두웠으나, 레이를 중심으로 멀어질수록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사슬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우드득!

레이가 자기 몸을 묶은 첫 번째 사슬을 힘으로 뜯어냈다.

곧장 손을 뻗어 코앞에 있는 사슬을 움켜쥐자, 살이 타는 연기와 함께 손아귀 위로 열상이 번졌다.

신성한 사슬이 레이의 몸을 뒤덮은 죄악에 반응한다.

남들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을 어린 시절부터 쌓아왔던 증오와 살생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나며 검게 타오른다.

레이는 많은 사람을 처분했다.

필립스 백작령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악한 천성을 타고나 교화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 무리를 레이는 반드시 제거했다.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래에 끼칠 수도 있는 해악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피를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임무라 여겼다.

지미와 필립스 백작조차도 레이가 얼마나 많는 피를 보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죽은 자의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죄악이 점점 더 실체를 드러낸다.

타오르는 손아귀를 느끼며 레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건, 내가 뒤집어쓴 죄악이 아니다.

이건 너희가 덮어씌운 죄악이다. 너희가 덮어씌우고, 너희가 강제한 죄악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은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

뿌드드득!!

사슬이 끊어져 나간다.

레이의 눈동자를 고요히 맺혀 있던 분노가 이내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전신을 타고 흐른다.

레이가 한 발자국을 나아갈 때마다 더욱 밝게 빛나는 사슬들이 앞을 막았다.

이 신성 결계는 미리 짜여진 메커니즘에 따라 레이의 죄악을 태우기 위해 요동쳤다.

레이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레이의 손아귀에 닿은 사슬이 열기를 내뿜으며 반발하다, 이내 스스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레이는 시야를 가리는 사슬들을 연거푸 찢어발겼다.

신성력을 머금은 사슬들은 레이의 손아귀에 닿는 순간 길게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더욱 밝은 빛이 쏟아지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나가자 흐릿한 바깥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을, 사슬로 이루어진 사자를 닮은 짐승이 가로막고 있었다.

오랜 시간 기도를 올려 창을 축성시킨 의지가 구현된 신성한 짐승이,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쫘아아아아악!!

레이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저 양손을 뻗어 짐승의 아가리를 붙잡고 양쪽으로 찢어버렸다.

양단된 짐승이 쇳소리와 함께 땅을 긁었다.

마침내 결계의 경계를 지키는 사슬에 닿은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사슬을 내려쳤다.

파가가각!!

신성 결계가 깨져나간다.

머리 위에 쏟아지는 햇빛을 느끼며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템플러 셋이 얼이 빠진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는 반사적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 시발."

이를 갈아낸 레이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네놈들이 그리 떠받드는 머저리가 보낸 동앗줄이 나야, 병신들아."

*

템플러 셋은 빠르게 신성 결계가 펼쳐진 곳에 도착했다.

초인들에게 있어 5 km 안팎은 말을 타든 안 타든 금세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가장 먼저 결계에 도착한 알베르트가 지면을 훑었다.

레이가 탔던 말은 혼자 걸어다니고 있었고 스태프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대처할 새도 없이 결계로 끌려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알베르트는 어렵지 않게 레이가 강탈했던 유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알베르트는 곧장 유물을 축성된 창에 단단히 묶었다.

오시리스 백작령 쪽에서도 곧 지원이 오겠지만, 유물을 강탈한 세력이 당장 이곳을 기습할 수도 있었다.

저 결계 안에 갇힌 자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유물을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촤악!!

알베르트가 유물이 묶인 창을 쏘아내자 하늘로 치솟은 창이 영주성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런 때를 대비해 양해를 받고 오시리스 백작가 시종에게 성흔을 새겨놓았었는데, 철저한 준비가 전부 큰 도움이 됐다.

이제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결계에 묶여 있는 자들은 시간 조금 준다고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 생각했지만.

쩌적!

"...?!"

신성 결계가 점점 허물어진다.

템플러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결계를 살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점점 더 사람의 인영이 뚜렷해진다.

결계의 경계 가까이 접근한 레이를 향해 사슬로 만들어진 사자가 덤벼든다.

직후, 사자가 찢겨나갔다.

"...?"

템플러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대단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저런 행위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신성한 결계 안에 발을 디딘 신성한 짐승은 찰나이지만 마나를 기반으로 한 모든 기술에 있어 압도적인 내성을 지닌다.

헌데 그 짐승이 단번에 찢겨나가?

템플러들이 경악하는 사이 더욱 뚜렷해진 사람의 인영이 결계의 경계를 지키는 최후의 사슬을 움켜쥐었다.

치지직

타들어 간다. '사슬'이 타들어 간다.

죄악을 태워야할 신성한 사슬이... 인간의 손아귀에서 타들어 간다.

툭!

방패 떨어지는 소리가 알베르트의 뒤에서 들렸다.

알베르트는 토마스가 방패를 떨어뜨렸음을 인지했지만 그를 타박할 정신이 없었다.

타들어간 사슬이 마침내 끊어진다.

깨져나가는 결계를 보고 알베르트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결계를 부순 레이가 템플러들을 마주봤다.

다행히 로브가 머리를 덮고 있어 얼굴을 내보이진 않았다.

레이가 욕설과 짜증을 반복했지만 템플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네놈들이 그리 떠받드는 머저리가 보낸 동앗줄이 나야.

그런 레이의 주장이 아예 허황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만약 레이가 거짓을 입에 담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신성 결계를 저런 식으로 깨고 나올 수 있는 존재라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로드 급에 근접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로드 급이라면 지금 전력으로 생채기도 입힐 수 없었다.

지원이 도착한다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한편 레이는 레이대로 의아한 심정이었다.

'왜 안 덤벼들지?'

레이는 결계를 나오자 마자 템플러가 덤벼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서 시간이 끌릴 수는 없었기에 레이는 템플러들이 덤벼드는 순간 '윈드 커터'를 시전할 계획이었다.

헌데 템플러들이 얼이 빠진 채 검도 뽑지 않고 있었다.

잠깐 고민한 레이는 일단 참아왔던 짜증부터 쏟아냈다.

"니들이 무능한 탓에 내가 여기까지 끌려와 뺑이를 치고 있는데 도와주진 못할 망정 훼방을 놔?"

"..."

"제발 눈치 좀 챙겨...! 엘-람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나대지 좀 말라고 말씀 안 하시든? 응?!"

"..."

템플러들이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사이 저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오시리스 백작가 영주성 쪽에서 지원이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머리를 싸맨 레이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유물 어디갔어, 유물."

"..."

"유물 어디있냐고!!"

"...그, 이미 영주성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알베르트가 떠듬떠듬 답했다.

어떻게 유물을 돌려보냈을지 감이 잡힌 레이가 얼굴을 구긴 채 소리쳤다.

"어떻게 성직자란 새끼들이 도움이 안 되냐?! 도움이!!"

"..."

홀로 씩씩거리는 레이를 템플러들이 우물쭈물 하며 지켜봤다.

레이가 몇 번 더 욕설을 토하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리고 눈앞의 템플러들을 어찌할지 정해야 했다.

"그만 꺼져. 다른 놈들한테는 날 아예 놓쳤다고 진술하고."

만약 이 제안을 거부하면 레이는 어쩔 수 없이 템플러들을 제거해야 했다.

허나 템플러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며 레이도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얘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혹시... 결계 때문인가?'

본래 그렇게 쉽게 뚫릴 결계가 아니었을까.

내 몸에 엘-람의 가호라도 흐르고 있어, 결계가 그리 쉽게 박살난 건가.

템플러들이 그걸 알아채고 저리 반응하는 걸까.

레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다양한 가설을 일단 지웠다.

이대로 템플러를 보내는 것도 위험했지만, 템플러를 죽이는 것도 굉장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레이는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는 허세를 입에 담으며 등을 돌렸다.

"오늘 일은 함구하도록 해."

기척을 죽이는 마법 결계를 펼친 레이가 지원 병력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래놓고 템플러들이 배신을 해 추격당한다면 어쩔 수 없이 죄다 죽여야 했다.

허나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빙 돌아서 오시리스 백작가 영주성으로 돌아온 레이는 한숨을 뻑뻑 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잃은 것만 있고 얻은 것은 없는 작전이었다.

골치가 아팠다.

*

"다행히 이번 사건은 조용히 넘어갈 것 같아요."

플로리아가 레이를 앉혀두고 입을 열었다.

"습격을 당했지만 말 몇 마리 죽은 걸 제외하면 피해도 크지 않고, 템플러...님들이 유물도 되찾아오셨으니까요."

플로리아가 레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습격으로부터 이틀이 지났고, 오시리스 백작령은 안정을 되찾았다.

오시리스 백작가는 치안 강화를 위해 항구까지의 길목에 초소 시설과 기사급 전력을 증강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의 입에선 습격자의 유물 탈취를 현명한 판단으로 저지한 템플러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단지 그 뿐이었다.

사람도 안 죽었고 실질적 피해도 경미했기에 이번 사건이 대단히 화제 되지는 않았다.

한편 유물은 타라니스 가문에 전달됐고, 마티아스 후작가와 타라니스 가문의 합의는 잘 마무리 되었다.

며칠 안에 타라니스 가문 사람들이 배에 유물을 싣고 왕국으로 떠날 것이다.

레이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요즘 너무 조심성 있게 굴었던 거 같아요."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하..."

플로리아가 괜히 불안해져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한숨을 거듭 쉬며 말을 이었다.

"옛날엔 안 이랬거든요. 어린애 흉내 내며 고위 마법사한테 칼빵도 놓아보고, 적진에 잠입도 해보고, 플로리아 님도 거꾸로 매달아 보고..."

"...!"

플로리아가 괜히 자기 치마 사이를 두 손으로 쿡 눌렀다.

"저, 저기 레이...?"

"인연이 많아지고, 마음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자꾸 몸을 사리게 되네요. 옛날엔 각이 보이면 고개부터 들이댔는데 말이죠."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몸 사려서 제대로 풀린 일이 없었다.

눈빛이 변한 레이가 방을 감싼 결계를 풀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플로리아가 황급히 레이의 바지춤을 잡고 늘어졌다.

플로리아는 레이를 붙잡은 채 질질 끌려가며 외쳤다.

"또, 또 뭔 짓을 하려고 그래요!"

"아이, 걱정마세요. 플로리아 님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요."

"못 믿어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설명이라도 똑바로 해주고 가요!"

플로리아가 자기 가문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레이의 바지춤을 잡은 손아귀를 더욱 강하게 말아쥐었다.

레이는 바지가 뜯어져 나갈 것 같자 일단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레이의 바지를 붙잡은 채, 레이의 사타구니 쪽에 얼굴을 가까이한 플로리아를 보고 알레시아가 빽 소리쳤다.

"나의 기사여!! 정말 자꾸 이럴 것이냐?! 그리고 귀족은 안 된다고 했지 않느냐!"

"오해입니다."

레이가 단칼에 알레시아의 말을 끊었다.

강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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