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투웅!!
필립스 백작령 영주성의 수련실에서 모하메드와 지미가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미가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이른 건 대외비였기에 필립스 백작 홀로 두 사람의 대련을 참관했다.
대련에서는 시종일관 모하메드가 우세를 점했다.
검술의 완성도에 지미가 모하메드를 쫓아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거기다 지미는 아직 검강을 다루는 데 있어 미숙한 부분이 존재했다.
모하메드는 제자리서 버티는 지미를 향해 손대중을 그만두고 검을 휘둘렀다.
지미는 모하메드가 원하는 방향으로 쭉쭉 밀려났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틈을 내주진 않았다.
결국 검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모하메드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다르긴 다르군..."
무아의 검강에 필립스 백작가의 검술이 더해지자 그 시너지가 어마어마했다.
애초에 필립스 백작가 검술 자체가 무아의 검강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량된 검법이었다.
흡사 뚫리지 않는 방패를 마주한 듯 했던 대련을 되새겨본 모하메드가 지미의 어깨를 쳐주었다.
상황이 굉장히 골치 아프긴 했지만, 어쨌든 백작가가 잃어버렸던 영광이 재현되었다는 점에 있어 이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혹시 남에게 전수할 수 있겠는가?"
"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 없는 산에 들어가 하루종일 도라도 닦으며 해탈의 경지를 바라야 했는데, 그게 사람 마음처럼 됐으면 무아의 검강이 실전되었을 리도 없다.
이야기를 듣던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전이 실재함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되었네."
백작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필립스 백작가에 신뢰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가 셋이나 존재하게 됐으니 마음이 흡족했다.
레이를 제외해도 이런 소규모 영지에 어처구니없는 전력이긴 했다.
"갑옷을 맞춰주어야겠군."
예산이 빠듯하긴 하나 그래듀에이트에게 기본적인 대접은 해주어야 했다.
필립스 백작은 양쪽에 그래듀에이트를 대동하고 수련장을 나오며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다잡았다.
어지간히 권세 있는 가문의 수장이 아니고서야 양옆에 그래듀에이트를 끼고 걷는 호사를 누리기는 힘들었다.
현실에 산적해 있는 여러 문제를 잠깐 기억 뒤로 미룬 백작은 괜히 목에 힘을 준 채 집무실로 향했다.
백작이 집무실에 도착하자 때마침 브릿지를 통해 전해진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편지를 읽어본 백작이 금세 현실로 돌아와 눈살을 찌푸렸다.
편지는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보낸 사용인에게서 전달된 것이었다.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은 가볍게 웃고 넘길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예산이 좀 더 필요하겠군."
백작이 중얼거렸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가 술을 먹고 말실수를 해서 다른 가문의 기사들을 모욕했다.
약소한 선물이라도 준비해 사과의 뜻을 각 가문에 전달해야 했다.
얼마의 예산이 필요할까 어림잡아 보던 백작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편지에는 백작가의 기사가 연거푸 다른 가문의 기사들을 격파했음 또한 분명히 적혀있었다.
자존심 한 번 세우기 위해 들어갈 돈이 절대 적지는 않았으니, 흡족한 감정이 쉽사리 떠나지는 않았다.
"나는 포기해야겠어."
이런 정신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건 남은 평생을 수련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백작이 홀로 웃고 있자 모하메드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레이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레이가 문제 일으키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같이 보낸 경들께서 사고를 쳤네."
백작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편지를 모하메드에게 건넸다.
편지를 읽어본 모하메드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경들께서 자꾸 레이에게 물들어 가는 거 같군."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정신 교육 다시 하라는 소리였다.
모하메드가 뻐근해져 오는 뒷목 탓에 인상을 찌푸렸다.
백작은 편지를 돌려받으며 다시 한 번 낮게 웃었다.
이 정도야 뭐 자존심 한 번 세웠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어디 중앙에 진출한 가문이 이런 일을 벌였다간 뒷감당하기 힘들었겠지만, 필립스 백작가는 변방에 홀로 자리 잡고 있어 남의 눈총이나 호의를 샀다고 호들갑 떨 필요가 없었다.
허나 백작과 모하메드가 받은 것은 하루 전날 벌어졌던 일이 적힌 편지였다.
백작과 모하메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오시리스 백작령엔 난리가 났다.
*
마티아스 후작가의 마차를 습격했던 범인이 도주했다.
다행히 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부상자가 몇 명 나왔고 마차를 끌던 말이 모두 죽어버렸다.
부상자 중 한 명이었던 토마스는 머리가 띵했다.
이게 머리를 얻어맞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법사에게 근접전에서 털린 게 충격이었던 건지 토마스 본인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게... 마법이 맞나?"
마법사가 발현했던 마법을 보이는 대로 설명하자면, 그건 단지 초고속 휘두르기였다.
토마스는 헷갈렸다.
기습에 동원된 마법의 화력을 감안하면 습격자가 서클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했다.
초고가의 아티펙트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바람 마법을 활용한 초고속 휘두르기였나?'
확률만 따지자면 상대가 마법사였을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토마스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아무리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신실하게 신을 모시는 템플러라 해도 마법사에게 근접전에서 털렸다는 게 그리 창피할 수가 없었다.
"일어서라."
알베르트가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베르트 또한 토마스에게 실망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토마스를 질책할 때가 아니었다.
마차의 짐을 확인한 결과 습격자는 참 정직하게 유물만을 훔쳐 도주했다.
"유물을 노린 범행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 일을 계획한 부정한 자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잡았으니, 이제라도 정신 차려라."
알베르트가 마차로 눈을 돌렸다.
마차 짐칸에 유물을 고정하는 데 쓰인 천이 찢어져서 나부끼고 있었다.
고급 직물로 짜여 있던 하얀 천에는 투명한색으로 쓰인 기도문이 조금씩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때마침 항구에서 출발했던 말을 탄 경비원들이 도착했다. 그들 중엔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도 있었다.
"다들 괜찮으시오?"
"..."
알베르트는 침묵한 채 말을 뺏어타다시피 했다.
다들 당황했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적극적으로 따지고 들지 못했다.
"바로 출발한다."
이대로 기다려봤자 현장 수습하고 편제 나누고 다시 흉수를 쫓는 데 한세월이었다.
알베르트가 흉수가 도망갔던 방향으로 말을 몰자 남아있던 템플러 둘 또한 말을 타고 그를 따랐다.
"창을 쓰겠다."
"그건...!"
알베르트가 말하는 창은 템플러 개인이 오랜 기도를 통해 축성시킨 창을 뜻했다.
한 번 사용하면 재충전하는데 다시 1년이 넘어가는 기도를 올려야 했다.
알베르트의 결연한 의지를 느낀 토마스가 이를 악물었다.
*
레이는 말을 타고 달리며 긴장을 내려놨다.
생각보다 일이 더 잘 풀렸다. 기습 과정에서 사망자도 만들지 않았고 유물도 성공적으로 빼돌렸다.
직접 타고 갈 말 한 필을 제외하곤 말도 죽였으니 추격도 성공적으로 늦췄다.
이제 얼른 목표 지점에 도달해서 말을 처분한 후 빙 돌아 복귀하면 됐다.
"이게 그 유물이란 말이지...?"
레이가 깨진 구슬 조각처럼 생긴 물건을 들어 올렸다.
아프텔의 도움 덕분에 그 수많은 짐 중 유물이 무엇인지 빠르게 특정할 수 있었다.
"이 물건의 정체를 알아?"
[데이터에 없습니다. 다만 유물을 이루는 부품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러니까 이런 거 다섯 개 모아서 합치면 전설의 유물이 하나 완성된다?"
[비슷합니다.]
"하하... 이거 그냥 완전히 파괴하면 안 되냐?"
[추천하지 않습니다.]
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면, 유물 안에 깃들어있던 '힘'이 '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당장은 위험한 물건이 하나 줄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재앙의 탄생을 초래할 수 있음으로 악마의 힘이 깃든 물건은 파괴가 아닌 봉인을 원칙으로 한다.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인상을 썼다.
"아이씨, 그럼 그냥 파괴해야겠네."
[파괴하면 추후 또다른 형태의 재앙이...]
"또다른 형태의 재앙이 찾아오는 건 나 뒈지고 난 다음일 텐데 내가 그거까지 왜 신경 써?"
돌이켜보니 이미 1황자가 사용했던 유물 또한 완전히 녹여버렸다.
한 200년 뒤엔 더 위험한 재앙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이미 벨라가 자기 인생 다 살고 죽은 뒤일 터다.
잠시 침묵한 아프텔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마스터께선 발상이 참 소인배스러우십니다.]
"네가 내 입장이 돼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텐데."
거기다 현실적인 문제 또한 있었다.
괜히 유물을 보관했다가 들키면 범인으로 지목받을 터다. 그럴 바에야 처분하는 게 나았다.
레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으려다,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땀을 닦았는데 이마에 물기가 흥건했다.
손가락으로 찍어보니 물이 아니라 피였다.
"?"
레이가 장갑을 벗었다.
피는 손등에서 흐르고 있었다.
손등엔 삼각형의 상처가 나 있었고 그로부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헌데 통증이 없었다.
[성흔이군요.]
"뭐?"
[성직자가 내리는 축복의 한 종류입니다. 유물의 봉인지에 함정을 새겨놓은 모양입니다. 마법이 아니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함정이라면서 축복을 왜 걸어놔?"
[성직자의 기술은 대부분 축복의 형태를 띠지만, 전혀 다른 용도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프텔이 레이의 성흔을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예컨대 이런 성흔엔 '저 어린양을 보살피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담겨 있을 겁니다.]
"?"
[그리하면 성흔을 받은 자를 엘-람의 시선 아래 둘 수 있습니다.]
"그럼 추적 마법이야?"
[축복을 기도한 템플러라 해도 엘-람의 시선을 훔쳐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프텔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엘-람께서 주시하시는 어린양이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둔 무기를 저 멀리서 지원할 수는 있습니다.]
"대체 뭔 개소...?"
화를 내려던 레이가 급히 말을 세운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하늘 위에서, 은색 창 세 자루가 번쩍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창이 비행한 거리는 최소 4 km.
"...아니 무슨 미사일이냐?"
콰앙!!!!
기적이 레이를 향해 내리꽂혔다.
레이는 검을 뽑았지만, 창이 레이를 꿰뚫는 일은 없었다.
레이는 자신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이루며 떨어진 창을 보고 그제야 확실히 '기적'의 메커니즘을 이해했다.
오랜 시간 축성시킨 창에는 '축복을 받은 자를 지원해달라'는 기도가 새겨져 있다.
때문에 도망가는 '표적'에게 축복을 내린 후 축성시킨 창을 쏘아내면, 창은 표적을 지원하기 위해 스스로 표적을 찾아간다.
물론 축성시킨 창에다가 폭탄이라도 잔뜩 묶어둔다면 아주 훌륭한 유도 미사일이 될 터였다.
템플러가 쏘아낸 창에 폭탄 같은 야만적인 무기는 없었지만, 창 위에 빼곡한 기도문은 적혀 있었다.
촤자자자작!!!
신성 결계를 이루는 빛의 사슬이 창으로부터 솟구쳐 사방에 떨어져 내렸다.
한순간에 갇힌 신세가 된 레이가 짜증이 깊게 서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눈치 없는 새끼들이..."
*
저 멀리서 찬란한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알베르트가 웃음을 머금었다.
"성공했구나."
알베르트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다른 이들은 후작가가 거래할 유물의 가치를 경시했고, 유물을 타국에 반출하기 위한 절차 또한 정치적 사유 때문에 대부분 생략됐다.
이런 상황에서 알베르트는 홀로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그리고 오늘 유물을 노린 습격이 이루어졌고, 만반의 대비를 한 알베르트는 습격범을 성공적으로 결계에 가뒀다.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알베르트가 창에 새긴 신성 결계의 종류는 '참회의 결계'였다.
독실한 성직자조차 삶을 살아가며 죄를 쌓는다. 참회의 결계는 영혼에 쌓인 미약한 죄악까지 감지해서 반발한다.
만약 이 세상에 본래 존재치 않았던 악신 따위와 접했던 영혼이라면 참회의 결계가 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힘으로 참회의 결계를 뚫고 나온다 해도 그 시점에서 육체에 엄청난 화상을 입게 될 터다.
저 참회의 결계를 피해 없이 부술 수 있으려면, 지고의 경지에 오르든가, 아니면 정말 엘-람의 사도라도 되어야 할 것이다.
유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