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이 벌어졌다.
자존심이 걸린 정면 승부였기에 서로가 저돌적으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호흡을 고르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구경을 나온 이들 중 검을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기사들의 기세에 질려 안색이 나빠졌다.
급소를 노리는 것조차 마다치 않는 검격이 몇 번이나 충돌한 끝에.
결국 먼저 떨어져 나간 쪽은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였다.
얼굴에 새겨진 자상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낸 젠킨슨이 다시 검을 연무장 너머를 겨누었다.
해리스 마티아스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또 다른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연무장에 올라섰다
해리스 마티아스가 말려 보려 했지만 기사는 입을 다문 채 검을 뽑았다.
재차 섬광이 연무장을 휩쓴다.
지금 연무장에 올라온 후작가의 기사는 역시나 노련한 엑스퍼트급 무인이었지만 젠킨슨은 결국 상대를 찍어눌렀다.
서로가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른 끝에 젠킨슨은 두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후작가의 기사가 들것에 실려 연무장을 벗어났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승부가 어떻게 되든 간에 젠킨슨에게 전력으로 달려들고 싶었지만, 이미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파견된 기사 여섯 중 절반이 병상에 누웠다.
자존심 싸움 때문에 여기서 더 전력손실을 낼 수는 없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들이 분한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침묵하고 있자 젠킨슨이 연무장을 둘러싼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끝인가? 검을 더 나눌 자는 없나? 다들 겁쟁이들뿐인가?"
젠킨슨의 광역 도발에 다른 가문에 속한 기사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마침 요하나의 존재 또한 기사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비록 젠킨슨이 지쳤다고 해도, 그를 정면에서 검술로 꺾는다면 요하나의 마음 또한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젠킨슨은 상대의 이름도 들어보지 않고 검기를 발현했다.
콰앙!!
섬광이 빗발친다.
분명 경지는 크게 차이 나지 않을 텐데 젠킨슨은 또다시 상대를 압도했다.
서로를 향해 휘갈기는 검기가 무수한 생채기를 갑옷과 피부에 남겼으나, 결국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젠킨슨이었다.
"커억...!!"
"다음!!"
연거푸 기사 셋을 무너뜨린 젠킨슨이 외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젠킨슨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관중들의 반응 또한 점점 더 격해졌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환호했다.
젠킨슨을 향한 비난과 응원이 교차하는 가운데 또 다른 기사가 젠킨슨 앞에 섰다.
이미 젠킨슨을 기사 셋을 연거푸 상대했다.
지쳐버린 젠킨슨을 이겨봤자 거기엔 명예 따위는 없었다.
젠킨슨의 앞에 선 기사는 단지 젠킨슨과 검을 부딪쳐보고 싶었고, 또한 젠킨슨의 아집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젠킨슨은 네 번째 기사를 꺾었다.
젠킨슨은 다섯 번째 기사를 꺾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사까지 꺾었다.
젠킨슨을 향한 환호 소리가 날뛰었다.
변방의 영락한 백작가에서 방문한 저 기사가 분출하는 분노와 투지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헤집었다.
젠킨슨은 이제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는 검기를 발현한 채 중얼거렸다.
"...더 없나?"
일곱 번째 기사가 나섰다.
실력을 자랑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었고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리도 아니었다.
일곱 번째 기사가 연무장에 올라선 건, 반절은 오기 때문이었고, 반절은 존중 때문이었다.
시푸르게 타오르는 검기와 꺼져가는 검기가 맞부딪친다.
일곱 번째 기사가 발현한 검기가 젠킨슨의 검기를 갈라내고 금속으로 된 검신에 맞닿는다.
헐떡대는 젠킨슨은 개의치 않고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빠가각!
채 다섯 번을 못 채우고 젠킨슨의 검신이 부러져나갔다.
일곱 번째 기사는 덤덤히 승리를 확신했다. 허나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고 또한 방심이었다.
젠킨슨은 기본기에 굉장히 충실한 기사였으나 또한 어처구니없는 천재들의 몸놀림을 너무 자주 접했다.
곧장 상대의 품을 파고든 젠킨슨이 팔을 꺾어내려는 시늉을 했다.
일곱 번째 기사가 다급히 대응하려 했으나 젠킨슨은 삽시간에 무게중심을 낮춘 채 몸을 회전시켰다.
찰나간 상대의 뒤를 점한 젠킨슨이 다리를 휘둘러 정강이를 후려쳤다.
휘청이는 일곱 번째 기사의 목을 잡아 쥔 젠킨슨은 그대로 같이 지면에 쓰러졌다.
일곱 번째 기사의 검이 젠킨슨의 허리춤을 겨누었고 젠킨슨의 단검이 일곱 번째 기사의 목젖을 겨누었다.
따지자면 시푸른 검기가 서린 쪽의 검이 더 위협적이긴 했지만.
일곱 번째 기사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더니 패배를 시인했다.
"내가 졌소."
여기서 내가 이겼다고 바득바득 우겨봤자 남는 게 없었다.
더럽고 치사한 새끼라고 욕먹을 게 아니라면, 겸양을 떨어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일곱 번째 승리를 거머쥔 젠킨슨이 반쯤 풀린 동공으로 연무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젠킨슨이 부러진 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젠킨슨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쓰러지려는 젠킨슨을 레이가 받아냈다.
레이는 젠킨슨의 무게를 느끼며 낮게 웃었다.
의식을 잃은 젠킨슨의 입가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업혀서 내려가는 젠킨슨을 대신해 디디에가 연무장에 섰다.
본래 디디에는 이쯤에서 형식적인 사과를 건네고 자리를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허나 젠킨슨이 워낙 신나서 날뛰어댄 탓에, 디디에 또한 가슴을 헤집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검을 뽑았다.
스르릉!
"혹시 더 검을 나눌 자가 있다면, 내가 상대해 드리겠소."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앞에 두고 누군가 실소를 터뜨렸다.
젠킨슨을 실려나가게 하는데 일곱의 기사가 필요했다.
과연 저자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기사가 몇 명이나 필요할까.
많은 이들이, 젠킨슨이 필립스 백작가 기사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강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허나 형형이 빛나는 디디에의 눈동자에는 호기로움이 가득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필립스 백작가의 저력을 확실히 파악해야 했다.
기사들이 하나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날.
젠킨슨은 일곱의 기사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의식을 잃었고.
디디에는 다섯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스스로 물러났다.
도합 열둘의 기사가 패배를 경험했고 그중 열하나의 기사가 한 달 이상의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다.
단 하루만에 오시리스 백작가 영주성에서 기숙하던 기사 전력의 삼분지 일이 무력화 된 것이다.
모두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였고, 레이에게는 굉장히 달가운 일이었다.
*
레이와 기사들의 계획대로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 전력은 반절로 줄었다.
이제 마티아스 후작가가 유물을 반출해 항구로 향하는 시점만 잘 노리면 됐다.
"내가 대체 왜 이런 일을 도와야 하는데...!!"
플로리아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레이와 기사들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다.
몇 번 더 혼잣말로 성질을 부린 플로리아가 호흡을 안정시켰다.
짜증이 조금 많아지긴 했지만 플로리아는 성실하게 레이를 돕고 있었다.
"후작가는 내일 점심시간에 유물을 반출할 거예요. 항구로 가서 모종의 정치적 합의도 끝내고 유물도 건네주겠죠."
지도를 펼친 플로리아가 영주성과 항구 사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유물을 강탈할 거면 이 근방에서 해야 해요. 그래야 영주성이나 항구에 있는 추가 병력이 최대한 늦게 도착할 거예요."
"얼마나 걸리죠?"
"길어도 기사급 전력이 15분 안에 도착할 거예요."
레이의 질문에 답해준 플로리아가 막대기로 도주 경로를 쭉 그어보았다.
"최대한 빠르게 이쪽 해안에 도달한 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주해야 해요."
플로리아가 가리킨 해안에는 아무 시설도 없었다.
다만 작은 배를 댈 수 있는 구역이라서, 해당 해안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면 배를 타고 도주했다고 착각시킬 수 있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예요. 괜찮겠어요?"
"예, 많이 감사했어요, 플로리아 님."
"후우, 조심해주세요. 들키면 저도 곤란해진다고요."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가 장담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고, 마티아스 후작가 일행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항구로 향하는 후작가의 마차는 총 세 대였다.
플로리아가 넘겨준 정보에 의하면 해리스 마티아스는 중앙의 마차에 탑승해 있었으며, 유물은 맨 뒤의 마차에 실려 있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 여섯 중 셋은 앓아누워 있었고 한 명은 오시리스 가 영주성에 남았다.
때문에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라고 해봐야 단 두 명이었다.
레이는 로브로 몸을 꽁꽁 싸매고 스태프를 들고 홀로 움직였다.
영주성과 항구 사이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금세 마차가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하자 레이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허나 레이의 심장을 두르고 있는 서클은 역사에 새겨진 대마법사가 직접 남긴 안배였다. 서클의 성능 자체는 굉장히 뛰어났다는 뜻이다.
때문에 아프텔의 보조가 있다면 레이는 마법으로도 상당한 화력을 낼 수 있었다.
"파이어."
콰앙!!!
점화 마법에 의해 불꽃이 크게 치솟았다.
선두에 가던 마차가 코앞에서 치솟는 불꽃 탓에 방향을 틀었다가 벽에 부딪쳤다.
마차를 끌던 말 두 마리는 금방 타들어 갔다.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이미 습격을 눈치챈 기사 두 명이 중앙 마차에 집결했다.
기사가 다섯만 되었어도 마차를 전부 지키며 습격자를 찾아내기 위해 병력을 나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그들에겐 유물의 가치가 낮았기에, 일단 해리스 마티아스를 지키기 위해 집중했다.
레이는 적당히 불꽃을 흩뿌리며 세 번째 마차를 향해 질주했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식 템플러 둘과 수습 템플러 하나가 검과 방패를 들었다.
레이의 서클이 강하게 회전했다.
콰아아아앙!!!
지면이 얼어붙었다가 화려한 불꽃이 치솟았다.
광범위한 마법이었지만 치명적이진 못했다.
애초에 레이 실력으론 정식 템플러에게 중상을 입힐 만큼 치명적인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레이의 마법은 템플러들을 마차에서 밀어냈고, 또한 수증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
거기다 레이는 미리 준비해왔던 연막탄을 마구잡이로 터뜨렸다.
템플러, 알베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유물을 노리는 건가."
쉽게 내어줄 순 없다.
알베르트는 치솟는 얼음을 강인한 육체로 부숴내며 길을 뚫었다.
견습 템플러, 토마스가 알베르트가 열어준 길을 밟고 질주했다.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신성력이 빛을 발하자 세 번째 마차를 뒤적거리던 레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장 물러나라!!"
토마스가 고함치며 레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마차를 습격한 건 마법사다.
마법사는 아무리 고강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근접전에 커다란 약점을 보인다.
일단 거리만 좁히면 토마스라 해도 어지간한 마법사는 제압할 수 있었다.
"감히 교단의 물건을 탐내는가!!"
삽시간에 레이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힌 토마스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러자 레이가 스태프를 옆으로 들어 올리며 영창했다.
"하드 스틱(Hard Stick)."
"?"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주문에 토마스는 잠깐 당황했다.
허나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기에 토마스는 방패로 몸을 가린 채 꿋꿋하게 검을 휘둘렀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본 레이가 스태프를 옆으로 휘둘렀다.
"매지컬 슬래시(Magical Slash)!"
"?!"
토마스는 레이의 스태프를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다.
허나 레이의 스태프는 토마스의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게 휘둘러졌다.
오버드라이브까지 사용한 일격이니 그 속도를 토마스가 쫓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뻐억!!!
결국 관자놀이를 스태프에 얻어맞은 토마스의 눈깔이 위로 뒤집혔다.
유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