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머리에 열이 오른 젠킨슨은 탁자를 두들겼다.
종자 놈이 검기를 휘두르며 라이트닝 블레이드를 외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리분별 못하고 힘 없는 어린놈이 저렇게 까불면 웃고 넘기겠지만, 불행히도 눈앞의 종자놈은 사고를 쳐도 아주 크게 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너 유물 그거 손 댈 생각 하지 마!"
"마스터, 일단 진정하시고..."
"꺼져! 진정 못 해!"
"어째 마스터께서도 날이 갈수록 지미를 닮아가십니다?"
실로 양심 없는 레이의 지적에 젠킨슨이 당겨오는 뒷목을 잡았다.
핑핑 도는 시야 탓에 젠킨슨이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레이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라이트닝 블레이드는 농담이고, 보여 드린 것보다 강력한 마법도 어느 정도 사용 가능해요."
전부 아프텔의 보조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의 마법 실력으론 단순 점화 마법도 제대로 제어하기 힘들었으니까.
레이는 허공에 불덩이를 만들어 보이며 자기 주장을 증명해 보였다.
"유물을 확보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에요. 장기적으로는 필립스 백작령의 안정을 위한 길..."
"아무튼 안 돼! 네놈이 무슨 헛짓거리를 할 줄 알고? 자꾸 고집 부리면 당장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할 줄 알아라!"
젠킨슨은 자기 주장을 꺾지 않았다.
디디에도 레이의 의견에 썩 호의적인 입장은 아니었기에, 레이는 결국 최후의 수를 꺼내 들어야 했다.
"마스터, 우리 물질적 거래를 하죠."
물질적 거래.
그 뜻을 알아들은 젠킨슨이 진심으로 분노했다.
"레이, 네 이놈!!"
콰앙!!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탁자를 내려친 젠킨슨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날 돈으로 사려는 게냐?! 나를 모욕...!"
젠킨슨은 연거푸 고함을 토해내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레이의 머리 위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불쑥 튀어나와 탁자 중앙에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카각!
은은하게 빛나는 은백색 검이 좌중을 침묵시킨다.
은백색 검이 품고 있는 신성불가침한 역사와 상징성이 공기를 짓눌렀다.
레이가 깍지 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젠킨슨을 올려봤다.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 내려온 제국의 신검, '모로스'의 한 시간 자유이용권."
"나, 나, 나를... 모욕할 셈...!"
"두 시간."
"으극... 으그극..."
"네 시간. 더는 안 돼요."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젠킨슨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해서, 네 계획쯤은 한 번 들어보마."
레이가 슬그머니 디디에를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디디에 경께도 똑같이 네 시간."
"..."
디디에가 골치 아프다는 듯 자기 콧잔등을 말아쥐었다.
허나 콧잔등을 말아쥔 손 너머로 드러난 입꼬리가 이리저리 실룩이고 있음을, 플로리아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우는 표정을 한 채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떡해,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플로리아가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종자 하나와 기사 둘은 극적인 타협을 거친 후 다시 이야기를 진행했다.
현재 유물이 있는 장소는 오시리스 가 영주성의 창고 안이다.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 조용히 뚫고 가서 물건만 빼내오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주성의 창고를 급습하는 건 플로리아가 극구 반대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거기 귀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창고에 있는 물건 도둑맞으면 우리 가문 위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기겁한 플로리아가 부채를 말아쥐며 소리쳤다.
"거기 기웃거리기만 해 봐요!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지극히 타당한 플로리아의 주장에 레이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창고에 있는 걸 강탈할 수 없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
마티아스 후작가가 유물을 건네줄 때를 노리거나, 혹은 타라니스 가문이 유물을 받고 떠날 시점을 노리거나.
둘다 마법사 흉내 내며 처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음, 역시 창고에 있을 때 몰래 처리하는 게..."
"안 된다고요! 절대!!!"
다급해진 플로리아가 레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꿈도 꾸지 마요!"
"그러지 말고 협조를 좀 해주시면..."
"협조할 건 할 테니까 우리 창고는 건들지 말라고요!"
*
템플러, 알베르트가 간이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기도실 안에는, 며칠째 성실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던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가만히 서서 토마스가 기도문을 마저 읽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도를 끝낸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 상심할 것 없다."
알베르트는 눈앞의 수습 기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필립스 백작가. 지금은 영락했다고 하나, 한때 제국을 대표하는 가문 중 하나였으며, 악을 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길 마다치 않던 걸출한 영웅을 배출했던 가문이다. 그들의 검과 피에는 여전히 고결한 정신이 흐르고 있다."
알베르트가 굳이 필립스 가문의 역사를 알아와서 입에 담는 이유는 토마스 또한 알 수 있었다.
토마스는 자기 이마에 손을 짧게 가져다 대며 옅게 웃었다.
"걱정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상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만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또래 중에 자신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자를 그리 쉽게 마주치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토마스는 과거의 자만을 반성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의 시야는 좁았으니, 교단이 왜 그리 교만을 조심하고 겸허의 자세를 잃지 말라 강조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친구의 실력이라면 능히 검기를 다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검술은 엑스퍼트라 불리는 기사들에 비해 모자라지 않으나, 마나를 제어하는 건 종류가 다른 재능이니 확신하기는 힘들겠구나."
"그렇군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토마스를 가만히 바라본 알베트르가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심마에 드는 것을 주의하고, 육체의 단련 또한 게을리하지 말거라."
"염두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하다."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아이에게 너무 압박을 가하는 것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간이 기도실에서 나온 알베르트가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았다.
'마음에 걸리는구나.'
알베르트는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티아스 후작가가 반출하려는 유물은 그 기원이 불확실했다.
사이한 기운이 거의 존재치 않아 중요도가 낮게 측정되었기에 교단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아예 다른 국가로 반출하기 전에는 정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역사서 수백 권을 뒤져보다 보면 그 유물에 관한 단서를 하나쯤은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교단은 그리하지 않았다. 이번 일에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치를 본 건지, 아니면 후작가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인지 알베르트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이번 일이 마음에 걸렸다.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결심을 내린 알베르트가 품 안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템플러.
그들은 엘-람의 뜻을 떠받들고 집행하는 존재.
누군가는 고지식하다 손가락질한다 해도 템플러로서의 의무에 틈이 존재하면 아니 될 것이다.
*
회의를 마친 레이는 방으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워 보석 박힌 장신구들을 매만졌다.
클레멘스에게 뜯어온 건데, 사실 탐나서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도 잡을 겸, 클레멘스의 판단도 지켜볼 겸, 혹은 클레멘스와 접촉할 핑곗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한 움큼 집어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금에 있어선 이제 불필요한 물건이었는데, 마침 개수가 다섯 개였으니 나눠주기도 편했다.
'이건 엄마 주고...'
목걸이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은 레이가 이번엔 머리핀을 들어 올렸다.
푸른 보석과 순금이 꽃 형태로 올올히 박혀 있는 머리핀은 레이의 눈에는 약간 과하게 화려했지만, 이쪽 세계 사치품이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기에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루나 줄까...?'
루나가 머리핀을 착용한 모습을 상상한 레이가 다리를 꼬았다.
이쪽 방면엔 재능이 없는지 루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바로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예쁜 머리핀이니 어련히 어울릴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 불렀어?"
아까 전 레이가 사람을 시켜 불러놓아던 요하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요하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레이의 손에 들린 머리핀을 보고 몸을 덜컥 멈췄다.
"어..."
스물스물 올라오는 입꼬리를 억지로 진정시킨 요하나가 슬금슬금 레이에게 다가갔다.
"머리핀이네...?"
침대 옆에 다소곳한 몸짓으로 앉은 요하나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레이가 산 거야?"
"어... 내가 산 물건이긴 하지."
억지로 뜯어낸 물건이긴 하지만.
어쨌든 암묵적 합의를 거쳤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레이가 머리핀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요하나, 부탁할 게 있어."
유물을 원활히 빼돌리기 위해선 요하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네 도움이 꼭 필요해."
"어... 응?"
예상했던 대화 흐름이 아닌지라 요하나가 잠깐 얼을 탔다.
눈을 이리저리 돌려본 요하나가 갈등한 끝에 결국 대놓고 물었다.
"머, 머리핀은 누구 주려고 산 거야?"
"이거? 루..."
뿌드득!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 졌다.
이상을 눈치챈 레이가 일련의 상황을 상기해보았다.
레이도 바보는 아닌지라 요하나가 왜 부들거리는지 알아는 챌 수 있었다.
요하나에게 줄 예정이었던 장신구를 당장 꺼내 보여야 하나 고민하던 레이가,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
"루나 주려고 산 건데?"
"..."
요하나가 차게 식은 얼굴로 레이를 내려봤다.
레이는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수습 안 되겠다 싶어 서랍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힌 장신구 중, 레이는 고민하다 벨라에게 주려던 목걸이를 꺼냈다.
본래는 요하나에게 귀걸이를 줄까 싶었는데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일이 많은 요하나인지라 귀걸이를 선물하는 건 썩 현명해 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요하나 것도 준비해뒀지."
레이가 목걸이를 꺼내 요하나 앞에 펼쳐 보였다.
요하나는 잠깐 그 목걸이를 보다 표정이 괴상해지더니, 결국 벌컥 화를 냈다.
"나 놀리니까 재밌어? 왜 만날 레이는 나한테만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어째 본격적으로 따지고 드는 요하나를 향해 레이가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너도 나 놀리잖아?"
"너랑 내가 같아? 아니잖아!"
레이가 퍽 황당한 얼굴을 했다.
언뜻 듣기로는 요하나가 이기적인 억지를 쓰고 있는 듯했다.
허나 레이의 정신연령이 요하나보다 한참 높고, 또한 레이가 요하나를 업어 키웠음을 감안하면.
이제와서 레이가 자기는 요하나와 동갑이라며 동일 선상에서 비교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훨씬 억지였다.
물론 요하나는 레이의 뒷사정을 몰랐기에, 레이의 태도가 서글프고 자기가 억지부리는 아이가 된 것 같아 괜히 울먹이며 틱틱거렸다.
레이는 어버버하며 당황하다 앞뒤 없이 재차 본론을 꺼냈다.
"너한테 부탁할 거 있는데..."
"싫어. 너 혼자 알아서 해."
냉기를 풀풀 품으며 방을 나가려는 요하나의 허리를 레이가 뒤에서 잡아챘다.
물론 허리를 잡힌 요하나는 기겁했다.
"허, 허리 만지지 마!"
"아이고, 이제 사춘기 지날 때 됐는데 왜 이렇게 사람 힘들게 하냐!"
서로 다른 소리를 하며 힘싸움을 하다 둘이 같이 침대에 엎어졌다.
"이, 이거 그만 놓으라고...!"
요하나가 씩씩거리며 레이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데 방문이 다시 한 번 벌컥 열렸다.
옆방에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알레시아가 침대를 뒹구는 둘의 꼴을 보고 빽 소리쳤다.
"나의 기사여! 이건 순서가 잘못되었지 않느냐!"
도둑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