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레이는 불확실한 추측에 기반해 클레멘스를 도발했다.
허나 아무 근거 없이 감만으로 입을 놀린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특정 부위의 근육이 위축되는 증상의 유전병은 전생에도 존재했다.
이 세계의 신성력은 유전병이나 노화에 따른 병증을 치료할 수 없었고, 때로는 종양 같은 몇몇 증상에 효과가 미미했다.
과거엔 유전병을 가진 자들을 강하게 배척했다고 역사서에 남아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과거처럼 산 채로 사람을 불태우진 않는다지만 '신성력으로 치료 불가한 질병을 지닌 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유전병은 인상이 중요한 상인으로서, 정령과 계약 핑계를 대고서라도 반드시 감춰야 하는 결점이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 클레멘스가 지닌 유전병이 가족력이라면, 또한 클레멘스가 속한 가문이 과거 유전병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면.
엘-람을 믿는 자들을 적대하며 악마를 숭배하는 분위기가 가문에 형성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레이가 위험을 감수하고 클레멘스를 자극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항구를 돌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클레멘스가 고용한 자들 중 실력이 괜찮아 보이는 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가벼운 무장에 비해 날카로운 기세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째 고용주인 클레멘스를 제대로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황만 보면 클레멘스는 상단의 주인이 아닌 누군가의 대리인처럼 보였고, 클레멘스 본인 또한 현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였다.
때문에 레이는 위험을 좀 감수하고 클레멘스를 찔러보았다.
한편 클레멘스는 쉽게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타라니스 가문의 사람들 다수가 대대로 반신의 근육이 위축되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의 경중은 개인마다 달랐지만 그것이 가문에 유전되는 병임은 모를 수가 없었다.
타라니스 가문의 치료 기술이 발달한 것도 그 탓이었다.
이 사실은 당연히 대외비였는데, 왕국도 아닌 제국의 사람이 함부로 유전병에 대해 입에 담으니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냄새를 맡고 움직인 건가?
혹시 교단의 사람인가? 필립스 백작령의 스콰이어라 하지 않았었나?
하긴, 중소 영지 출신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수작을 부리는 자들은 세상에 넘쳐났다.
여러 경우의 수를 마구잡이로 떠올린 클레멘스는 일단 표정을 고쳐 썼다.
억지로 마음을 안정시킨 클레멘스가 짐짓 화난 얼굴로 레이에게 물었다.
"제가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곳이 있는 건 맞습니다. 허나 가족력은 아닙니다. 대체.. 이리 무례하게 구는 이유가 뭡니까? 제 약점이라도 잡아 돈이라도 갈취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유, 그런 건 아닙니다."
레이가 호들갑을 떨며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제가 심장이 기형인지라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좀 했습니다. 간신히 지금 위치에 오르긴 했지만, 치료사가 말하길 오래 살진 못할 거라 하더군요. 클레멘스 님도 처지가 비슷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그만 주접을 떤 것 같습니다."
"주접이라..."
만약 레이가 그저 눈썰미가 좋아 클레멘스의 장애를 눈치챘다면, 클레멘스는 사람이라도 보내 레이를 해쳐야 했다.
허나 클레멘스는 레이가 분명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을 거라 확신했다.
긴장한 기색이 스며 나오는 클레멘스를 향해 레이가 큼직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들어보였다.
츠즉!
"이야, 보석에도 이게 되는군요."
"..."
검기에 둘러싸인 보석을 보며 클레멘스가 입을 다물었다.
가공된 광물이 바스러지지 않게 검기를 발현하려면 보통 실력으론 안 됐다.
물론 검기처럼 고밀도의 에너지를 보석에 밀어 넣으면 보석 내부는 완전히 뭉개진다.
레이가 깨지기 직전의 보석을 내려놓고는 클레멘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얼음 정령이 클레멘스 곁에 붙어서 레이를 향해 냉기를 퍼부었다.
클레멘스가 얼음 정령을 품에 안자, 레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언제 한 번... 술 한 잔 나누며 속풀이 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툭툭
클레멘스의 어깨를 쳐준 후 보석함을 돌려준 레이가 몸을 돌렸다.
클레멘스는 가만히 레이의 등 뒤를 바라보다, 다시 보석함을 열어 보았다.
장신구 몇 개가 사라져 있었다.
"이런 개양아치를 봤나..."
욕설을 중얼거린 클레멘스가 잠깐 고민했다.
레이가 도둑질을 했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발을 묶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은 클레멘스가 보석함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날 레이는, 아무 문제 없이 클레멘스의 배웅을 받으며 오시리스 백작가의 영주성으로 귀환했다.
*
얼마 안 가 클레멘스가 레이를 찾아왔다.
레이와 클레멘스는 서로를 탐색하며 가면을 쓴 채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는 그 이후 플로리아를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에게 정보를 끌어모은 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젠킨슨과 디디에, 그리고 플로리아를 한방으로 불렀다.
"제가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면, 지금 상황은 이래요."
현재 제국은 황제의 후계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아직 정정한 황제는 1황자와 2황자가 사망한 후 후계를 지목하지 않았고, 때문에 크고 작은 암투가 제국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혼란한 시기를 대비해 최대한 아군을 많이 만들어 놓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 어떤 경위로 루비하 왕국의 실세인 타라니스 가문이, 마티아스 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유물' 하나를 원한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유물'을 미끼로 타라니스 가문을 불러냈다.
"가지고 있어도 큰 가치가 없는 '유물'을 타라니스 가문에 친애의 증거로 제공한 후... 그걸 시작으로 루비하 왕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왕국과 가까운 제국 세력들과 연합하고... 뭐 그런 식으로 계획을 이끌어갈 생각인 것 같아요."
말인즉슨 '유물' 자체는 마티아스 후작가에겐 그저 타라니스 가문과 대화할 수단일 뿐이었다.
타라니스 가문과 복잡한 정치적 합의를 거치기 전에 호의를 사기 위해 건넬 물건이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오해가 좀 발생한 것 같네요."
몇 년 전 시그니 산맥에서 벌어진 사건이 문제였다.
당시 제국은, 왕국이 레인저들의 내분 상황을 덮기 위해 존재도 하지 않는 '제국이 보낸 자객'을 왕국이 내세웠다고 생각했다.
반면 루비하 왕국은, 제국이 자객을 보내 악마와 계약한 1황자를 제거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 사건 탓에 악마의 하수인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의심받은 타라니스 가문은 잠시 휘청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의 후작가가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너희들 원하는 유물을 거래하겠다고 연락을 하니, 타라니스 가문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정황을 보니 유물을 미끼로 제국이나 후작가가 함정을 파놓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잠시만...요."
플로리아가 부채 위로 눈만 살짝 내보인 채 레이를 쳐다봤다.
"1황자를 죽였다고...요?"
"네."
"레이가요...?"
"네, 악마랑 계약해 헛짓거리하려고 하기에 박살을 냈죠. 로얄 가드 흉내 좀 내면서."
"..."
플로리아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부탁했다.
"저, 저는 그만 여기서 나가보면 안 될까요...?"
아무리 호기심 넘치는 성격을 지닌 플로리아라 해도 이런 감당 안 되는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진 않았다.
우는 얼굴을 한 채 부채를 잡은 손을 가늘게 떠는 플로리아를 향해 레이가 낄낄 웃었다.
"에이,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보겠어요? 부담 갖지 말고 즐겨요."
"..."
이미 한배를 탔다. 내릴 수도 없고 내리려고 했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깨달은 플로리아가 혼자 훌쩍거렸다. 로얄 가드 사칭하며 제국과 왕국을 동시에 농락한 작자가 옆에 있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게 든든했다.
낙담한 플로리아를 두고 레이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제 추측에 따르면, 후작가는 호의를 가지고 타라니스 가문에 접근했는데, 타라니스 가문은 과거의 사태 때문에 이게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때문에 타라니스 가문은 일단 저들 가문 출신의 상단주 클레멘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클레멘스는 어디까지나 문제가 생겼을 때 죄를 덮어씌우고 버릴 패인 것 같고... 현재 타라니스 가문에서 보낸 실무자가 마티아스 후작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 같아요."
레이는 클레멘스에게 조금씩 뜯어낸 정보를 토대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클레멘스는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
다만 열심히 키웠던 자신의 상단이 가문에 강탈당하다 못해 버림 패로 쓰일 위기에 처했음은 인지했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레이에게 조금씩 정보를 흘리며 안전을 보장받길 원했다.
물론 모든 패를 까보이진 않았지만, 교단 혹은 제국의 세작이라 예상되는 레이에게 다리를 놓기 위해 몇몇 중요한 정보를 건넸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레이가 디디에와 젠킨슨을 돌아봤다.
"저희가 유물을 빼돌려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젠킨슨이 물었다.
타당한 질문이었기에 디디에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자기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눌렀다.
만약 후작가와 타라니스 가문이 손을 잡는다면, 왕국에서 타라니스 가문의 영향력이 더욱 거대해지게 된다.
유물을 빼돌려 거래를 파탄낸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타라니스 가문은 약속을 어긴 후작가를 더욱 의심하게 될 테니까.
어쩌면 후작가와 타라니스 가문이 서로를 의심하며 갈등이 증폭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타라니스 가문은 이번 거래가 함정이라 오해했음에도 거래에 응했어요. 그리고 다수의 기사급 병력과 마법사들을 파견했어요."
이건 클레멘스로부터 얻은 증언이었다.
"유사시 유물의 강탈까지 상정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후작가의 예상보다 타라니스 가문은 그 유물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 거죠. 무력 충돌까지 감수하며 확보해야 할 만큼."
타라니스 가문은 이미 악마 숭배자를 배출했다고 의심되는 가문이다.
그들이 무력 충돌까지 감수하며 손에 넣으려는 유물이 있다면 절대 넘겨주어선 안 됐다.
디디에가 낮게 한숨 쉬었다.
레이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물을 빼돌릴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필립스 가의 기사로서 너를 말려야겠다. 만약 유물을 빼돌리다 정체를 들키면 백작님께서 큰 낭패를 보실 거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들키지 않을 방법은 이미 고안해 두었습니다."
"...무슨 방법?"
레이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플로리아가 축 처진 얼굴로 부채를 접은 후 상자에서 마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형태의 스태프를 건네주었다.
레이가 스태프를 붙잡은 채 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정체가 들킬 걱정은 없습니다. 다들 유물을 빼돌린 자를 마법사로 기억할 테니."
촛대를 향해 스태프를 뻗은 레이가 외쳤다.
"파이어."
화르륵!
심지에 불이 붙은 촛대를 향해 레이가 다시 외쳤다.
"아이스."
트득!
냉기가 일어나며 불이 꺼졌다.
젠킨슨이 떫은 얼굴로 물었다.
"그 마법 실력으론 기사급 하나만 접근해도 붙잡힐 텐데?"
"그런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마법이 있지요."
스릉!
스태프를 잡아 돌리자 숨겨져 있던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가 검기에 휩싸인 스태프를 휘두르며 외쳤다.
"라이트닝 블레이드!!"
촤악!!!
"..."
"..."
"..."
침묵이 내려앉은 방에서.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레이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물었다.
"제 마법이 너무 대단해서 할 말을 잃으셨나요?"
"아니, 시발."
젠킨슨이 험한 욕설을 입에 담았다.
도둑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