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야 이 개새끼들아!!!"
마부는 욕설부터 질러놓고는 뒤늦게 자기 실수를 눈치챘다.
마부는 마차에 탄 주인을 모시는 입장이었고, 때문에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욕설을 내뱉을 위치가 아니었다.
마부가 마차 안에 탄 인물들의 눈치를 보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입에 담는데,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
날카로운 기세를 피워내는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요하나를 노려봤다.
마차라는 게 전복되면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노릇이라 방금 전 일은 명백한 위협에 가까웠다.
요하나야 자기 거리감각이 틀린 적이 없으니 나름대로 '충분한' 거리를 벌린 것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남자가 요하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요하나는 상대의 기세를 느끼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하무스와 빅토르가 한발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인상을 구기며 하무스에게 고함을 쳤다.
허나 하무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놀란 얼굴이 되어 마차를 향해 되돌아갔다.
얼마 안 가 남자의 보고를 받은 마차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가 클레멘스...'
레이가 마차의 주인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클레멘스는 나이가 서른이 좀 넘어 보였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집고 있었다.
일종의 패션인가 싶었지만 서 있는 모습이 살짝 기울어져 있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반갑습니다, 하무스 경.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하무스를 마주 본 클레멘스가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했다.
하무스는 오시리스 백작가의 정식 기사였으니 당연히 오시리스 백작령 영지 내에서 영향력을 결코 작지 않았다.
클레멘스 입장에서도 밉보여서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상황은 레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하무스가 상황을 중재하고, 요하나가 사과하고, 클레멘스가 사과를 받아주며 일련의 갈등이 대략 마무리됐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클레멘스의 물음에 하무스가 레이와 요하나를 돌아보며 답했다.
"손님들이 항구 쪽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시기에 동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거 잘 되었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지요. 마침 저도 항구 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클레멘스는 상인답게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하무스에게 제안했다.
레이가 하무스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의기양양한 레이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찬 하무스가 클레멘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레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후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요하나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여전히 아이들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지 여전히 호흡이 가빴다.
레이가 궁핍한 차림의 아이들을 번갈아 보며 경고했다.
"마차 다니는 길에서 알짱거리지 마."
"죄, 죄송합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어 본 레이가 동전 몇 개를 손가락으로 아이들을 향해 튕겼다.
아이들은 동전을 한 번에 잡지는 못하고 지면을 구르는 동전을 허겁지겁 쫓아갔다.
"가자, 요하나. 아이들 구한 건 잘했지만 앞으로는 마차 같은 거 피할 때는 좀 넉넉하게 거리 좀 벌려줘."
"...그냥 갈 거야?"
"여기는 필립스 백작령이 아니야."
"..."
빠르게 수긍한 요하나가 조금 뚱한 얼굴로 레이를 지나쳤다. 아직 삐친 게 다 안 풀린 듯했다.
레이는 동전을 줍고는 히죽이며 멀어지는 아이들을 잠시 바라봤다.
필립스 백작령에선 저런 아이들을 찾기 힘들었다.
지미 보육원은 여전히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부모가 있더라도 집안이 궁핍하면 지원을 좀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고아든 아니든 재능이 출중하다 판단되면 재능에 걸맞은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물론 꾸준한 성과를 요구했다.
이런 시스템은 관리할 영지가 작은 필립스 백작령에서 기사급 고급 인력들이 무급으로 발로 뛰어다녔기에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복지에 할당되는 예산이 만만치 않아 필립스 백작은 곤란함을 내비치곤 했다.
장기적으로 필립스 백작가는 다량의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이 새끼들이 은혜를 입어놓고 다른 영지로 안 도망갈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남의 영지 고아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아주 번쩍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글쎄.
마차에 치일 뻔했을 때의 대처도, 동전을 던져주었을 때의 반사신경도, 대화를 할 때 드러나는 총기도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노멀은 안 돼. 레어도 애매하고.'
카렌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쯤만 되어도 억지로라도 데려갈 텐데, 생각보다 그만한 아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진짜 루나 뽑을 때까지가 확률업 시즌이었나...'
레이가 투덜거리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는 꽤 넓었기에 갑자기 4명의 인원을 더 태웠음에도 자리가 아주 좁지는 않았다.
레이와 어깨가 맞닿은 요하나가 괜히 툴툴대며 구석에 몸을 붙였다.
서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낸 후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항구에 들리시면 좋은 물건이 많을 겁니다. 혹시 찾으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클레멘스의 질문에 하무스의 시선이 요하나를 향했다.
요하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단검을 받아들더니 미약한 검기를 발현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가 검기를 발현하자 클레멘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 아이가 갑주를 맞춰야 할 때가 되었기에, 좋은 물건을 살피며 안목도 기를 겸 항구를 한번 들리기로 했습니다."
방금 레이가 고안한 변명을 하무스가 입에 담자 클레멘스가 눈을 빛냈다.
요하나가 모시는 가문의 세력이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저런 실력이라면 추후 요하나는 꽤 이름을 날릴 것이다.
여성 기사라는 화제성도 더해질 게 분명했기에 이번 기회에 친분을 만들어놓는다면 충분히 값진 일이 될 터였다.
클레멘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클레멘스는 말을 유쾌하게 했기에 웃음소리가 다들 잦아졌다.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았다.
허나 홀로 침묵하던 레이가 민감한 이야기를 너무 가볍게 입에 담았다.
"클레멘스 님, 오른팔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하무스와 빅토르가 동시에 레이를 쳐다봤다.
기사에 근접한 감각을 지녔다면 클레멘스의 신체에 이상이 있음은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허나 예의상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인데, 레이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오른쪽 다리도 불편해 보이시는군요. 혹시 최근에 사고라도 당하신 겁니까?"
클레멘스의 호위 역할을 하던 사내가 대놓고 기세를 드러냈다.
허나 곧장 남자를 말린 클레멘스가 하하 웃으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제가 계약을 맺은 정령이 하나 있습니다. 계약에 들어간 조건 중 하나가 신체 일부의 '제약'이었지요."
"이런, 실례했습니다."
좀 악질적인 정령 같은 경우 그냥 남 괴로워하는 꼴을 보려고 저런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있다.
마나 탈진을 유발한다든가 신체 일부의 통제권을 교란한다든가 등의 조건을 요구하는 대신 정령사에게 강한 힘을 빌려준다.
"헌데 많이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만, 계약을 고쳐 쓸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어릴 때 멋모르고 했던 계약이라 고쳐 쓰기도 힘들고, 사실 계약 자체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 정령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투둑!
작은 도마뱀 형태를 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냉기를 뿜어냈다.
조금 더웠던 마차의 온도가 금세 떨어졌다.
클레멘스가 손가락을 가볍게 젓자 정령의 몸 위로 새겨진 계약 각인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얼음 정령을 처음 본 요하나는 탄성을 흘렸고 하무스와 빅토르 또한 신기하다는 듯 정령을 쳐다봤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잠깐 발동한 권능 탓에 두 눈에 피가 가득 고여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옷깃을 눈에 대고 있는 레이를 요하나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
마차가 항구 근처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에도 다수의 상단이 가판대를 만들어 두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아까 보았던 시장과는 그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손님들을 위해 상단들이 배치해 둔 가구만 해도 쉽사리 구하기 힘든 고급품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요하나는 클레멘스의 도움을 받아 장인들이 만든 갑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레이는 덤덤하게 클레멘스의 뒤를 쫓았다.
이곳에 있는 장비들이 고급품이라곤 하나, 사실 과거 마탑의 컨퍼런스에서 보았던 물건들에 비해선 많이 모자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잠시 희희낙락거리던 요하나를 지켜본 레이가 입을 열었다.
"장신구를 한 번 구경할 수 있을까요?"
"아, 장신구요? 괜찮은 물건이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레이가 클레멘스를 따라가자 당연히 하무스, 빅토르, 요하나 또한 레이의 뒤를 따랐다.
헌데 레이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나 혼자 갔다 올게."
하무스도 빅토르도 요하나도, 각각 반응은 달랐지만 어쨌든 레이의 말을 따라 제자리서 멈췄다.
클레멘스가 묘한 시선을 했다.
장사꾼의 눈에는 그들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도 필립스 백작가의 재능 넘치는 스콰이어도 스스로를 레이보다 아래로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스스로를 레이보다 낮추는 걸 전혀 불쾌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클레멘스는 호기심이 동해 호위까지 잠시 물리고 홀로 레이를 창고까지 안내했다.
"루비하 왕국에서만 채굴되는 귀한 보석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아쿠아닉스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푸른 결정이 아주 아름다운 보석이지요. 아쿠아닉스를 활용한 제대로 된 장신구는 제국에서도 쉬이 찾아보긴 힘드실 겁니다."
그리 말하며 클레멘스가 상자를 몇 개 열어보였다.
레이가 푸른 광채를 발하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령 때문이 아니시더군요."
"...네?"
난데 없는 소리에 클레멘스의 미간에 얇게 주름이 파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신체의 불구, 정령과의 계약 탓이 아니시더군요."
레이는 찰나의 시간 겉으로 드러난 얼음 정령의 계약각인을 권능과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분석했다.
완전히 해석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 내용에 신체에 제약을 거는 내용이 없음은 확인했다.
"이리 값비싼 물건까지 취급하시는 상단주께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셨을 리는 없을 것 같고."
레이가 푸르게 빛나는 머리핀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댔다.
"그렇다면 최근에 부상을 입으셨거나, 아니면... 선천적인 장애를 지니셨다는 건데."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얼음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 냉기를 뿜어냈지만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굳이 정령 핑계를 대신 것을 보면 후자시겠군요."
이 머리핀이 참 아름답네요.
레이가 그런 뒷말을 붙이며 클레멘스를 마주 봤다.
"혹시 유전병... 가족력이십니까?"
"...대단히 무례하시군요."
클레멘스는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근육이 위축되어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의 말단이 덜덜 떨렸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클레멘스 님, 과거엔 말입니다... 신성력으로 치료 불가한 병을 앓는 자는 신벌을 받았다고 여기고 탄압했답니다.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교회는 화형을 집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고 하죠."
유전 물질에 새겨진 정보를 기반으로 육체를 복구시키는 신성력은 당연히 유전성 질환에 대응하지 못한다.
이걸 신벌 받았다고 불태워 죽였으니 정말이지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주 미개한 짓거리였던 것 같아요. 대대로 유전병을 앓아온 집안들은 거의 멸문당하다시피 했다는데, 제가 이런 집안의 자제였다면 분명 신과 세상을 저주했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 그러니까..."
레이가 히죽 웃었다.
"제가 종교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세상에는 실체하지 않는 것을 종교로 떠받들었다.
어떤 세상에선 실체하고 있는 것을 종교로 떠받들고 있었다.
허나 떠받드는 대상이 실재했으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전능하지는 못했기에,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더욱 잔혹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레이와 클레멘스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했다.
도둑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