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 클레멘스가 오시리스 백작령의 항구에 도착했다.
클레멘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 팔을 잠시 바라본 후 조금 어색한 걸음걸이로 배에서 내렸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클레멘스는 타라니스 가문과 그다지 연계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상단을 운영할 때도 가문의 영향력을 이용하지 않고 자력으로 성장시켰다.
허나 이제 타라니스 가문은 왕국의 실세 가문 중 하나였고, 클레멘스 입장에선 출신 가문의 뜻을 거스르기가 더는 쉽지 않았다.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속으로 중얼거린 클레멘스가 마중을 나온 상대를 보았다.
플로리아 오시리스.
얼마 전 안면을 튼 오시리스 백작의 막내딸이 어째선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본래 클레멘스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높은 신분을 지녔거나 거대한 상단을 이끌고 있지 않았다.
클레멘스가 껄끄러움을 감추며 고민했다.
후작가와 진행하는 모종의 거래에 대한 냄새를 맡은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 사업 관련으로 친분을 다지기 위해 막내딸을 보낸 것인가.
'후자이길 바라야지.'
클레멘스와 플로리아는 서로 속내를 감춘 채 영주성으로 동행했다.
플로리아는 이런 화제를 입에 담다가 은근슬쩍 본제를 꺼냈다.
"혹시... 소문 들어보셨나요? 제가 어릴 적에 정령 때문에 고난이 많았다는 걸?"
*
클레멘스가 영주성에 도착한 다음 날.
플로리아가 조금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레이와 마주 봤다.
"권해봤는데 사양하시더라. 몇 번 더 설득해봤지만... 뜻이 확고한 것 같았어."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 클레멘스.
플로리아는 클레멘스와 대화를 나눌 자리를 가진 후,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 가장 먼저 자신의 치부를 입에 담았다.
정령과 계약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한동안 고생했다고 솔직히 밝혔다.
오시리스 백작령 근방에 플로리아에 관한 소문이 이미 무성했다.
정령과 계약 잘못해서 제정신이 아니니, 정령과의 계약 문제 때문에 외출을 못하니 그런 소문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허나 플로리아는 멀쩡한 모습으로 클레멘스를 맞이했다.
플로리아는 클레멘스가 당연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줄 알았다.
클레멘스가 지니고 있다는 정령과의 계약 문제를 해결한 힌트가 눈앞에 있으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클레멘스는 플로리아의 이야기에 호응하면서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결국 플로리아는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랜 시간 시달렸던 정령과의 계약 문제를 해결해준 은인이 계신다. 그분이 지금 오시리스 백작령에 들렸는데, 혹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가?
내가 자리를 주선해줄 수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
직설적인 플로리아의 제의를 클레멘스는 연거푸 사양했다.
플로리아가 무례를 무릅쓰고 몇 번 권했지만 클레멘스는 정말 도움이 필요해지면 찾아오겠다며 에둘러 거절했다.
레이는 플로리아의 설명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 클레멘스의 얼굴을 볼 방법이 꼭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공식적인 만남이 불발되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레이의 표정을 보고 조금 불안해진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클레멘스를 만나고 싶다면 항구를 찾아보는 게 어때?"
"항구요?"
"항구 근처에 무역상들이 물건을 전시하고 거래하는 장소가 있어."
배를 타고 바다를 왕래하는 상단들이 푼돈 벌자고 돗자리 장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주 목적은 거래처 늘리기였고, 실제로 상단들이 각자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물건을 항구 주변에서 전시하고 있으면 큰손들이 종종 들려 새로운 거래 계약이 체결되고는 했다.
잠깐 기억을 되새겨 본 플로리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클레멘스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영주성과 항구를 왕복하며 상단을 관리할 거야. 다음 일정이 이틀 뒤였나... 시간을 알려줄 테니 그때를 맞춰 항구를 찾아가 봐."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레이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였다.
물건 구경하러 온 척하며 클레멘스를 염탐해 볼 수 있다면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레이는 요하나와 함께 항구로 향했다.
둘의 곁에 하무스와 빅토르가 함께했다.
플로리아의 부탁을 받아 길 안내를 맡게 된 건데, 소식을 들은 오시리스 백작은 하무스에게 남들 모르게 분부했다.
'요하나를 회유하는 게 가능할지 살펴보라고...?'
하무스는 실소를 흘렸다.
하무스가 생각하기에 요하나를 회유하려면 레이부터 회유해야 했는데, 저 속 시커먼 놈을 회유하는 데 성공해서 영지로 데려와 봤자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날 것 같았다.
홀로 고개를 젓는 하무스를 보며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요즘 맞고 다니냐?"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는 하무스는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좀 불편해 보였다.
하무스가 이를 갈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손님들이 잔뜩 몰려 있는 연무장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선배 기사들에게 멍 몇 군데 들고 끝난 게 다행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을 것 같냐...?"
"아, 나 때문이었어?"
낄낄 웃은 레이가 밥이나 한 끼 사주겠다며 하무스를 달랬다.
항구를 향해 걸어가다 보니 주변에 상인들이 가판대를 놓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따리상이나 작은 상단의 판매꾼이었다.
중간중간 대장간도 보이고 먹을 것을 파는 곳도 보였다.
항구로 향하는 방향으로 이런 시장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규모만 따지면 상당히 거대했다.
여기저기 살피며 걸어가던 레이가 갑옷이 진열되어 있는 가판대 앞에서 멈추었다.
진열된 갑옷이야 잡철이 섞인 싸구려 갑옷이었다. 애초에 이쪽 시장에서 제대로 된 고급품은 거의 구경하기 힘들었다.
다만 레이는 갑옷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요하나."
"응?"
"슬슬 갑주 좀 맞춰볼까?"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엑스퍼트의 경지쯤 오른 기사들 중 갑주가 없는 기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검기를 다룰 수 있는 무인은 대부분의 물질을 절단할 수 있지만 방호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다.
갑주를 입어야 다양한 돌발 상황에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다만 필립스 백작가가 몇 년째 요하나의 갑주를 맞춰주지 이유는 요하나가 아직 성장기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소수의 아티펙트가 아니고서야 체격이 커지면 갑주를 다시 맞춰야 하는데, 필립스 백작령이 요하나의 갑주를 몇 개월마다 사들일 만큼 여유가 대단하진 않았다.
레이가 요하나의 머리 높이를 재보면서 말했다.
"키도 다 큰 것 같고... 체격도 여기서 많이 커질 것 같진 않고..."
레이의 눈동자가 요하나의 몸을 여기저기 훑었다.
괜히 낯부끄러워진 요하나가 한 마디 툭 뱉었다.
"레이는 갑주 안 맞춰? 레이도 키 다 컸잖아?"
"..."
레이의 표정이 잠깐 떫어졌다.
"그... 난 아직 성장기 안 끝났어."
요하나가 레이의 찌푸려진 미간을 보고 히죽댔다.
요하나는 세상 잘나 보이는 레이가 간간이 열 받아 할 때가 그리 재밌을 수가 없었다.
"더 안 클 것 같은데? 레이 작년이랑 키 별 차이 없잖아?"
"..."
"그래도 다행이네. 레이가 카렌보다 쪼~끔 더 크잖아? 나는 레이가 계속 꼬맹일 줄 알았어."
"...여기서 갑옷 좀 구경하고 있어. 마음에 드는 견갑 같은 거 있으면 골라놓던가. 하나 사줄게."
"정말?"
화색하던 요하나가 어딘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레이를 보고 물었다.
"근데 어디 가?"
"장신구 가게 들려서 카렌한테 선물할 귀걸이 같은 것 좀 찾아보려고."
"..."
이번엔 요하나의 표정이 와락 떫어졌다.
입술을 꽉 깨문 요하나가, 룩딸이니 세트 아이템이니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레이의 정강이를 그대로 걷어찼다.
엄살을 부리며 쓰러지는 레이를 뒤로하고 요하나가 씩씩 거리며 멀어졌다.
레이가 요하나의 등을 보고 소리쳤다.
"야, 너가 애냐? 농담한 걸로 또 삐졌어? 야! 요하나! 어디 가?!"
그꼴을 보며 하무스와 빅토르가 번갈아 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무스가 레이의 뒷목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애를 못 이겨 먹어서 안달이냐?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 좀 져주면 안 되냐? 왜 이리 나잇값을 못해?"
"나 쟤랑 동갑인데?"
"..."
레이의 양심 없는 발언에 잠깐 할 말을 잃은 하무스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는 사이 빅토르가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빅토르가 보기에 요하나가 애처럼 구는 건 레이 지분이 대단히 컸다.
빅토르는 고작 며칠 레이와 요하나를 지켜봤을 뿐이지만, 레이는 자주 요하나를 애처럼 취급하고 애처럼 다뤘다.
요하나가 그 눈높이에 맞춰 신경질을 부려대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좀 잘 해줘, 임마."
"나만큼 잘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너무 애 취급하지 말라고."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빅토르의 말을 아예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레이에게 있어서도 요하나를 비롯한 아이들과의 거리감은 좀 어려운 부분이었다.
어쨌든 그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요하나를 쫓아가는데 큰길의 가장자리에 아이 두 명이 얼쩡거리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차림새를 보니 꽤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 같아 보였는데,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시장 구경을 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위험한 광경이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은 마차가 통행하는 길이라서 저러다가 치이기 딱 좋았다.
하무스와 빅토르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큰길에서 쫓아내기 위해 다가갔다.
헌데 뒤를 따르던 레이가 둘의 어깨를 잡았다.
"아, 잠시만."
레이의 손가락이 큰길 끝자락을 가리켰다.
마차 한 대가 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애들이 바퀴에 깔릴 모양새였다.
"저거 어디 가문 마차야?"
"...확답은 못하겠지만, 마차에 타라니스 가문 문양이 새겨진 것처럼 보이는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상단주 클레멘스가 항구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플로리아에게 들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겹친 것 같았다.
"마침 잘 됐네. 저 애들 조금만 늦게 구하자."
뭔 헛소리를 하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 하무스와 빅토르를 향해 레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좀 아슬아슬한 순간에 애들을 구하면 마차 주인도 마차 세우고 한마디 할 거 아니야?"
야 이 개새끼들아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 - 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욕설을 쏟아낼 거다.
"그때 미리 눈도장 좀 찍는 거지."
사과하고, 사과받고, 서로 자기 소개도 하고, 그러면서 눈도장 찍으면 거리 좁히기가 더 쉬워질 터다.
레이의 계획을 들은 하무스와 빅토르의 눈동자에 냉기가 깃들었다.
레이가 억울해했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가 애들을 마차에 치이게 내버려두자고 라도 했냐?"
"...됐다, 알아서 해라."
고개를 저은 하무스와 빅토르가 한발 물러섰다.
레이는 적당한 타이밍에 뛰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마차의 마부가 아이들을 발견한 듯 소리를 질렀는데, 큰길에 있던 아이들은 놀라서 몸이 굳었는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차를 급하게 세운다고 해도 속도를 다 줄이지 못해 말발굽에 밟힐 모양새라 꽤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물론 레이는 아이들이 마차에 치이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레이가 아이들을 향해 내딛는 순간, 요하나가 한 발 앞서 레이를 스쳐 갔다.
레이는 몇 발자국 전진한 후 어설프게 제자리서 멈춘 채 요하나를 지켜봤다.
요하나의 실력이라면 속도를 늦춘 마차가 도달하기 전에 아이들을 구하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요하나는 아이들을 붙잡아 마차의 진행 경로에서 재빠르게 벗어났다.
다만 레이는 한 가지 간과했다.
요하나는 천부적인 거리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요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차에 치이지 않을 최소 거리만큼 물러난 후 움직임을 딱 멈췄다.
그 최소 거리가 블과 몇 센티였다.
그 탓에 구경꾼들 대부분은 요하나와 아이들이 마차에 치이는 줄 알았다.
이는 말을 몰던 마부의 눈에도 똑같아 보였다.
슈욱!!
다행히 요하나의 예상대로 마차는 몇 센티 간격 차이로 요하나와 아이들의 곁을 스쳐갔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한참 더 가서 마차를 세운 마부가 입을 우물거리다 감정을 토해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접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