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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8화 (118/446)

118화

젠킨슨이 대련을 빙자한 결투를 준비할 때만 해도 경시 어린 시선이 다수였다.

하무스와 빅토르는 저들이 왜 젠킨슨을 낮잡아 보는지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기사를 양성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됐으며, 또한 돈만 쏟아 붙는다고 특출난 기사를 양성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필립스 백작가 수준의 힘과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 제대로 된 인재를 영입해 강력한 기사로 키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젠킨슨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무스와 빅토르는 필립스 백작가 기사들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강인했다.

쩌엉!!

대련이 시작되고 얼마 못 가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바닥을 굴렀다.

하무스가 낮게 신음했다.

"어이구..."

제대로 망신을 당하게 생긴 해리스 마티아스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얼굴을 달궜다.

연무장에 있던 다른 이들 또한 예상을 한참 빗나간 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당혹스러워하며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 일방적으로 밀려나는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과연 역량이 떨어지는 기사인가.

그건 결코 아니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는 분명 완숙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후작가의 최정예는 아니었으나, 어디 가서 미흡하다는 소리를 들을 실력은 아니었다.

허나 젠킨슨은 완전히 상대를 압도했다.

하무스도 지금처럼 일방적인 결과를 예상하진 못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강인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상대와 수준 차이가 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파각!!

젠킨슨의 검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이 뒤틀린 탓에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대련 치고 손속이 과했으나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결투였기에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는 분한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결국 대련을 더 진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젠킨슨의 완벽한 승리였다.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박수 소리가 홀로 요란했다.

쫙쫙!!

레이가 이끄는 대로 손뼉을 치던 요하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인상을 콱 찌푸린 요하나가 얼굴을 벌겋게 불들인 채 등 뒤에 붙은 레이를 밀어냈다.

투닥이는 레이와 요하나를 향해 수습 신분의 템플러가 앞으로 나섰다.

수습 신분의 템플러에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긴장이 역력했다.

젠킨슨의 실력을 보고나니 눈앞의 스콰이어 또한 결코 만만하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하무스와 빅토르가 잠깐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건 아예 대련이 성립이 안 된다.

수습 신분의 템플러는 레이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체격도 더 좋았다.

허나 레이는, 하무스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열셋의 나이에 엑스퍼트 급 퍼포먼스를 선보인 미친놈이었다.

숙련된 템플러를 붙여놔도 상대가 될까 의아했는데 수습 신분이라니.

"차라리 깔끔하게 끝내주면 다행인데..."

하무스의 중얼거림에 빅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깔끔하게 끝내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근데 그게 될까...?'

어렸을 적 딱딱한 빵으로 교회 사람에게 얻어터지기라도 했는지, 레이는 성직자를 향한 억한 심정이 좀 쌓여있는 모양새였다.

하무스와 빅토르가 걱정하는 사이 대련이 시작됐다.

연무장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굉장히 무거웠다.

레이의 실력에 대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바가 없었다.

다들 설마설마 하는 시선으로 레이를 응시했다.

수습 템플러는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채 검과 방패를 강하게 붙잡았다.

수습 템플러가 먼저 움직인다.

발 걸음 한 번과 휘두름 한 번에 경건한 기도가 담긴다.

축복이 내려앉은 마나의 응집체, 신성력이 체내를 질주하며 활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까앙-!

너무나도 쉽사리 수습 템플러의 검을 받아낸 레이가 가볍게 손을 털어 방패를 튕겨냈다.

수습 템플러가 균형을 잡으려는 순간 어느새 거리를 좁힌 레이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수습 템플러는 곧장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허나 휘둘러지는 검에 이전과 같은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레이가 끝내고자 할 때 끝낼 수 있는 대련이었다.

허나 레이는 단번에 대련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적당히 검을 나누다가 거리를 좁혀 체술로 상대를 타격하길 반복했다.

"큭...!"

다리를 연거푸 얻어맞은 수습 템플러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검을 타고 흘렀던 예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꼴을 보고 레이가 다시 한 번 수습 템플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휘청거리다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수습 템플러를 보고 레이가 일갈했다.

"똑바로 서라, 템플러."

"...!"

"그리 나약해서야 엘-람의 의지를 대변할 수 있겠는가?"

빅토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하무스가 자기 눈앞을 가렸다.

레이는 조금 전 템플러가 젠킨슨을 무시하며 무례하게 굴었던 걸 그대로 갚아주고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미친놈아..."

교단의 템플러 상대로 저리 기 싸움하는 놈은 웬만해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수습 템플러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레이의 질책에 정신을 차린 수습 템플러가 지면을 굳게 디딘 채 다시 검을 세웠다.

쩌억!

레이는 더는 상대를 농락하지 않고 깔끔하게 대련을 끝냈다.

레이의 검격을 맞고 튕겨져나간 수습 템플러는 의식을 잃고 지면에 뻗어버렸다.

공기에 성에가 낀 것 마냥 분위기가 아주 참담해졌다.

젠킨슨과 요하나만이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빅토르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해했다.

"아니, 저래도 되는 거야?"

"문제 될 건 없잖아."

"그래도... 눈치를 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빅토르의 말이 맞다.

후작가와 교단은 분명 제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가능한 세력이었다.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허나 필립스 백작가 입장에서 그들에게 조금 밉보인다고 당장 아쉬울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반쯤 고립되어 있던 가문이었으니, 이제 와서 누가 압박을 가한다고 한들 아쉬운 게 있을 리가..."

사실 그것도 그거고, 후작가와 교단이 먼저 필립스 백작가를 모욕했기에 명분도 젠킨슨과 레이에게 있었다.

하무스가 중얼거렸다.

"오늘 일로 필립스 백작가가 체면을 좀 세우겠어."

원체 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인물들이 많은 공간이라 소문이 꽤 빠르게 번질 것이다.

영락했던 필립스 백작가가 아주 이빨 빠진 짐승은 아니었다고.

결국 마티아스 후작가와 교단 관계자들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자리를 떠남으로써 대련이 마무리됐다.

*

쏴아아아아-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모래사장을 적신다.

스물스물 너울지는 파도가 다시 바닷물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레이는 이 세상에 와서 바다를 처음 보았다.

전생의 기억에 비해 파도가 좀 얌전하게 느껴지는 걸 빼고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풍경이었다.

허나 덤덤한 레이에 비해 요하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니 단어가 되지 못한 탄성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잠시 뒤 요하나와 알레시아가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요하나는 바닷물을 찍어 맛보면서 진짜 짠맛이 난다고 헤실거리며 감탄했다.

요하나와 알레시아가 물장구를 치는 광경을 보며 레이가 턱을 매만졌다.

요하나가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회 될 때 애들한테 바다 구경 좀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니까..."

"보기보다 정이 참 많아, 레이는."

플로리아가 후후 웃으며 레이의 혼잣말에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플로리아는 과거보다 여유로워진 분위기를 풍기며 유려한 걸음걸이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필립스 백작가가 저력을 드러냈다고 다들 말이 많더라."

"호들갑이죠, 뭐. 요즘은 잘 지내세요?"

"재밌게 지내고 있어. 아버지께서는 적당한 혼처가 없다고 걱정이 많으시지만 말이야."

플로리아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가를 기울였다.

본래 자유분방한 성향을 가진 플로리아로서는 혼인이 늦어지는 게 도리어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조금은 주의하는 게 좋아. 필립스 백작가가 모욕에 대응하는 태도가 너무 갑작스레 강경해지니까 아버지도 좀 당황하신 것 같더라."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시라고 전해주실래요?"

"후후, 그러도록 할게."

며칠 전보다 더워진 공기 속에서 부채질하는 플로리아를 향해 레이가 본제를 꺼냈다.

"템플러가 영주성에서 왜 머물고 있는 건가요?"

"음... 대단한 일은 아니야."

플로리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타락한 자들을 무찌르고 얻은 전리품들은 파괴하는 게 원칙이지만, 파괴하기 곤란한 전리품들은 교단이 관리하고 있어."

교단은 타락했던 자들의 유품이 '매개체'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그걸 본인들의 감시 아래 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모든 전리품들을 교단이 직접 관리하는 건 아니었다.

개인도 얼마든지 타락한 자들의 전장에서 습득한 전리품을 소유할 수 있다.

허나 전리품을 거래하는 등의 행위를 하기 위해선 반드시 교단 인물의 입회가 필요했다.

이는 만약의 위험을 대비함과 동시에 교단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제도였다.

"이번에 후작가가 오래된 '전리품'을 하나 왕국 측 상단과 거래하기로 한 것 같아."

"왕국 측 상단이라면..."

"네가 생각하는 그 상단이 맞아. 전리품이 대단한 물건은 아닐 거야. 기껏해야 좀 희귀한 골동품이겠지."

만약 후작가가 거래하려는 전리품이 정말 가치 있고 위험한 유물이었다면 교단이 거래 자체를 막았을 것이다.

이번처럼 형식적으로 템플러 소수를 파견한 것을 보면 절대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허나 레이는 상황을 무조건 낙천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거래한다는 물건을... 한 번 확인해봐야겠네요."

왕국 측 상단주와 거리를 좁혀 회유하든 막무가내로 창고로 침투하든 두 눈으로 직접 물건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해독 권능을 사용한다면 거래될 전리품의 진짜 가치를 대략적이나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래될 전리품이 극히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파괴하거나 들고 도망쳐야 할 텐데.'

왕국 쪽에 문제가 생기면 필립스 백작령도 위험해 질 테니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허나 전리품을 강탈하더라도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 됐다.

잠깐 고민한 레이가 플로리아를 마주 봤다.

"플로리아 님, 혹시 거래 내역이 남지 않은 완드 하나만 구해주실 수 있나요?"

"음..."

완드는 마법사의 마법 발현을 보조해주는 도구다.

필수적인 도구는 아니었고, 숙련된 마법사들은 완드의 사용을 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섬세한 마법은 완드보다 양손을 이용해 발현하는 게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루나라는 아이에게 선물하게?"

"아뇨. 제가 잠깐 써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

잠시 침묵한 플로리아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생각해보니 레이는 빙결 마법이 특기였지? 후후..."

"사실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은 윈드 커터(Wind Cutter)입니다."

레이가 허공에다 손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베는 시늉을 하자 플로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떫어졌다.

"저기... 우리 영지에서 문제를 일으키실 건... 아니시...죠?"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플로리아를 향해 레이는 그저 방긋 웃어 보였다.

접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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