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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7화 (117/446)

증명 (1)

117화

귀족은 일종의 특권층이다.

특권층은 그 숫자가 제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귀족의 자식이 전부 귀족 신분을 부여받는다면, 몇 세대만 지나도 귀족이 바글바글 늘어날 것이다.

때문에 귀족 중 작위를 계승 받은 자만이 자식에게 귀족 신분을 물려줄 수 있었다.

예컨데 알레시아의 경우, 필립스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작위의 계승이 예정되어 있기에 그녀가 자식을 낳는다면 전부 귀족 신분을 부여받을 것이다.

허나 오시리스 백작의 막내딸인 플로리아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작위가 없는 그녀가 자식을 낳는다면 젠트리 계층으로 분류되게 된다.

젠트리 계층은 귀족이 아닌 평민 신분이지만 법률상으로 일정 부분 편의를 보장받는다.

젠트리 계층이 자식을 낳으면 그 세대부터는 온전히 평민으로 취급된다.

귀족 가문에서도 젠트리까지는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는 풍토가 존재한다.

내 생물학적 애비는 젠트리 계층이었다.

은수저 물고 태어나 남의 여자나 후리고 다니다가, 호적상 아버지의 도끼에 대가리가 깨져 뒈졌다.

생물학적 애비의 배경이었던 마티아스 후작가는 자기 가문의 젠트리가 평범한 평민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사람을 보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됐다며, 호적상 아버지의 자식인 나에게까지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티아스 후작가 사람이 찾아오자 벨라가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지켰다.

자비로운 필립스 백작이 소식을 듣고 후작가와 벨라를 중재했다.

그쯤되면 후작가도 필립스 백작의 체면을 봐서라도 적당히 덮고 넘어가 줄 만했다.

허나 어떤 새끼가 일을 주도했는지 모르지만, 마티아스 후작가는 평민이 도저히 감당 못할 액수를 배상금으로 요구했다.

결국 벨라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날 이후 벨라는 창관에 발이 묶였고, 또한 자기 운명이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

마음이 차게 식었다.

마티아스 후작가가 벨라에게 대단한 패악질을 부린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인식을 기준으로 마티아스 후작가가 독하게 벨라를 괴롭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단지 체면 상했다고 지랄 좀 했을 뿐이다.

그걸 알기에 과거의 분노를 마음 한편으로 치운 채 모른 척하고 살았다.

허나 마티아스 후작가의 사람이 면전에서 남의 고아를 탐내는 꼴을 보니 순간 속이 뒤집어졌다.

뒷목을 매만지며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기분이 매우 안 좋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발광을 떨 수는 없었다.

하무스와 빅토르에게 사과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해리스 마티아스는 훈계하는 것처럼 젠킨슨을 타박했다.

자존심 긁어대며 한다는 말이 결국 필립스 백작령은 요하나와 같은 인재를 만개시킬 역량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대놓고 쪽을 당한 젠킨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필립스 백작가 기사들은 인내하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젠킨슨에게 작은 불만이 있다면, 이 역할을 본래 디디에가 해야 했었다는 것 하나였다.

요하나의 마스터는 젠킨슨이 아니라 디디에였다.

허나 디디에는 알레시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젠킨슨은 디디에를 대신해서 요하나의 마스터 역할을 해주는 중이었다.

젠킨슨이 한숨을 삼키며 적당히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해리스 마티아스의 무례를 지적하긴커녕 회피하기 급급해보이는 젠킨슨의 모습에 한층 우스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요하나 또한 연무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표정이 나빠졌다.

요하나에게 있어 젠킨슨은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준 스승이었다.

젠킨슨에게 향하는 무시 어린 시선이 달가울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연무장을 떠나고 싶었지만, 요하나는 젠킨슨이 미리 일러준 대로 적당히 눈치 없는 척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느 가문 출신인가?"

귀족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필립스 백작가의 종자 노릇을 하는 걸 보니 결코 힘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을 리는 없었다.

요하나가 떠듬떠듬 답했다.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젠트리는 커녕 평범한 평민 가정에서도 자라지 못한 아이.

교회에서나 작게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였기에 모두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육중한 갑옷으로 몸을 두른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과장된 몸짓으로 무릎 한쪽을 꿇었다.

"엘-람께서 너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교단의 성기사, 템플러였다.

망토에는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두꺼운 견갑에는 신께 바치는 맹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으니 그 정체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템플러는 부모 잃은 고아인 네가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 전부 주신의 축복 덕분이라며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꼴을 보며 레이가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종교쟁이 새끼들은 입만 열면 매번 저 좆같은 레퍼토리를..."

콰득!

하무스와 빅토르가 다급히 나서서 레이를 붙잡았다.

하무스가 레이를 억지로 깔아눕힌 채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너 진짜 잡혀가고 싶냐...?!"

현재가 신성모독 한 번 했다고 산 채로 화형당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레이처럼 아가리를 털었다간 목이 똑바로 붙어있기 힘들었다.

레이가 반성의 제스처를 취했다.

"미안, 미안."

레이는 전생에서는 종교인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허나 친구 대신 이 세계에 잡혀 오게 되면서 레이는 굉장히 삐딱하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게, 교단이 떠받드는 신적인 존재는 레이를 이 세계로 환생시킨 초월자이거나 그와 유사한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과거를 떠올린 레이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쟤들이 떠받들고 있는 게 얼마나 멍청한 머저리 새..."

"아, 닥치라고!"

"우왁!"

하무스와 빅토르가 번갈아가며 레이를 뒤흔들었다.

또 다시 뒹굴어대는 남자 3인방을 보며 연무장에 있던 자들이 고개를 짧게 저었다.

하무스를 바라보는 오시리스 가 기사들의 눈에서는 스물스물 한기가 스며 나왔다.

잔뜩 굴러다닌 레이가 대(大)자로 뻗은 채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미안해. 근데 템플러들께서는 왜 영주성에 머물고 계시는 거야?"

"음..."

잠시 기억을 되새겨본 하무스가 순순히 답해주었다.

"마티아스 후작가 분들이랑 동행하셨어. 자세한 사유는 나도 몰라."

"...마티아스 후작가 분들은 여기 무슨 일로 들르셨는데?"

"루비하 왕국 측 상단이랑 거래할 물건이 있다고 들었어."

"흠."

교단의 핵심 무력 중 하나인 템플러는 외부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루비하 왕국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를 살펴보려 이곳에 왔는데, 여기서 템플러를 만나니 상황이 좀 묘하게 느껴졌다.

'템플러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는지 한 번 알아봐야겠네.'

플로리아가 있으니 정보를 얻기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타라니스 가문 건과 별개로 지금 난장판이 된 연무장의 분위기는 한 번 정리해야 했다.

터벅터벅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간 레이가 요하나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

요하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레이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레이는 오랜만에 반항하지 않는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젠킨슨을 쳐다봤다.

"저 실없는 말씀들을 언제까지 가만히 듣고 계실 겁니까?"

레이의 한 마디에 해리스의 눈가가 대번 일그러졌다.

"실없다?"

"실없지요."

레이가 낄낄 웃으며 대꾸했다.

"필립스 백작가는 전쟁영웅이신 클라위스 필립스 님의 뜻을 이어받아 오랜 시간 제국을 지탱했던 가문입니다. 비록 과거보다 세가 줄었다고는 하나 기사 하나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리라 무시 받을 위치는 아닙니다. 그리고..."

레이의 고개가 요하나에게 접근했던 템플러에게 돌아갔다.

"보육원을 지원하신 것도,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거두어 보호하라 하신 것도 필립스 백작님이시며, 또한 필립스 백작님의 자비 덕분에 신분 천한 아이도 검술을 배울 기회를 얻었으니."

레이가 요하나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히죽댔다.

"엘-람께서 필립스 백작님의 고결함을 귀히 여겨 이 아이를 곁으로 보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

연무장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레이를 무심하게 응시하던 해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방지구나."

스콰이어가 홀로 나서서 시비를 걸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입을 놀릴 거면 제대로 된 기사 신분은 되어야 했지만, 그조차도 세가 약한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라면 침묵하는 게 현명했다.

둘의 시선이 충돌한 순간.

"기사는."

젠킨슨이 검자루를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오직 검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뿐입니다."

꼬우면 아가리 그만 털고 몸으로 붙어 보자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필립스 백작의 서임을 받은 기사인 젠킨슨이 이리 나선 이상 대련이란 이름의 결투가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여기서 꼬리를 빼버리면 평생 겁쟁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할 것이다.

레이는 표정을 다잡지 못한 채 젠킨슨을 바라봤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셔?"

"필립스 백작가 기사들이 자존심이 없어서 수그리고 살았던 줄 아냐?"

어차피 앞으로 필립스 백작가의 힘을 차근차근 드러내며 명예를 회복하려면 이런 식의 충돌은 몇 번 감수해야 한다.

젠킨슨이 썩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를 상대할 거냐?"

"음... 그럼 제가 교단 쪽을 맡겠습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사람을 상대했다간 도저히 손대중이 안 될 것 같았다.

젠킨슨과 레이가 각각 해리스와 템플러를 향해 한 발자국 전진했다.

면전에서 도발을 당한 해리스와 템플러가 안면을 꿈틀댔다.

둘 모두 이런 굴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곧바로 맞상대할 자를 준비했다.

결국 젠킨슨은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와 검을 맞대게 됐고, 레이는 아직 수습 신분인 템플러를 상대하게 됐다.

과열되는 분위기 속에 젠킨슨의 대련이 먼저 시작됐다.

"잘 부탁하오."

젠킨슨을 상대하게 된 기사가 예의를 차렸다.

태도는 겸손했지만, 젠킨슨을 일방적으로 꺾어 가문 간의 격차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로부터 느껴졌다.

젠킨슨이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패한다면 요하나 또한 자기가 우물 안에 갇혀 있음을 명백히 깨닫게 될 것이다.

"후우..."

상대의 의도를 훤히 꿰뚫어 본 젠킨슨이 호흡을 고르며 검기를 발현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젠킨슨.

그는 완숙한 엑스퍼트로서, 유일한 약점은 다양한 검술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 하나였다.

함부로 검을 나누지 못하고 항상 안쪽으로 힘을 숨겨야 했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약점이었다.

다만.

젠킨슨은 스스로도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다.

젠킨슨이 시간 날 때마다 대련 상대를 해주어야 했던 레이가 사용했던 검술은.

제국 역사의 정점이자, 감히 신화를 이루었다 여겨지는 대영웅이 창조한, 하나의 극의였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레이가 펼쳐내는 극의의 편린을 경험하며 이미 과거의 한계를 넘어섰다.

영지 바깥에서 검을 나눌 기회가 극히 적었기에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뿐.

쩌엉!!!

흉갑이 갈라지며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튕겨 나갔다.

연무장을 구른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가 당혹에 물든 채 제자리서 비틀댔다.

젠킨슨은 단단했다.

너무나 단단했기에, 후작가의 기사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기 위해 화려하게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 어떤 기예를 펼쳐도 젠킨슨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르시아가 창조한 극의의 편린을 보았던 기사의 눈에는.

어쭙잖은 검술들의 기예 따위는 허울 좋은 춤사위와 다를 바 없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젠킨슨이, 마티아스 후작가의 기사를 압도한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요하나의 팔목을 잡고 손뼉을 대신 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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