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6화 (116/446)

오시리스 (4)

116화

오시리스 가의 기사, 바스티안이 요하나를 바라봤다.

키 차이가 꽤 나서 가까이 붙으면 정수리가 보일 것만 같았다.

허나 바스티안은 요하나를 경시하지 않았다.

필립스 가의 기사가 여기까지 요하나를 데려와 자신 있게 내놓는 것을 보면 소문이 마냥 부풀려진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검을 뽑은 바스티안은 필립스 가의 검술을 떠올렸다.

필립스 가의 검술은 수세를 취하다 허를 찌르는 검식이 주를 이뤘다.

요하나 또한 필립스 가의 검술을 익혔을 터.

바스티안이 숨을 느릿하게 들이쉬며 요하나의 선공을 기다렸다.

마음을 가다듬은 요하나가 과감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카앙!

바스티안은 공격을 받아내며 생각했다.

호흡과 호흡 사이를 아주 잘 파고든 일격이라고.

그 찰나 요하나가 몸을 빙글 돌리며 바스티안의 품을 파고들었다.

체구가 작은지라 움직임이 대단히 날렵했다.

바스티안은 요하나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공격을 튕겨냈다.

몸을 멈춰 세운 요하나가 오른발을 앞으로 디디며 상체를 기울였다.

바스티안이 요하나의 찌르기를 예상하고 검을 비스듬히 세운 순간 요하나의 오른발이 빠르게 땅을 두 번 굴렀다.

검이 내질러지기까지 약간의 지연.

그 자그마한 차이가 바스티안의 타이밍을 뺏어서 틈을 내보이게 만들었다.

카가각!

예상보다 더욱 큰 동작으로 방어를 해야 했던 바스티안이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한 번 공세를 잡은 요하나가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서로의 검격이 연이어 충돌하며 거친 쇳소리가 연무장을 달궜다.

카카카카카캉!

바스티안은 예기치 못하게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야 했다.

요하나가 이리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바스티안은 예상하지 못했다.

허나 바스티안이 뒷걸음질해야 했던 이유는 공세나 수세 같은 문제가 아니었고, 검술의 상성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바스티안은 불쾌함을 느꼈다.

본디 기사 간의 대결에선 서로의 흐름이 뒤섞이기 마련이다.

각자의 흐름 속에서 상대의 흐름을 뺏어오기 위해 온갖 수 싸움을 벌이고, 결국 흐름을 지배한 자가 상대적 우위를 지니게 된다.

근데 요하나에겐 그 흐름이란 게 없었다.

요하나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바스티안의 호흡을 잘라내며 짓쳐 들고 있었다.

때로는 발을 굴리고, 때로는 상체와 하체의 박자가 따로 놀았으며, 때로는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착지 타이밍을 조절해가며 바스티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건 엇박자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흐름에 변주를 넣는 것도 아니었다.

요하나는 단지, 바스티안의 흐름 자체를 파쇄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바스티안이 눈가를 좁혔다.

대체 이 어처구니 없는 검술을 구사 가능케 한 핵심이 무엇인가.

단지 타고난 직관 따위로 숙련된 기사의 흐름을 이토록 농락할 수는 없었다.

바스티안은 밀려나는 와중에도 요하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형형히 빛나는 요하나의 눈동자는 바스티안의 모든 움직임을 담아내서 실시간으로 예측 궤도를 그려냈다.

바스티안의 신체 부위 하나하나의 속도와 위치까지 꿰뚫어 내어, 찰나 간 드러나는 빈틈조차도 무자비하게 파고 들었다.

재능. 재능. 그 압도적인 재능.

바스티안은 잠시 잠깐 전율을 느꼈다.

으레 천재라 하면 본능과 직관에 크게 의존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허나 눈앞의 소녀는 불확실한 본능과 직관 따위조차 수치화시켜, 철저히 계산된 자기 의지로 상대의 흐름을 파쇄하고 있었다.

바스티안은 고의로 가슴 부위에 허점을 노출했다.

요하나의 검이 일직선으로 바스티안의 흉부를 파고들었다.

바스티안은 한 발 늦게 허리를 틀며 서로의 크로스 가드를 맞부딪쳤다.

끼기기긱!

요하나의 검이 바스티안의 흉갑을 긁고 지나갔다.

바스티안은 흉갑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감수했다.

헌데 바스티안의 예상보다 요하나의 검이 너무 명검이었다.

바스티안은 요하나의 검이 흉갑을 절반 가까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침음을 흘렸다.

끄득!

흉갑이야 어쨌건, 맞닿은 크로스가드를 통해 바스티안이 요하나를 밀어냈다.

체격 차이가 분명했기에 요하나는 뒷걸음질치다 다리를 멈췄다.

바스티안은 깊게 파인 흉갑을 내려다보곤 실소를 삼켰다.

이제 연무장의 이목이 전부 요하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두의 표정에 옅은 경악이 서려 있었다.

직접 검을 마주댄 바스티안 만큼은 아니더라도, 검을 조금이라도 배운 자라면 요하나가 지닌 재능의 크기를 대략적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쯤되니 바스티안은 굉장히 궁금했다.

대다수의 기사는 안정된 검식에 호흡을 맞춰 마나를 수반한다.

요하나처럼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검술에 검기를 덮어씌우려면 그 난도가 몇 배는 올라갔다.

과연 요하나가 저런 검술을 사용하면서도 검기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바스티안의 검 위로 검기가 발현됐다.

요하나 또한 물러서지 않고 검기를 발현한 채, 다시 바스티안을 향해 전진했다.

카가각!!

두 엑스퍼트가 격돌한다.

오시리스 가의 검식은 직선적인 성향을 띄기에 상대적으로 검기를 제어하기 수월했다.

요하나는 강맹한 바스티안의 검격을 느끼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집중력이 치솟으며 요하나의 검이 난잡한 궤도를 그려냈다.

카가가각!!!

확실히 바스티안의 검기에 비해 요하나의 검기는 불안정했다.

낙차 큰 검식의 변화를 마나의 기류가 바로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허나 요하나는 마나의 기류를 억지로 꺾어대며 검기를 유지시켰다.

압도적인 마나 감응력이 범인은 구현 못할 기예를 실현시킨다.

아직은 에너지 효율이 좋지 못했지만, 요하나의 재능을 감안하면 몇 년 안에 해결될 문제였다.

카앙!!!!!

정면에서의 충돌과 함께 서로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치를 주고받던 둘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어디까지나 대련이었기에, 검기까지 뽑아들고 사용할 수 있는 검술엔 한계가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대련을 멈춘 바스티안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검기를 발현한 대련에선 바스티안이 분명 우위를 점했다.

허나 이건 서로 손대중을 한 대련이었다.

요하나의 검술은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훨씬 위협적이었다.

서로 목숨을 노리고 붙었다면, 솔직히 무조건 승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이 안 들었다.

만약 이겼다고 해도 치명상은 하나 허용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요하나가 가르침에 감사하며 꾸벅 인사했다.

바스티안은 미처 요하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못하고 가만히 요하나를 쳐다봤다.

어느새 연무장을 둘러싼 인원은 더욱 늘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역시나 요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하나는 무섭게 집중된 이목을 느끼며 머쓱하게 웃었다.

요하나는 자기가 또래에 비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문제는 요하나가 비교 대상을 레이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레이는 이거 9살 때부터 다 하던데...'

9살 때부터 검기 뽑아내는 미친놈이 옆에 있었으니 자기 객관화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레이는 요하나에게 항상 '너 정도 되는 인재는 세상에 널렸다. 촌구석에서 좀 잘나간다고 만족하지 마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 탓에 요하나는 스스로를 좀 낮춰보게 됐다.

물론 그건 요하나의 착각이었다.

요하나는 명백한 천재였고,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레이보다도 몇몇 부분에서 뛰어났다.

검술의 완성도와 실전 감각 측면에선 레이가 한참 앞서 있었지만, 레이는 요하나처럼 일방적으로 상대의 흐름을 잘라먹으며 농락하진 못했다.

요하나가 슬그머니 레이를 돌아봤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레이는 혼자 박수를 쫙쫙 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부끄러워진 요하나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레이는 요하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신나서 하무스와 빅토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야, 다 죽어가는 걸 주워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컸다. 내가 다 뿌듯하네."

"...?"

하무스와 빅토르가 의아한 얼굴로 레이를 돌아봤다.

"너 쟤랑 동갑 아니었냐?"

"아마 그럴 걸?"

"근데 너가 쟤를 언제 주워왔다는 거야?"

타당한 의문에 레이가 답해주었다.

"6살 때 겨울이었나? 길거리에 혼자 나앉아서 얼어 죽어가던 걸 업어서 옮겼던 것 같은데."

"..."

"옮기다가 케냐네 패거리랑 마주쳐서 시비 붙어가지고 한바탕할 뻔했지. 아이 그 씹새끼들, 워낙 악질인 새끼들이라서 지미랑 백작님 도움받아서 6개월 뒤에 파묻어버렸어."

"그...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냐?"

하무스와 빅토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웬만한 새끼가 저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허세 취급했을 텐데 레이가 이리 말하니 어째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레이가 흐뭇한 미소를 품은 채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어쨌든 그렇게 고생하며 업어 키워놨더니 사춘기 와서 나보고 꼬맹이라고 놀리고... 꼬추 작냐고 시비 걸고..."

레이의 미소에 금이 갔다.

"아오 씨, 저 배은망덕한 년."

"..."

하무스와 빅토르는 레이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한편 요하나는 인기가 폭발하는 중이었다.

여러 가문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넉살 좋게 젠킨슨에게 말을 걸어왔다.

훌륭한 인재를 거둔 것을 축하한다니,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니, 필립스 백작가에 큰 행운이 찾아왔다니, 그런 입 바른 칭찬을 입에 담았다.

물론 그들 모두의 눈동자에서 욕망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요하나는 탐을 낼 가치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요하나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 변방의 영락한 귀족가라면 더욱더 흑심이 동할 것이다.

젠킨슨은 그들의 탐욕을 모른 체하며 요령 있게 대화를 주도했다.

이 기회에 요하나에게 가르침을 내려주면 감사하겠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젠킨슨 덕분에 요하나는 오시리스 백작가 말고도 다른 가문의 검을 견식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각기 다른 가문에서 나온 기사들과 요하나는 세 번 더 대련을 진행했다.

생소한 검술에 요하나는 잠깐 헤매고는 했지만, 곧 상대의 흐름을 파쇄하며 빠르게 우위를 점했다.

대련이 진행되는 동안 연무장에 점점 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무역과 관련해 오시리스 가에 머물고 있던 귀족 가문의 관계자들 다수가 요하나의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총 4번의 대련이 마무리되었을 때 요하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비틀댔다.

제대로 된 기사들과 연속해서 대련을 펼친지라 체력 소모가 굉장히 컸다.

젠킨슨이 정말정말 잘했다고 요하나를 칭찬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과분한 인재를 지키기 위해 고생이 많은 것 같군."

젠킨슨이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시선은 요하나의 검을 향해 있었다.

"종자가 모시는 기사는 평범한 철검을 쓰는데... 정작 기사의 종자가 제플린의 X 시리즈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상황을 알만 하군."

분수에 맞지도 않는 인재를 지키기 위해 분수에 맞지도 않는 물건까지 아등바등 구해가며 고생이구나.

뭐 그런 소리를 남자는 하고 있었다.

연무장의 있던 다른 이들도 그제야 요하나의 검이 대단한 명품임을 알아봤다.

요하나의 검에 비해 젠킨슨의 검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종자가 기사보다 월등히 좋은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기 시작하자 하무스와 빅토르의 시선이 슬그머니 레이에게 돌아갔다.

하무스와 빅토르는 저 검을 누가 어떻게 구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봤으니까.

분명 제플린이 손해를 감수하고 레이 보고 쓰라고 던져준 검이다.

그걸 또 레이는 요하나에게 넘겨 버렸고.

하무스와 빅토르가 이 새끼 또 예전처럼 사고 치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는데, 정작 레이는 대단히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목이 좋은 양반이네. 검집도 갈아 끼웠는데 한눈에 검의 정체도 알아보고."

레이가 검을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를 천천히 살폈다.

풍채가 좋은 남자였는데, 옷차림이나 발걸음에서 귀족 특유의 위엄과 기품이 느껴졌다.

레이는 요하나가 실력을 제대로 드러냈을 때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이라 알고 있었다.

오늘 일을 통해 요하나는 나름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명성이, 추후 요하나가 더 큰물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요하나라는 인재를 욕심낼 터다. 그건 필연이었다.

허나 그게 무서워 요하나를 안으로만 싸매면 발전할 기회를 잃게 된다.

레이는 백작에게 허가를 받고 오늘과 같은 자리를 만들었다.

약간의 위험은 있겠지만, 이 모든 게 필립스 백작가의 위명을 올려주고 요하나가 더 높게 발전할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때문에 레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에게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저 남자가 필립스 백작가처럼 힘없는 귀족가에 묶여 있는 요하나를 가지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만 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었다.

레이가 하무스에게 물었다.

"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신 분은 누구야? 귀족 같으신데."

"어... 보니까 마티아스 후작가의..."

"잠깐."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린 레이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마, 티, 아, 스 후작가?"

"어, 마티아스 후작가의..."

"저런 개씨발 새...!!!"

"?!"

하무스가 다급히 레이의 입을 가리고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레이는 하무스의 건장한 체구에 덮인 채 발작했다.

"저 시발놈이 지금 누구 고아를 탐내는...!!!"

"야! 안 닥쳐? 갑자기 왜 이래...!!"

빅토르까지 합세해 레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레이가 눈이 반쯤 돌아간 채 으르릉거렸다.

"저 새끼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버릴...!!!"

"제발 닥치라고...!!"

남자 셋이 갑자기 투닥거리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하자 연무장에 모였던 자들이 퍽 한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최근 서임을 받은 막내놈이 갑자기 미쳤나 싶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하무스와 빅토르는 간신히 레이를 뜯어말린 후 레이를 연무장 밖으로 끌고 갔다.

"대체 갑자기 왜 지랄인데?!"

하무스가 울분에 차서 물었다.

방금 일 때문에 선배 기사들에게 얼마나 갈굼을 받을지 감이 안 잡혔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 미안."

레이가 급발진에 관해 솔직히 사과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인간이 '내 사람'을 탐내자 순간 눈이 좀 돌아갔다.

마티아스 후작가.

레이의 생물학적 애비가 배경으로 두고 있던 귀족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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