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리스 (3)
115화
마탑으로의 유학과 다르게, 알레시아는 오시리스 백작령에 간다고 대단한 채비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필립스 백작령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지역에 나들이를 갔다 오는 일이었기에 사용인들도 소수만 동행하기로 했다.
호위로 스콰이어 탈을 쓴 그래듀에이트까지 붙어 있으니, 백작도 큰 걱정 없이 마차를 준비해주었다.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출발하기 전.
레이는 잠깐 마중을 나온 지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과거의 사건 때문에 레이는 자리를 비울 때마다 벨라의 안전이 걱정됐으나, 이제는 안심할 수 있었다.
레이가 없더라도 백작령을 지키는 그래듀에이트만 둘이다. 거기다 고위 정령을 다루는 루나까지 유사시 합세할 터다.
마음이 참 든든했다.
레이가 세상 흐뭇한 얼굴로 지미를 바라봤다.
"우리 성능 좋고 가성비 좋은 터렛..."
"..."
지미는 레이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빠져서 레이를 노려봤다.
부자(父子)의 눈싸움이 진행되는 와중에 레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잠시 사라진다는 게 그리 서러울 수가 없었다.
"빼애애액!!"
"하하."
레이가 질질 짜는 레아를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한 보육원 애들이 질질 짜는 시기가 지나가자 이제는 새로 생긴 동생이 질질 짜고 있었다.
레이가 레아의 등을 토닥여주다 일으켜 세웠다.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심심하면 아빠한테 놀아달라고 하고."
"아빠 없어. 옆에 없어. 불러도 안 와!"
레아가 불만을 토로했다.
지미야 본업이 바쁘니 집에 자주 들리지는 못했다.
허나 지미는 지미 나름대로 대단히 성실하게 아빠 노릇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레아가 지미의 친자식도 아닌 것을 감안하면, 지미는 레아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나이 어린 레아가 거기까지 지미의 사정을 이해해줄 수는 없었다.
레아는 지미가 만날 옆에 있어주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찡찡댔다.
그러자 레이가 레아의 손을 붙잡아 레아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아이고~ 동생! 아빠가 옆에 없긴 왜 없어?"
"아빠 옆에 없어!"
"자자, 가슴에 손대보니까 어때?"
"가슴? 쿵쿵, 쿵쿵해!"
"쿵쿵하지? 레아 아빠는 여기 있어요."
일련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지미의 표정이 급격히 얼어붙었다.
레아는 레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가 여기 있어?"
"레아 아빠는 여기서 레아를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
"아빠는 저기 있어!"
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미를 가리켰다.
마침 레아에게 다가온 지미가 레아를 안아 올리며 레이를 걷어찼다.
"크억!"
레이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땅을 굴렀다.
한참 동안 굴러가는 레이를 보며 레아가 꺅꺅 웃으며 좋아했다.
지미가 레아를 천천히 흔들어주며 짐짓 화난 얼굴을 했다.
"우리 딸, 아빠가 나쁜 사람이랑 얘기하면 안 된다고 했지?"
"오빠 나쁜 사람이야?"
"엄청 나쁜 사람이지."
"오빠 나쁜 사람이야!"
레아가 신나서 몸을 바둥댔다.
지미는 익숙하게 레아를 달랜 후 과자를 사준다고 낚아서 레아를 데려갔다.
레아가 마차로부터 멀어지면서 두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레이 또한 레아를 향해 팔을 흔들어주곤 한숨을 푹 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들 상대하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레아를 떠나보낸 후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는데 이번엔 카렌과 루나가 찾아왔다.
루나가 다짜고짜 레이의 팔목을 붙잡으며 마법을 전개하려 했다.
레이는 당연히 기겁했다.
"야이 씨! 이거 또 추적 마법이지!"
"..."
루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는 잠깐 이웃 영지를 다녀오는 것뿐이라고 거듭 루나에게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필렌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레이는 루나가 로필렌에게 나쁜 물이 들었다고 툴툴대며 간신이 루나의 추적 마법에서 벗어났다.
"카렌, 그럼 다녀올게."
"응! 레이도 몸 조심하고, 빨리 돌아와!"
마지막으로 카렌과 인사를 한 레이가 마차에 올라탔다.
잠시 뒤, 알레시아까지 탑승한 마차가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은 평온했다.
요하나는 어색하게 말을 몰면서도 신이 난 얼굴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레이는 마차 창문으로 요하나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의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필립스 백작령보다 큰 무대가 필요했다.
특히 요하나의 엄청난 재능을 꽃피워주기 위해선 좀 더 많은 검술과 전투를 경험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요하나는 수많은 검을 토대 삼아 자신만의 검을 찾아갈 것이다. 요하나는 그럴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났다.
'좀 까다롭군.'
요하나와 루나를 아예 밖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둘 모두 가진 재능에 비해 배경이 너무나 부족했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두기엔 불안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기껏 키워놓은 인재들을 남이 낚아채서 멋대로 이용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레이는 턱을 괸 채 이런저런 방법들을 떠올려 보았다.
요하나는 강렬한 레이의 시선을 느끼고 홀로 머쓱해하며 괜히 안장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때 알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레이, 상단주가 지닌 정령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냐?"
"상황을 좀 봐서요."
사실 무시하고 지나칠 확률이 월등히 높긴 했다.
알레시아는 마차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누워있는 펜리르를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세상엔 나쁜 정령들이 참 많구나."
"음, 알레시아 님... 세상에 나쁜 정령은 없어요."
레이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펜리르를 향한다.
"덜 처맞은 정령이 있을 뿐이죠."
[낑낑!]
펜리르가 괜히 앓는 소리를 내며 알레시아에게 몸을 비볐다.
알레시아는 펜리르가 애교를 떤다고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
알레시아의 일행은 별 문제 없이 오시리스 백작령의 영주성에 도착했다.
오시리스 백작이 직접 나와 알레시아를 환대했다.
알레시아는 시종에게 머물 곳을 안내 받은 후,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 오시리스 백작과 화담을 나누었다.
레이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오시리스 백작은 꽤나 노골적으로 오시리스 백작령의 세를 자랑했다.
자랑을 듣는 입장에서 유쾌하진 않았지만, 귀족치고는 무난한 언사였다.
"상단주는 지금 왕국에 가 있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며칠 걸릴걸세."
오시리스 백작은 본격적인 이야기는 상단주가 백작령에 도착한 다음 나누자고 하며, 그때까지 편히 지내라고 당부했다.
하루를 조용히 보낸 레이는 다음날 오시리스 백작가의 공개 연무장을 찾았다.
젠킨슨과 요하나 또한 레이를 따라 연무장에 들렀다.
오시리스 백작가의 공개 연무장은 검을 나누는 연무장이라기엔 지나치게 공들여 꾸며져 있었다.
"아이고, 뭔 조각상을 이런데다 세워놨어? 칼 맞으면 어쩌려고."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물론 이런 사치를 부려놓은 것이 이해는 됐다.
오시리스 백작가 영주성엔 무역과 연관된 귀족 혹은 젠트리 계층이 자주 찾아왔다.
그들에게 보일 공개 연무장이니,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연무장에선 외부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이는 다른 이들은 신경도 안 쓰고 익숙한 얼굴에게 손을 흔들었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반갑게 레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야, 오랜만이네."
"키도 좀 컸는데?"
레이가 입 꼬리를 올린 채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레이가 하무스를 향해 낄낄댔다.
"서임을 받았다고? 그럼 이제 정식으로 기사가 된 거야?"
"그렇지."
"아이고, 기사님을 몰라뵈었네. 하무스 경이라고 불러드리면 됩니까?"
"놀리지 마라."
하무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레이에게 따졌다.
"그러는 너는 왜 아직 스콰이어 신분이냐?"
"실력이 모자라서."
"너희 영지는 검강은 뽑아야 기사 서임을 해주냐?"
하무스의 일침에 레이가 낄낄대다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근데 아벤시오 경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셔?"
아벤시오는 마탑에서 귀환하는 길에 벌어진 전투에서 팔과 다리를 하니씩 잃었다.
하무스가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명예롭게 은퇴하시고 가문에서 요양 중이셔. 백작님께서는 아벤시오 경의 공로를 높이 사 봉토를 하사하셨어."
"그래도 다행이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무장 반대편을 바라봤다.
젠킨슨이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기사들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권세에 따라 목이 꽤 빳빳해지고는 했다.
헌데 오늘따라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목에서 힘을 뺀 채 젠킨슨을 환대해주고 있었다.
레이의 시선을 눈치 챈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어. 필립스 가의 기사님들 또한 고결한 정신과 훌륭한 실력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알레시아와 마탑에 동행했던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과 스콰이어는 증언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결코 폄하 당할 수준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오시리스 가 기사들이 젠킨슨에게 나름의 존중을 담아 대하는 것도 그때의 증언 때문이었다.
낮잡아 보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과거보다는 훨씬 나은 대접이었다.
젠킨슨은 인사를 끝낸 후 요하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오시리스 가 기사들이 다들 흥미로운 얼굴로 요하나를 바라봤다.
요하나는 이 근방에서만큼은 꽤 유명한 존재였다.
육체적 차이와 사회적 인식 탓에 여성 기사가 굉장히 드문 세상에서, 요하나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은 필립스 백작령에 검술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처음엔 헛소문으로 취급했다.
사실 지금 요하나를 눈앞에 두고도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물론 요하나와 직접 검을 나눠봤던 하무스는 그 소식이 헛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요하나는 과거 13살의 나이로 19살의 하무스와 동수를 이뤘다.
그리고 과거 레이는, 19살의 하무스를 압도적으로 가지고 놀았다.
하무스가 눈살을 찌푸린 채 레이에게 물었다.
"요하나라고 했지? 쟤는 왜 아직 스콰이어 흉내를 내고 있는데?"
"쟤 엑스퍼트에 오른 지 반년 조금 더 됐어. 아직은 좀 더 기초를 갈고 닦아야지."
"...아, 그러셔?"
반 년은 무슨.
하무스와 빅토르는 당연히 레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따지고 들지는 않고, 그냥 속아주기로 했다.
마침 요하나가 검을 뽑았다.
요하나는 미리 배워둔 예법에 따라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껄껄 웃으며 기꺼워했다.
요하나처럼 파릇파릇하고 건강미 넘치는 소녀와 진지하게 검을 맞댈 기회는 오시리스 가 기사들에게도 처음이었다.
소문의 진위 여부도 판별할 겸, 기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검을 뽑았다.
"얕보다간 곤란해지실 텐데."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요하나의 검을 직접 보았던 하무스와 빅토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요하나의 검은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적인 검술과 그 성격이 많이 달랐다.
하무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바스티안 경께선 노련한 기사시니, 조금 당황하시더라도 잘 대처하실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망신 당하실 것 같잖아."
레이가 농담 삼아 그리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