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리스 (2)
114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치한 로필렌이 입을 열었다.
레이는 로필렌의 이야기를 듣고서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돈 몇 푼 때문에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어?"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로필렌이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레이는 로필렌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래? 그럼... 만나봐서 나쁠 건 없겠네."
로필렌과의 대화를 끝낸 레이가 루나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했다.
"루나,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먼저 돌아가 봐도 될까?"
"..."
루나는 가만히 레이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카락을 쓱쓱 넘겨주고선 로필렌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루나는 레이가 떠난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그늘 아래서 다시 마법서를 펼쳤다.
칼가가 열심히 백작령 아이들을 허공에 띄워 물속에 빠트려주기를 반복했다.
*
요 근래 번뇌에 든 요하나는 자주 밤잠을 설쳤다.
이른 시간에 자리에 누워도 자꾸만 요상한 꿈을 꿔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결국 요하나는 자신의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을 찾아갔다.
"언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과거 라일락의 저녁에서 근무했던 리사가 요하나를 바라보며 썩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요하나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얼굴을 붉혀대니 호기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괜히 자기 머리를 긁적이던 요하나가 용기를 내서 두 손을 서로 마주 보게 만들었다.
"이, 이 정도면 큰 편이에요...?"
"..."
대단히 앞뒤 없는 질문에 리사가 잠깐 침묵했다.
요하나가 어설픈 변명을 덧붙였다.
"제, 제가 잘 몰라서..."
"어..."
리사는 눈치껏 요하나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게 그러니까... 그거 말하는 거지?"
"네! 그, 그거 말하는 거 맞아요."
이런 질문을 하려고 자기를 찾아왔다는 게 꽤나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리사는 그저 깔깔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아하하! 하긴 남자 여럿 후린 게 아니면 모를 만하지."
누군가 평균을 통계 내주는 것도 아니고, 사내새끼들 허세만 들어보면 죄다 팔뚝만한 걸 들고 다니니, 결국 신빙성 있는 통계를 얻기 위해선 리사 같은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야 했다.
"우리 요하나도 드디어 남자한테 관심이 생겼구나!"
리사가 계속해서 웃어대자 요하나가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인 채 엉덩이를 들썩였다.
충분하리만치 요하나를 놀린 리사가 턱을 괸 채 요하나의 양손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굵기는 아닐 테고."
만약 저런 굵기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행할 터다.
받아줄 상대가 없을 테니.
"음... 길이지?"
"..."
요하나가 무지하게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는 간신히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며 품평을 시작했다.
"절대 작은 편은 아니지? 그 정도면... 음... 꽤나 훌륭한 축에 속하지."
"저, 정말요?"
며칠 동안 끙끙 앓았던 문제의 답을 얻어낸 요하나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말아쥐었다.
음, 음, 역시 작은 편은 아니었구나.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실실 웃던 요하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여기서 얼마나 더 커져요?"
"어라, 그게 커지기 전이었어?"
"네."
"오우."
무심코 감탄을 흘린 리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건 사람마다 워낙 달라서 답을 못 주겠네. 별 차이 안 나는 경우도 많거든. 그래도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는 더 커질걸?"
"손가락..."
요하나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양 손 사이의 거리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벌렸다.
고작 한 마디 차이인데 그 위용이 꽤나 달랐다.
요하나가 두 손을 슬그머니 세로로 세워 배 위에 가져다 대보려던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하나 누나! 여기 있어?"
데런의 목소리였다.
요하나가 리사의 양해를 받고 문을 열어주었다.
데런이 리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요하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사님이 찾으셔."
"응? 그래?"
부르면 곧장 달려가야 하는 게 종자의 일이었다.
궁금한 것도 풀렸겠다, 요하나는 리사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리사의 집에서 달려나왔다.
'음, 음, 거기서 손가락 한두 마디 더.'
새롭게 찾아오는 번뇌에 요하나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로필렌은 영주성에 들려 필립스 백작에게 예의를 갖춰 복귀를 알렸다.
이후 로필렌은 레이와 함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조금 뒤 응접실을 찾은 필립스 백작이 상석에 앉자 로필렌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시리스 백작령.
오시리스 백작령은 영지 일부가 해안과 맞닿아 있기에, 그곳에 항구를 건설해 루비하 왕국과의 무역을 중개하며 영지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로 삼았다.
몇년 전 제국과 루비하 왕국의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오시리스 백작령은 상당한 출혈을 감당해야 했다.
다행히 근래 들어 제국과 루비하 왕국의 갈등이 완화되며 오시리스 백작령도 회복세에 들어섰다.
"오시리스 백작이 넌지시 부탁하더군요. 필립스 백작님의 의중을 알아봐 달라고."
"의중이라면?"
"심각한 사안은 아닙니다."
로필렌이 백작의 긴장을 풀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오시리스 백작과 자주 거래하는 왕국의 상단이 하나 있습니다."
해당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는 젠트리 출신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수완이 좋아서 전망이 꽤 밝은 상인이라 했다.
"근데 그 상인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문제라면?"
"어린 나이에 정령과 계약을 잘못 맺어 고생을 좀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플로리아와 유사한 케이스였는데, 정령과 계약을 잘못해 고생하는 경우는 은근히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멀쩡히 상인 노릇을 하는 걸 보면 과거의 플로리아처럼 상황이 심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령의 존재가 꽤 거슬릴 것임은 분명했다.
필립스 백작은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했다.
오시리스 백작은 알레시아가 정령과의 계약을 조율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알레시아의 도움을 받아 상단주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꽤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필립스 백작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상단주 문제를 해결해주면 오시리스 백작도 섭섭하지 않게 필립스 백작에게 성의를 표할 것이다.
오시리스 백작은 위세를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어, 괜히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입 닦을 위인은 아니었다.
허나.
사실 플로리아의 정령 문제를 해결해준 건 알레시아가 아닌 레이였다.
필립스 백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금전적 이익을 얻자고 레이가 지닌 기이한 능력이 외부로 드러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물론 레이와 로필렌의 생각 또한 백작과 같았다.
다만 이번 이야기에 변수가 한 가지 끼어 있었다.
"상단주가 타라니스 가문 출신이라 합니다."
"타라니스...?"
생소하게 들리는 가문 이름에 백작이 의아함을 표했다.
그때 레이가 입을 열었다.
"1황자의 타락에 관여했다고 추측되는 루비하 왕국 레인저의 단장이 타라니스 가문 사람이었어요."
"흠..."
침음을 흘린 백작이 레이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기회가 왔을 때 상단주와 한 번 접촉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는 타라니스 가문 출신의 상단주가 반드시 악마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었다.
만약 그 상단주가 악마의 힘을 깊게 받아들이기라도 했고, 레이가 상대의 타락을 눈치챌 수 있다면 미리부터 위험에 대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번 접촉으로 타라니스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성과였다.
백작이 잠시 고민하다 레이의 의견에 동의했다.
기회가 온 김에 가볍게 탐색이나 하겠다는 소리니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정령에 관한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상황을 봐 가며 대처하겠습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상단주의 정령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정령의 계약 조율에 실패했다고 통보하고 떠나면 될 일이다.
계약 조율을 위해 노력하는 흉내 정도는 알레시아가 내야겠지만 말이다.
백작이 결정을 내렸다.
"알겠네. 오시리스 백작령에 방문할 수 있도록 연락을 넣어놓겠네."
어차피 필립스 백작령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영지다.
영지의 크기가 필립스 백작령보다 훨씬 넓긴 했지만 그래 봤자 며칠이면 횡단 가능한 넓이였다.
과거에도 알레시아가 간간이 오시리스 백작령을 방문하고는 했으니, 오랜만에 오시리스 백작령을 찾아간다 해도 유난떨 일은 아니었다.
"기사 둘에게 알레시아의 호위를 맡기겠네."
레이도 같이 가야 하니 기사 둘 중 하나는 젠킨슨이었다.
"...젠킨슨 경과 디디에 경에게 임무를 맡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백작이 덤덤하게 답했다.
"필립스 백작령에서보다 더욱 신중하게 움직이게."
"주의하겠습니다."
다짜고짜 칼질해놓고 수습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설령 상단주가 악마의 하수인이라 해도 처리하기 위해선 대단히 신중해야 했다.
레이에게 확답을 받은 백작이 알레시아와 기사들을 불렀다.
*
백작의 이야기를 들은 알레시아가 화색했다.
이런저런 주의할 게 있었지만 결국 오시리스 백작령에 잠깐 나들이를 다녀오는 일이었다.
알레시아는 기회가 되다면, 오랜만에 바다를 구경하고 싶었다.
짠맛 나는 바람에 휩싸여 위아래로 너울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은 꽤나 낭만적인 체험이었다.
알레시아는 백작에게 설명을 모두 들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응접실을 나왔다.
마침 레이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알레시아는 레이를 데리고 정원을 걸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기사여, 이야기는 들었도다."
"네, 오시리스 백작령에 잠깐 다녀..."
"나의 기사가 생식 능력에 하자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구나아..."
"크흡!"
레이가 침을 잘못 삼킨 탓에 사레가 들어 연거푸 기침을 토해냈다.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킨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단언했다.
"그거 헛소문입니다. 제 거기에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필립스 백작가의 적통한 후계인 알레시아는 아이를 둘 수 있는 배우자가 필요했다.
알레시아가 근심을 버리고 환히 웃었다.
"약재를 알아보기 위해 황도에 사람이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했도다."
"그것참 큰일 날 뻔 했군요..."
필립스 백작가의 스콰이어가 고자라는 소문이 아주 황도까지 퍼질 뻔했다.
레이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랜만에 플로리아도 보겠군요."
"플로리아도 요즘 고민이 많다고 하더구나."
"왜요?"
"과거의 소문이 발목을 잡아 수준 맞는 배우자를 찾기 어렵다고 하더구나. 이제 플로리아도 과년한 나이가 되었지 않았느냐."
사실 플로리아야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고 있고, 속앓이를 하는 건 오시리스 백작이라고 알레시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으음, 레이."
알레시아가 레이의 팔목을 잡아오며 슬며시 몸을 붙였다.
나도 이제 혼인을 치를 나이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가 담긴 항의였다.
레이는 알레시아를 가만히 내려봤다.
솔직히 레이는, 알레시아가 귀엽긴 귀여웠지만, 어째 영...
'여자로 안 보이는데...'
레이가 알레시아를 여자로 대하기엔 알레시아가 주접을 떨어놓은 업보가...
너무 많았다.
정말 너무 많았다.
요즘 들어 비교적 얌전해지긴 했지만 과거란 쉬이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음... 알레시아 님."
"왜 부르느냐?"
"...아닙니다."
레이는 말없이 알레시아와 어울려 정원을 걸었다.
알레시아가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출발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알레시아의 호위 임무를 젠킨슨과 디디에가 맡게 됐고, 둘의 종자인 레이와 요하나가 동행하게 되었다.
대외적인 오시리스 백작령 방문 목적은 단순 교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