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3화 (113/446)

오시리스 (1)

113화

지미가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르고 일주일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경지의 상승 탓에 이리저리 헤매던 지미는 시간이 흐르며 점차 안정적으로 검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미는 검강을 결함 없이 구현할 수 있게 되자 곧장 백작에게 불려 가 검강의 시범을 보여야 했다.

시범을 진행하게 된 당일 날.

시범을 보이게 될 장소인 영주성 수련실로 백작을 비롯해 백작가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기사들은 지미의 경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했다.

레이도 슬그머니 기사들의 꽁무니를 따라 수련실로 들어왔다.

모하메드가 지미의 검강을 받아주기 위해 수련실 중앙에서 지미와 마주 섰다.

모두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지미가 차분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스릉!

"후우..."

호흡을 고른 지미가 천천히 검을 횡으로 움직였다.

흐름이 검을 이끌고 검이 흐름을 만든다.

흐름과 동화된 마나가 검 위를 잔잔히 흐르다 서로 융화됐다.

우웅-

지미의 검강은 일반적인 그래듀에이트가 자아내는 검강과는 그 성질이 판이했다.

대개의 검강은 서로 다른 강맹한 마나의 기류를 응집시켜 작열하는 예기를 뿜어낸다.

검술에 무지한 자라도 검강을 면전에서 접한다면 끔찍한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미의 검강은 달랐다.

폭발적으로 솟구치고 반발해야 할 마나의 기류가 하나의 강물처럼 평온하게 흐르고 있었다.

저것이 정말 검강이 맞는가?

모든 기사가 한 번씩 의구심을 품었다.

허나 검강을 발현한 모하메드의 검을 지미가 정면에서 받아내는 걸 보고 모두가 탄식을 흘렸다.

"맙소사."

젠킨슨은 자신이 백작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망각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솔직히, 기분이 유쾌하진 못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재능을 타고난 레이야 어렸을 때부터 워낙 비범했기에 한참 전에 실력이 역전당했어도 그러려니 했다.

아예 범접 못할 수준의 재능을 마주하니 도리에 질투 따위의 감정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허나 지미는 아니었다.

지미는 젠킨슨과 연배도 비슷했고, 거기다 검술 실력 자체는 한참 아래에 있었다.

타고난 자질은 지미가 젠킨슨보다 조금 나았지만 용병 활동을 하며 오랜 시간 익혔던 싸구려 검술이 지미의 발목을 잡았었다.

그렇기에 젠킨슨은 자신이 지미에게 추월당하리라곤 정말 상상해보지도 않았다.

"허어..."

열등감과 패배감.

젠킨슨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곱씹으며 검자루를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제어하고 싶다고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젠킨슨은 스스로가 안이했음을 자책하며 지금의 감정을 향상을 위한 연료로 삼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다른 기사들의 심정도 젠킨슨에 비해 썩 다르지는 않았다.

지미의 고결함을 인정했던 것과 별개로 기사들 중 지미에게 추월당하리라 예상했던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입맛이 썼다.

기사들은 세상 꿉꿉한 감정에 빠져 자신들의 정진이 부족했음을 되새겼다.

한편 모하메드는 모하메드 대로 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본래 검강끼리 충돌하면 서로를 잡아 뜯기 위해 난리가 나야 정상이다.

허나 모하메드와 지미의 검강이 맞붙는 순간 잔잔한 울림만이 공간을 메아리쳤다.

흡사 물웅덩이를 때린 것만 같은 감각이 모하메드의 손을 타고 흘렀다.

투웅! 투웅!

모하메드와 지미의 검격이 몇 번 더 허공에서 부딪쳤다.

대련이 아닌 검강의 시범이었기에, 모하메드와 지미는 서로 타이밍을 맞추어 허공에 검을 충돌시켰다.

만약 제대로 검을 나눴다면 모하메드에 비해 검술이 한참 미숙한 지미는 삽시간에 등을 내주었을 것이다.

허나 모하메드는 자신이 한참 우위라는 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떫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필립스 백작을 바라봤다.

필립스 백작 또한 모하메드와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자기 이마를 붙잡고 있었다.

백작이 귀족으로서 체통도 잊고 저리 이마를 붙잡고 있다는 건 어지간히 당황했음을 뜻했다.

모하메드는 백작의 감정을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게, 지미는 지금 필립스 가문의 비전 검술이라 할 수 있는 무아의 검강을 펼치고 있었다.

백작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결국 기사들 앞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필립스 가문의 비전 검술이라 해봐야 별거 없었다.

특별한 마나 정제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검술이 필립스 가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글귀 몇 개가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올 뿐이었다.

아집을 버려야 한다는 둥, 세속적인 고통에서 탈피해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둥, 그런 뜬구름 잡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글귀 말이다.

"...심적인 수행을 통해 무아의 경지에 닿아라."

그리하면 너의 검 또한 자연스레 흐름을 따를 것이다.

필립스 가의 일원으로서 마음가짐을 조언하는 글귀인 줄 알았더니, 사실 그게 진짜 비전이었다.

게다가 필립스 백작가의 일원도 아닌 외부인 출신의 지미가 아무 힌트도 없이 몇백 년 만에 필립스 가문의 비전 검술을 완성시켰다.

백작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시범을 중단하게."

백작의 명령에 모하메드와 지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백작이 한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용병 출신 암흑가 우두머리에게 비전 검술을 털렸다는 건 아무리 필립스 백작이라 해도 얼굴이 대단히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백작은 기사들 대부분을 돌려보낸 후 응접실로 가 지미와 마주보고 앉았다.

백작은 먼저 모하메드에게 물었다.

"모하메드 경, 지미의 검강을 직접 겪어본 감상이 어떤가?"

"위력이 특출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존재감이 옅고, 대단히 부드럽게 충격을 흡수하고 흘려냈습니다."

선대로부터 구전되어오는 무아의 검강이 지닌 특성과 일치했다.

백작이 두통을 느끼며 얼굴로 지미를 바라봤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을 축하하네."

"이 모든 게 백작님의 은덕 덕분입니다."

지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무릎을 꿇었다.

백작은 마냥 환히 웃지 못한 채 지미에게 물었다.

"지미, 혹시 백작령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듀에이트는 어딜 가서도 대단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그래듀에이트도 작위와 작은 봉토쯤은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었다.

이제와서 지미가 야망을 가진다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허나 지미는, 어딘가 해탈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백작령 밖으로 눈을 돌려 속세의 권력을 탐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찰나의 탐욕에 눈이 멀어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려..."

쓸데 없이 장황한 지미의 이야기를 레이가 끊었다.

"지미, 경지 올라서 신난 건 알겠는데 주접 좀 작작 떨어요."

"..."

지미의 눈동자가 레이를 돌아봤다.

해탈에 이르러 인애만이 가득한 지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윽...! 으극...!"

깨달음을 얻어 무아를 이뤘다고 자신했거늘 레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회오리치는 분노가 솟구쳐 가슴을 두들겼다..

"크, 크아악...!!"

"아빠? 어디 아파?"

레이가 레아의 말투를 흉내 내자 지미가 곧장 경기를 일으켰다.

"내가 아빠라고 부르지 말랬지!!"

"지미 맞네요. 난 영혼이라도 바뀐 줄 알았지."

거 아가리질 좀 그만 하고 집에 가서 딸내미(아님)나 돌보세요.

그딴 소리를 입에 담는 레이의 멱살을 몇 번 흔들어 재낀 지미가 결국 응접실에서 쫓겨났다.

백작이 평소와 같은 지미의 뒷모습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지미는 백작령 밖으로 떠나보내기엔 아는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필립스 백작령의 실제 전력부터 황족의 핏줄인 레아의 존재까지 지미는 전부 꿰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미는 필립스 가문의 비전 검술까지 혼자 완성해 버렸다.

이러고서 영지를 떠난다고 하면 백작으로선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지미는, 여전히 지미다웠다.

백작은 상념을 털어낸 후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가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소문을 하나 들었네."

이번엔 레이의 표정이 세상 떫어졌다.

백작 뒤에서 대기하던 모하메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레이는 오해를 더 사기 전에 자기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혹~시 이거 관한 소문이라면, 헛소문입니다. 전 아주 건강해요."

내 거시기는 주인 명령에 따라 재깍재깍 기립한다는, 레이가 그런 항변을 입에 담았지만 백작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대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검사이지 않은가?"

"그렇죠?"

"혈류 정도야 임의적으로 조작 가능할 터."

"..."

백작의 말이 맞았다.

검 위에 검강도 덧씌우는 그래듀에이트가 체내의 혈류에 간섭 못 할 리가 없다.

말인즉슨 그쪽에 피를 몰리게 하는 것도 피를 몰아내는 것도 손쉽게 가능하단 뜻이다.

결국 레이가 여자를 안 만나는 건, 그걸 못 세워서가 아니라 그냥 여자를 안 좋아해서 그렇다, 대략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대 혹시 남색(男色)에 흥미가..."

"아니 백작님!!"

되도 않는 오해에 레이가 빽 소리쳤다.

백작의 뒤에 서 있던 모하메드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지긋이 씹었다.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 여자 좋아해요."

"그거 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백작은 바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레아가 태어나고 별 문제 없이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3년은 백작의 가슴 속에 안이함을 꽃피우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레아의 정체를 정말 별 문제 없이 숨기고 살아갈 수 있겠다는, 그런 낙관이 툭툭 고개를 쳐들고는 했다.

백작은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하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모쪼록... 알레시아를 신경 써 주게."

아직 백작은 갈등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두 해만 평화롭게 지나간다면 백작은 더는 고민 않고 알레시아의 곁에 레이를 붙여주었을 것이다.

허나 일이 그렇게 순탄케 풀리지는 않았다.

*

날이 조금씩 더워졌다.

해가 점점 강해질 때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냇가를 찾아 물장구를 치곤 했다.

허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다수의 아이들이 빼곡히 냇가를 채우고 있었다.

백작령 아이들중 2할가량이 초대를 받고 냇가에 모였는데, 오늘은 다름 아닌 '칼가라이드'를 운영하는 날이었다.

"우아아아아악!!"

갑작스러에 허공에 훅 떠오른 아이가 허공을 미끄러져 내려가 냇가에 풍덩 빠졌다.

몸을 일으킨 아이가 깔깔 웃으며 냇가를 빠져나오자 다음 아이가 허공에 훅 떠올랐다.

"우아아아아악!!"

풍덩!

기대감에 부풀어 떠들어 대는 아이들을 레이가 그늘에 앉은 채 바라봤다.

그 옆에 루나가 앉아 조용히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레이는 작년에 백작령 아이들이 유희거리가 그다지 없어 심심해하는 걸 보고 루나의 도움을 받아 칼가라이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칼가라이드라 해도 별 거 없었다.

고위정령 칼가가 바람으로 아이들을 띄운 후 적당한 수위의 냇가에 빠뜨려주는 걸 반복하는 것 뿐이었다.

칼가는 투명화한 채로 루나의 옆에서 열심히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비록 투명화 상태이긴 하나 공간검과 해독 권능의 사용자인 레이의 눈에는 자괴감이 어린 칼가의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크르륵...]

칼가가 불만을 드러내려는 듯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레이가 슬그머니 검을 뽑아서 칼가 앞에서 흔들었다.

"꼬우면... 아시죠?"

[...]

칼가는 다시 충실하게 놀이기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백작가는 여러 사람과 합의 끝에 요하나와 루나의 실력을 부분적으로 외부에 드러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눈독을 들일 만한 '수재'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언젠가 루나와 요하나가 백작령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접하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를 대비한 안배였다.

때문에 백작령 아이들을 상대로 대놓고 칼가라이드 같은 것도 운영할 수 있었는데, 중급 정령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행위를 칼가에게 맡긴 것은 순전히 루나의 판단이었다.

어쨌든 변방 영지에 있기는 아까운 마법 수재 루나와 검술 수재 요하나의 이름은 알음알음 주변 영지에 퍼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신경 쓰는 사람은 적었지만.

"레이, 여기있었구나."

로필렌이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는 퍽 반갑다는 얼굴로 로필렌에게 인사했다.

로필렌은 '마법 교사'라는 위장 때문에 주기적으로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가서 플로리아에게 간단한 마법 교육을 진행하고 돌아오곤 했다.

이번에도 열흘 만의 귀환이었은데, 로필렌은 귀환 즉시 집에도 안 들리고 바로 이곳을 찾아온 듯 싶었다.

자리를 옮긴 레이가 눈짓하자 로필렌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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