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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1화 (111/446)

부전 (2)

111화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의 감각이라면 반경 몇 미터 안의 사람 심장박동 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레이의 감각을 벗어나 들키지 않고 방 안에 숨어 있을 수 있는 자는 백작령에서 극소수였다.

인기척을 숨겨야 하니 결계나 아티펙트를 사용했을 텐데, 그런 마법적인 기술을 사용하고도 주변 마나의 흐름을 들키지 않게 제어하려면 보통 실력으론 안 됐다.

"야이 씨...!"

레이가 욕설을 중얼거리던 찰나 소리가 들렸던 탁자가 옆으로 엎어졌다.

은폐장이 벗겨지고, 루나를 옆구리에 낀 카렌이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향해 도망쳤다.

곧장 창문을 열어 재낀 카렌이 루나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낙하했다.

바람 정령 덕분인지 푹신하게 지면에 착지한 카렌이 루나를 데리고 골목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꼴을 전부 지켜본 레이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라 형욯하기 힘든 참담함에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레이에게 지미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야, 진짜 안 서냐?"

"잘 서요! 잘 선다고요! 아까 그건 당연히 농담이었죠!"

"쓰읍..."

지미가 의심의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턱을 매만졌다.

능력도 무지하게 대단한 놈이 짝도 없이 20년 가까이 생활하고 있으니 의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농담이었던 거 맞아...?"

"아니 지미!!"

의심 가득한 지미의 표정을 보고서야, 레이는 자기가 입을 좀 함부로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 진짜 멀쩡하다니까요!!"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아니 진짜 멀쩡하다고!"

지미 앞에서 바지를 내려 보여줄 수도 없었던 레이는 괜히 짜증만 냈다.

한편.

골목 사이로 후다닥 도망친 카렌과 루나는 얼마 안 가 요하나와 접촉했다.

요하나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카렌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 있었어?"

레이를 몰래 뒤쫓아보자는 카렌과 루나의 제안을 자존심 때문에 거절한 요하나였지만, 막상 둘이 허겁지겁 달려온 모습을 보니 궁금함이 치솟았다.

카렌이 달뜬 얼굴로 요하나에게 소리쳤다.

"레, 레이가...!!"

"레이가?"

"꼬, 꼬..."

"꼬?"

"..."

남 앞에서 꼬-가 안 선다는 얘기를 뱉기가 참 힘들었다.

부끄러움 탓에 말을 잇지 못하는 카렌을 대신하여, 루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레이가 발기가 잘 안 된대."

"레이가 발기가 안 돼?!"

입을 쩍 벌렸던 요하나가 이내 무언가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카렌이 그리 꼬셔도 안 넘어오더라."

카렌 뿐이랴.

카렌 만큼은 아니더라도 레이에게 가벼운 호감을 드러내는 여자는 넘쳐났다.

마음만 먹으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건 일도 아닐 텐데, 평소 레이는 여자와의 만남에 대단히 인색했다.

헌데 드디어 레이의 태도가 좀 이해됐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구나!'

그럼 카렌이 유혹해도 그리 목석처럼 굴만하지.

요하나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레이가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껄떡대지 않는 거야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건 또 거슬렸다.

요하나가 이리저리 표정을 바꾸는 사이 카렌이 소리쳤다.

"우, 우리 약 사러 가자!"

*

과일 장수였던 잭은 요즘 유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백작령에 들어오는 물자를 일부 검수한 후 여기저기 공급하고 있었는데, 중간 수수료가 꽤 짭짤했다.

잭에게 이런 일을 맡긴 건 지미였다.

물론 지미가 잭에게 유통업에 종사할 기회를 준 건 어디까지나 레이의 입김 덕분이었다.

덕분에 잭은 요즘 꽤 풍족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잭은 과거의 선행이 좋은 결과로 돌아왔음을 기뻐하며 잡화점을 청소했다.

유통되는 물자들을 조금씩 사들여 전시해놓는 가게인지라 다양한 물건이 있었다.

그때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가게를 울렸다.

"아, 아저씨!"

"...카렌?"

카렌을 비롯해 요하나와 루나까지, 이제는 여인 태가 나는 아이들이 우르르 가게로 들어왔다.

잭이 묘한 감정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셋 모두 레이가 주워온 아이들이었다.

레이가 다 죽어가는 걸 주워올 때만 해도 애들이 나중에 사람 구실은 할 수 있을까 의아했었다.

헌데 셋 모두 멀쩡히 자라서 이리 돌아다니는 걸 보니 기분이 참 새로웠다.

'그놈이 고생한 보람이 있네.'

내가 사과 주스를 나눠준 보람도 있고.

잭이 웃음을 머금은 채 카렌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냐?"

"나, 남자한테 좋은 거 주세요!"

"...?"

남자한테 좋은 거?

잭은 카렌이 원하는 게 자기가 지금 생각하는 게 맞나 싶어 혼란에 빠졌다.

그때 루나가 나서서 또박또박 원하는 걸 말했다.

"...발기부전 치료에 효과 있는 약재 있나요?"

"..."

자기 미간을 쓱쓱 매만진 잭이 어렵게 물었다.

"으음, 혹시 레이한테 어디 문제 있니?"

*

지미와 헤어진 레이는 레아를 데리고 벨라의 집으로 찾아갔다.

레아의 장난을 열심히 받아주며 집에 도착하니 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벨라가 돌아오지 않은 걸 깨닫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

저 멀리서 벨라가 다가오는 게 레이의 눈에 보였다.

지미 패밀리에 속한 단원 중 몇 명이 벨라 주변에서 벨라를 경호하고 있었다.

레이가 손가락으로 벨라를 가리키자, 레아가 금세 벨라를 발견하곤 와다다 뛰어갔다.

"엄마~!"

"우리 딸!"

뛰어온 레아를 벨라가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레이는 천천히 걸어가며 레아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벨라를 바라봤다.

벨라는 몇 년 전에 비해 확실히 나이 들어 보였으나, 그래도 과거보다 훨씬 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활짝 웃는 벨라를 바라볼 때마다 되새길 수 있었다.

레아는 벨라 품에 안긴 채 얼굴을 비비더니 이내 바둥거리며 딴소리를 했다.

"엄마! 과자! 과자 먹을래! 과자!"

"과자 많이 먹으면 살쪄요."

벨라는 타박을 하면서도 오는 길에 사왔던 달콤한 과자 하나를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레아는 꺅꺅 소리를 지르며 과자를 받아들고는 오득오득 씹기 시작했다.

벨라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랑 잘 놀았어?"

"오빠가 나 때찌했어! 레아가 아야했어!"

귀신 같이 발을 걸었던 일을 일러바치는 레아를 보며 레이가 콧잔등을 잡았다.

벨라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어머, 오빠가 왜 때찌했을까?"

"기? 강? 잡아야 해!"

"그래...?"

벨라가 묘한 얼굴로 레이와 레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사이 과자를 다 갉아 먹은 레아가 또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벨라는 레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 후 먼저 집으로 들여보냈다.

경호를 맡았던 지미 패밀리의 단원들도 물러나고, 집 앞에는 벨라와 레이 둘만 남게 되었다.

"아들!"

벨라가 두 팔을 벌리자 레이가 자연스레 다가가 안겼다.

이제는 레이가 벨라보다 키가 커서 벨라의 이마가 레이의 눈앞에 왔다.

벨라는 레이의 등을 쓰다듬어준 후 한 발 떨어져서 따뜻하게 웃었다.

"오늘 고생했어."

"고생은 뭘. 애 하는 거 보니까 엄마가 평소에 고생 많겠더만."

"음... 아들."

레이와 눈을 맞춘 벨라가 어렵사리 말했다.

"동생 너무 미워하지 말고."

"내가 동생을 미워할 게 뭐 있어? 애는 귀여워, 애는."

눈동자가 그 새끼랑 똑 닮아서 좀 껄끄러울 뿐이지.

속마음을 숨긴 채 웃는 레이의 뺨을 벨라가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계속 혼자 살 거야?"

"혼자 사는 게 편해. 나도 이제 어른이잖아."

레이가 벨라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이 많은 레이는 혼자 사는 게 확실히 편했다.

벨라는 믿음직한 아들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우리 아들 없었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았을까."

"..."

내가 없었으면 당신의 인생은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레이는 그런 마음을 삼키며 히히 웃었다.

이제라도 벨라가 자기 행복을 찾았음이, 레이에게는 참 다행이었다.

그런 측면에 있어 레아는 레이에게도 참 소중한 존재였다.

레이는 조금 더 벨라와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레이는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15분 거리에 있는 자기 집으로 걸어갔다.

이미 시간이 좀 늦었다.

카렌과 루나는 내일 타박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석양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소녀가 레이의 앞을 막아섰다.

"레, 레이!"

"야이 씨, 카렌."

레이가 짜증부터 냈다.

허나 카렌은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레이를 향해 다짜고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거! 선물이야!"

"...이게 뭔데?"

"그, 그..."

카렌이 뺨을 붉힌 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 남자한테 좋은 거래! 우, 우리 같이 힘내보자!"

레이가 고개를 쳐들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자기 갈 길 가는 데만 집중하는 레이라 해도 이딴 오해를 받으니 자존심에 쫙 금이 갔다.

"같이 힘내긴 뭘 같이 힘내...!!"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댄 레이가 지미에게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고 카렌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레이는 카렌을 쫓아온 루나와 요하나에게도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카렌, 내 아랫도리엔 아무 문제도 없어. 알겠지?"

레이는 해명을 하면서도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 시발.'

어릴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아가며 키웠던 애들한테 이딴 해명을 하고 있자니 자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문제는 카렌이 레이의 말을 안 믿었다는 것이다.

'거, 거짓말! 내가 그렇게 애썼는데 한 번도 안 돌아봤잖아!'

카렌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속으로 불평했다.

'나, 나 정도면! 예쁘고! 가슴도 많이 커졌고! 검술 단련 열심히 해서 몸도 탄탄하고! 레이만 나한테 관심 없었어!'

카렌은 실제로 인기가 대단히 많았다.

카렌은 자기가 나름 매력적이라는 걸 알고서 레이에게 열심히 치근댔지만 레이는 항상 카렌을 아이 다루듯 했다.

덕분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는데, 이제야 레이의 반응이 확실히 이해됐다.

"레, 레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잘해줄게!"

"아니 나 멀쩡하다고!! 힘이 넘쳐! 아침마다!"

계속해서 항변하는 레이에게 카렌이 허리를 배배 꼬며 어색하게 몸을 붙였다.

레이의 팔에 슬그머니 상체를 가져다 댄 카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럼 즈, 증명해보든가... 나한테..."

"아니 카렌!!"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카렌의 뺨을 움켜쥐었다.

"내가 너한테 증명하긴 뭘 증명해!"

"아으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레이의 반응에 카렌이 억울한 눈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그때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레이와 카렌을 지켜보던 요하나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어딘가 빈정거림이 가득 느껴지는 요하나의 웃음에 레이의 고개가 슬며시 돌아갔다.

레이와 눈이 마주친 요하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도발적으로 물었다.

"흐흥, 쪼, 쫄려?"

"?"

"자, 자신 없나봐?"

어떡해. 거기가 쪼끄만해서 남한테 보여주기 창피한가 봐.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대단히 꼴받은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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