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 (3)
109화
레이는 대단히 죽을 맛이었다.
정령이란 게 보기보다 무게가 덜 나가긴 하지만, 칼가는 덩치가 집채만 한 정령인지라 아래 깔려 있으니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레이가 칼가와 함께 바둥거리고 있으니 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슬그머니 다가와 무릎을 구부렸다.
"많이 무거워?"
"그럼 가볍겠냐악!"
반사적으로 요하나에게 쏘아붙인 레이가 끙끙거리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무지하게 무거우니까 나 좀 여기서 벗어나게 도와줄래?"
"흠... 싫은데?"
요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의 표정이 대번 떫어졌다.
허나 요하나는 멀쩡한 레이가 무서웠지 칼가에 깔려 있는 레이는 무섭지 않았다.
요하나가 거리낌 없이 레이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에잇, 에잇."
요하나의 손가락이 레이의 뺨을 쿡쿡 찔렀다.
육체적인 싸움엔 일방적으로 레이에게 당하기만 했던 요하나인지라, 멋대로 레이의 얼굴을 가지고 놀아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즐거웠다.
레이는 평소 자신이 했던 괴롭힘을 고스란히 돌려받다가 결국 이 사태의 주범을 불렀다.
"루나!! 나 좀 그만 풀어줘!! 나 진짜 죽겠다!! 아그그극...!!"
레이가 계속해서 엄살을 떨어대자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 사이로 마침내 로브를 뒤집어쓴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져 가는 석양의 역광을 받아내며 등장한 루나는 꽤나 흑막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루나가 나타난 걸 확인한 요하나가 눈치껏 뒤로 물러섰다.
레이가 간신히 밖으로 빼낸 오른팔로 칼가의 머리를 툭툭 치며 외쳤다.
"루나!! 장난 그만 치고!! 얘 좀 치워!"
"..."
루나가 말없이 레이에게 다가왔다.
루나는 찬찬히 레이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가장 먼저 레이의 뺨부터 양옆으로 당겨보았다.
레이가 루나를 혼낼 때마다 자주 하던 짓이었다.
레이는 루나가 오늘따라 장난을 왜 이렇게 험악하게 치나 싶어 한마디 하려 했다.
허나 석양을 등진 루나의 얼굴에서.
유난히 붉어진 눈시울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
레이의 기억 속에서 루나가 눈물을 보였던 적은 기껏해야 두 번이었다.
쉽사리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루나가 눈동자를 일렁이고 있으니 레이도 잠깐 말문이 막혔다.
루나는 레이의 뺨을 강하게 움켜쥐고선 감정을 꾸역꾸역 눌러담아 속삭였다.
"...레이는 떠나면 안 돼요."
루나도 레이가 당장 어딘가로 떠날 계획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허나 레이가 이번에 필립스 백작령에 남게 된 것은 순전히 상황이 잘 풀렸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레이는 언제든지 개의치 않고 필립스 백작령을 떠날 것이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레이를 평생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루나는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레이는 우리 곁에 있어야 해요."
루나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레이의 얼굴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레이가 없으면..."
당신이 우리를 떠난다면.
당신이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착한 마법사가 될 수 없어요."
"..."
쥐어짜내는 듯한 루나의 목소리를 듣고 레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몇 개 없었다.
레이는 심란함을 감추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입에 담기는 것은 결국 거짓이 섞인 위로였다.
"안 떠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니들을 두고 떠나겠냐."
"...못 믿어요."
루나가 정색했다.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레이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어, 나 못 믿어?"
"레이 못 믿어요."
구두 약속이란 언제나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루나도 그걸 잘 알았다.
"그러니까 나랑도 계약 각인 맺어요."
츠즈즉!
루나가 다짜고짜 서클을 활성화시켰다.
얼을 타던 레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루나의 서클에 기이한 문자가 가득 덮인 후였다.
레이는 루나의 서클에 적힌 룬어를 바라보다 홀로그램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아프텔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나와 정말로 계약 각인을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루나가 맺고자 하는 계약 각인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었다.
'저거 계약 내용이 어떻게 돼?'
레이가 입을 뻐끔거리자 루나의 서클을 응시한 아프텔이 드물게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음...]
'내용이 뭐냐니까?'
[상대의 심장이 멈추면 본인의 심장도 멈추게 되는 계약입니...]
"이런 시발."
퍼억!!!
레이가 손에 쥔 칼자루로 칼가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난데없는 충격에 칼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키에엑!!]
칼가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레이는 칼자루에 마나를 덧씌운 채 칼가의 대가리를 계속해서 후려쳤다.
"야, 좀 비켜봐. 아니 좀 비켜보라고 새끼야!"
퍽!!퍽!!퍽!!
연거푸 대가리가 찍힌 칼가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레이는 칼가가 바둥대느라 벌어진 틈으로 간신히 몸을 빼낸 후 비척이며 일어났다.
갑갑했던 숨을 몰아쉰 레이가 곧장 루나의 뺨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루나야, 루나야!"
"아우으..."
"너 지금 제정신이냐? 이딴 내용의 계약 각인은 누구한테 배워온 거야?"
"..."
"누구한테 배웠냐고?! 설마 혼자 생각해서 준비해 온 거야?"
계속된 레이의 질책에 루나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로필렌 선생님께..."
루나는 로필렌에게 질문했었다.
상대를 곁에 붙잡아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종류의 계약 각인이 무엇이냐고.
로필렌은 답했다.
서로의 목숨줄을 연결해두면 된다.
목숨줄이 이어져 있다면 상대가 언제 뒈질까 불안해서 서로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복잡한 계약 각인보다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성능이 좋을 거다.
대충 그런 뉘앙스의 답변을 루나에게 해주었다.
인간 불신과 효율 중시에 절여진 마법사다운 답변이었다.
루나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괜히 옆에 있던 칼가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아니 루나야!!"
퍼억!!
[키에엑!]
"로필렌한테는 마법만 배워! 마법만! 그 괴상한 마법사들의 논리 구조까지 배우지는 말고!"
화풀이를 위해 칼가를 몇 번 더 걷어찬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로필렌이 충동질을 했다고 해도, 똑똑한 루나가 이리 극단적인 수단까지 들고 온 것을 보면 심리적으로 상당히 몰렸있다는 뜻이었다.
레이는 마른 세수를 몇 번 한 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루나는 여전히 서클을 활성화시킨 채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의 표정에서 깊은 고뇌와 서글픔을 읽어낸 레이가 망설임 끝에 루나를 향해 양손을 벌렸다.
"이리 와 봐."
"..."
"이리 와 보라니까."
루나가 천천히 걸어들어와 레이의 품에 안겼다.
레이가 루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라.
설령 내가 없다고 해도, 너희들은 충분히 세상을 잘 헤쳐나갈 테니.
레이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애들을 너무 싸고 돌았나.'
레이는 과거 지미 보육원이 쥐꼬리만한 크기일 때도 노멀 고아마저 내보내지 않고 꾸역꾸역 수용했다.
갈 곳 없는 노멀 고아들에 대한 동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만.
상황이 좋지 못함에도 이 악물고 모든 고아들을 수용한 건 단순한 동정 탓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다.
레이는 레어 이상의 고아들이 다른 아이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인간성과 사회성을 발전시키길 바랐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독선적인 성격을 가지는 걸 방지하고, 또한 서로가 단합하고 의지해 어려움을 이겨내길 바랐다.
근데 레이의 의도와 다르게, 몇몇 아이들은 친구들이 아닌 오직 레이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레이가 워낙 여기저기 활약하고 다녀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점진적으로 나아지겠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타올랐던 감정은 빠르게 깎여나가고, 과거의 기억은 새로운 경험에 밀려나 잊혀진다.
동경의 감정도 애착의 감정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마모되는 법이다.
시간이 흐르면 레이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정신적으로 독립해 나갈 것이 분명했다.
다만.
레이는 모르고 있었다.
망각은, 루나에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루나는 여전히 오래전 빗물 사이로 레이가 내뱉던 거친 숨소리까지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느꼈던 감정을, 여전히 밤마다 떠올리고 있었다.
루나는 평생토록 그날의 감정을 조금도 망각하지 않고 소중히 보관할 것이다.
레이는 그걸 모른 채 루나의 뺨을 이리저리 주물렀다.
"말 없이 너희들을 떠나거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거짓을 입에 담는 레이의 손을 루나가 꽉 붙잡았다.
오늘 입에 담았던 약속을 어기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레이가 피식 웃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의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
레이가 칼가에게 깔린 날부터 약 2개월 후.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찾아오기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로필렌이 드래곤 하트의 이식 방법을 완성했다.
미흡한 부분이야 여기저기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그 부분을 메우는 게 불가능했다.
드래곤 하트의 이식과 관련된 정보는 황실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황실에 쳐들어갈 게 아니면 아프텔이 제공하는 정보로 해결을 보아야 했다.
레이는 백작을 찾아가 드래곤 하트와 관련된 사안을 보고했다.
백작은 길게 고민 않고 영주성에서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진행하는 걸 허가했다.
백작의 허가가 떨어진 후.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진행하는 당일 날이 되어 기사, 레이, 지미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로필렌이 레아를 잠재운 채 그들 사이에 위치했다.
"음... 그럼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하트의 이식 준비를 지켜보며 레이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드래곤 하트의 이식이 실패할 확률도 분명 존재했다.
애초에 성공률이 얼마나 될지 로필렌도 장담하지 못했다.
처음 도전하는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벨라를 방에 들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약에라도 아이가 잘못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일 수는 없었다.
레이가 자기 뺨을 매만졌다.
차라리 드래곤 하트의 이식에 실패하는 게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
레이는 그런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치는 걸 느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자기 아이를 바라보던 벨라의 표정을 상기한 레이가 마음을 바로 세웠다.
로필렌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롭게 주변을 점검하고서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을 꺼내 들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스르릉!
모두가 검을 뽑았다.
만약에 문제가 생겨 드래곤 하트가 폭주라도 한다면 바로 대응해야 했다.
긴장이 팽배한 가운데, 로필렌이 마법적인 술식을 전개해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시작했다.
끄드드득!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는 방법은 외과적 수술이 아니었다.
체내의 용혈과 결합시켜 심장 내부로 침투시켜야 했는데, 설명이 간단한 것에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까딱 삐끗하면 심장에 구멍이 뚫리거나 화상을 입는다.
로필렌은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온 정신을 집중해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시작했다.
적막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소리 없는 긴장이 공간을 짓눌렀다.
허나 로필렌을 실로 마법사답게, 냉철하고 무심하게 이식 작업에 집중했다.
드드득!
마침내 드래곤 하트가 레아의 피부 안쪽으로 사라진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긴장이 정점에 이른 순간.
화아악!!
갑작스레 붉은 마나의 기류 두 가닥이 나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설마 드래곤 하트가 폭주한 건가.
그런 의문이 번지려는 찰나 상승을 멈춘 붉은 마나의 기류가 레아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화악!
붉은 마나를 받아들인 레아로부터 잔잔한 온풍이 흘러나와 방안을 데웠다.
다들 바싹 긴장했지만, 잔잔한 온풍을 끝으로 요동치던 마나도 자취를 감추었다.
레아는 여전히 곤히 잠든 채 안정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로필렌이 레아로부터 한발 물러서며 안도했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레아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용혈이 인간의 혈액과 분리되어 드래곤 하트에 저장됐다.
레이가 가장 먼저 레아에게 다가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았다.
평범한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눈동자가 레이를 맞이해 주었다.
"후우..."
머리를 쓸어올린 레이가 레아를 다시 내려봤다.
"에휴, 결국 이렇게 됐네."
레이가 밋밋한 웃음을 흘렸다.
벨라의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또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이 조금 답답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모두가 하나둘 물러났다.
벨라가 뒤늦게 방안으로 들어와 레아를 안아 들었다.
퍽 불안했던 듯, 벨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레아에게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열심히 살폈다.
다행히도 레아는 눈동자에 생긴 변화를 빼고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다행이다, 우리 딸."
레아를 쓰다듬는 벨라의 모습을 레이는 그저 말 없이 지켜보았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다시 안정기가 찾아온다.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평화는 소중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사이 시간이 계속 흘렀다.
그렇게 드래곤 하트의 이식이 성공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