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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8화 (108/446)

봉합 (2)

108화

카렌은 벨라가 영주성에서 요양 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혹시 병문안이라도 갈 수 있을까 싶어 영주성 주변을 기웃거려 봤지만 기사들에게 제지당했다.

다행히 벨라와 벨라의 아이가 무사히 회복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는데, 막상 두 사람이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유쾌하진 못했다.

'어머니가 괜찮으시다면 우리한테 조금은 시간을 내줘도 되잖아...'

카렌의 바람과 달리 레이는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벨라와 벨라의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카렌은 조금 우울해졌다.

카렌은 레이에게 보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허나 레이에게 있어 카렌은 보육원에 넘쳐나는 아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런 냉정한 현실이 더욱 차갑게 다가왔다.

카렌이 시무룩해진 채 목걸이를 매만졌다.

"보육원에도 한 달 동안 얼굴도 안 비치고..."

요하나가 카렌에게 딱 붙어서 같이 찡찡댔다.

"카렌이 만날 잘해줘서 그래. 레이가 부르면 무조건 쫓아가잖아! 그러니까 레이가 아쉬운 게 없지."

"그런가?"

"매튜가 사람 관계에선 밀고 당기는 게 필요하댔어. 카렌은 그게 부족해!"

수근거리는 친구들 곁에서 루나가 빤히 영주성을 바라봤다.

카렌과 요하나가 지금처럼 마음 놓고 투덜댈 수 있는 것도 레이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렌과 요하나에게 있어 레이는 적수가 없는 초월자였으며 결코 쓰러지지 않는 거목이었다.

때문에 레이가 항상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고, 레이에게 그런 것쯤은 별일 아닐 것이라 여기고는 했다.

허나 루나에게 있어 레이는 언제나 위태로운 존재였다.

레이가 항상 굳건해 보이는 건 가진 걸 전부 불태울 때까지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희생을 자처하길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렌과 요하나는 그걸 몰랐고, 루나는 그걸 알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루나가 영주성을 향해 걸었다.

"...나, 잠깐 다녀올게."

"응? 영주성? 기사님들이 못 들어가게 하시던데..."

잠시 고민하던 루나가 로브를 덮어썼다.

"...몰래 들어갈 거야."

일탈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던 루나의 발언에, 카렌과 요하나가 깜짝 놀랐다.

*

"후우..."

백작과 이야기를 마친 레이가 응접실을 나와서 텁텁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 하나를 낳고 기른다는 선택을 했을 뿐인데 참 많은 갈등과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레이가 눈가를 매만지며 복도를 걷는데 알레시아가 복도 끝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레이, 이야기는 잘 끝났느냐?"

"뭐, 백작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참 다행이구나. 요즘 분위기가 좋지 못해 눈치가 보여 혼났구나아..."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레아의 혈통에 관한 사안은 알레시아 또한 모르고 있었다.

알면 다치는 문제인지라 레이와 백작 모두 일단은 레아에 관한 문제를 알레시아에게 함구했다.

덕분에 알레시아는 원인도 모를 무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괜히 여기저기 눈치만 봐야 했다.

"어쨌든 해결됐다니 다행이로구나. 근데 동생은 언제 보여줄 것이냐?"

"한두 달만 더 기다려 보세요. 원래 갓난아기는 여러 사람이랑 접촉하면 안 돼요."

"으음, 아쉽구나."

실망한 알레시아를 바라보던 레이가 복도에 인기척이 없음을 느끼고 알레시아의 이마를 톡 두들겼다.

"요즘도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지?"

"나의 기사여, 잔소리를 하는 것은 아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만날 이상한 책만 읽지 말고 공부도 좀 열심히 해."

"이상한 책은 더 이상 없느니라! 레이 때문에 다 빼앗기지 않았더냐!"

오랜 시간 공들여 한 권 한 권 모아둔 서적을 전부 강탈당했던 알레시아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의 기사는 주인을 향한 배려가 부족하구나! 꼭 주인의 여흥을 앗아가야 했느냐?"

"사고는 너가 쳤잖아. 꽁꽁 숨겨둔 채 혼자만 읽었으면 말을 안 해. 돌려보다 그 난리를 쳐놓고선."

"..."

레이의 질책에 알레시아 뻘쭘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야설 돌려보다 들켰던 건 그야말로 개쪽을 당한 일인지라 알레시아에게 있어서도 썩 유쾌한 추억은 아니었다.

"기사는 주인의 허물도 덮어줄 줄 알아야 되느니라아..."

"덮어 드릴 테니 공부도 좀 열심히 하세요."

"오늘따라 레이는 날 보육원 아이들 대하듯이 대하는구나."

"천민이든 귀족이든 결국 본신의 능력이 받쳐주어야 안 굶어 죽는 법이니까요."

"흐음..."

입을 삐죽인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물었다.

"근데 아빠가 뭐라고 하셨느냐?"

"뭐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알레시아님이라도 잘 챙겨서 튀라고 하셨습니다."

"오...! 그것 참 로맨틱하구나!"

"?"

레이는 백작령이 주저앉더라도 알레시아만을 지키라는 백작의 이야기를 돌려 말한 거지만, 알레시아는 그걸 사랑의 야반도주라고 알아들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에서도 마지막에 레온하르트가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신나서 책 내용을 읊어대는 알레시아를 보고 레이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녀를 시켜 알레시아의 방을 한 번 더 뒤져보게 해야겠다고.

*

알레시아와 이야기를 나눈 후 레이는 곧바로 지미와 자리를 가졌다.

레이는 지미에게 백작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풀어서 설명했다.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지미는 잘 풀려서 다행이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속이 답답한 듯 연신 물을 들이켜는 지미를 향해, 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출세했네요, 지미."

"뭔 개소리야?"

"하나 있는 아들은 대영웅의 계승자에 하나 있는 딸은 황족이잖아요."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던 지미가 떫은 얼굴로 물었다.

"둘 다 내 새끼는 아닌데?"

"혹시 쾌락 없는 책임이란 말 들어봤어요?"

"야 이 개새끼야."

반사적인 욕설과 함께 지미가 다짜고짜 발길질을 날렸다.

레이는 지미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후 바닥을 구르며 낄낄댔다.

감정이 풀릴 만큼 레이를 걷어찬 지미가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네놈이 떠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왜요?"

"너 없으면 징징댈 애들이 한두 명인 줄 아냐?"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린 레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했다.

"지미,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계속 아이들 곁에 있기는 힘들 수도 있어요."

"일 좋게 마무리 지어놓고 왜 또 딴소리야?"

"딴소리가 아니고..."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겠다.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레이는 환생한 이후 많은 위협을 맞닥뜨렸고, 그때마다 거리낌 없이 목숨을 판돈으로 올린 채 문제를 해결했다.

백작령을 헤집던 여러 갱 집단들을 와해시키고, 깡패들과 지지고 볶으며 지미 보육원을 안정시키고, 보육원의 아이들을 지키고, 또한 유난히 반짝이는 씨앗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기까지.

조금만 삐끗했어도 목이 잘려나갈 뻔한 경험이 열 번은 족히 넘었다.

언젠가는 발을 삐끗할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절대 오래 살 수 있는 몸뚱이는 아니었다.

레이도 나름대로 노력은 해보겠지만 무언가를 확신하기엔 이 세상이 너무... 좆같았다.

"영지 하나를 지키기엔 참 과분한 인재들을 많이 모아놓았어요."

그들의 중심은 레이였다.

레이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제가 없어도, 제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와해되지 않고 힘을 합쳐야 해요. 그래야 이 빌어먹을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어요."

레이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부분적이게나마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지미, 만약 내가 사라져도, 모두가 힘을 합쳐 백작령을 지키고 서로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줘요."

"...넌 항상 더럽게 힘든 부탁만 하는구나."

"미안하게 생각해요."

"누구도 네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

"하하, 물론 완벽하게 제..."

레이가 말을 하다 말고 닫힌 문 너머를 바라봤다.

레이와 지미는 영주성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레이는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결계를 주변에 펼쳐 놓았다.

물론 간단한 결계인지라 침입자를 막거나 그런 기능은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주변에 누군가 접근하면 감지는 할 수 있었다.

헌데 결계 안쪽에서 난데없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미약한 인기척이 감각에서 사라졌다.

레이는 문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지만 누군가 마법을 쓴 마나의 잔흔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텔."

레이가 아프텔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프텔이 팔찌를 통해 주변의 마나 흐름을 분석해보고는 답했다.

[...뚜렷한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마나의 흐름이 조금 어색하긴 합니다.]

"누군가 다녀갔다는 거야?"

[마스터께서 인기척을 잘못 느끼신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답을 들은 레이가 실소를 흘렸다.

"간단한 결계라서 쉽게 파괴는 되어도 몰래 통과할 수는 없다고 했잖아? 뭐 어떻게 통과한 건데?"

[실시간으로 변동되는 결계의 마나 흐름에 맞춰 자기 몸에 마나를 덧씌우면 가능은 합니다. ...리실로테 님에 비견되는 재능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끄응."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는 감지 결계를 칠 바에야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막아주는 차단 결계를 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후자가 마나 소비가 더 커서 감지 결계를 쳐 봤더니 바로 문제가 생겼다.

'뭐, 괜찮겠지.'

인기척이 들린 시간도 찰나였고, 대마법사에 가까운 재능을 지닌 사람은 백작령에서 단 한 명이었다.

'그래도 멋대로 영주성에 들어왔던 건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네.'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한편.

영주성 밖에서 손가락을 물고 있던 카렌과 요하나가 달뜬 얼굴로 루나를 맞이했다.

기사들이 순찰을 돌며 마법사들의 결계까지 얇게나마 전개되어 있는 곳이 영주성이었는데, 루나는 홀로 영주성에 잠입해 무사히 귀환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루나 대단해!"

"영주성에서 레이 만났어?"

환호하는 카렌과 요하나를 향해 루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이가 우리를 떠날 수도 있대."

카렌과 요하나의 얼굴이 대번 굳었다.

허나 이런 소식을 들은 적이 처음은 아닌지라, 카렌이 빠르게 표정을 정돈하곤 루나에게 물었다.

"레이 또 어디 다녀와야 된대...?"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떠날 수도 있대."

카렌과 요하나의 표정이 다시 바싹 굳는 모습을 보며 루나가 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여전히 고저 없는, 허나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루나가 말을 이었다.

"레이를 붙잡을 수 있어."

*

해가 질 때쯤, 레이는 영주성을 벗어나 본래 살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집 정리나 한번 할 생각이었다.

일단 벨라의 아이, 레아와 관련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사실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겉면만 봉합해 가린 것에 가까웠으나, 레아의 혈통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도록 주의하면 당장은 괜찮았다.

레이가 로필렌에게 다시 받아온 드래곤 하트를 품속에서 매만졌다.

드래곤의 몸속을 흐르는 피는 혈액이라기보단 액화된 고농도 마나에 가깝다고 한다.

인간의 몸뚱이에 그런 게 섞어 흐르면 당연히 버텨낼 수 없다.

때문에 황족에게는 용혈을 제어할 드래곤 하트의 파편이 필요했다.

로필렌의 실험에서 재현된 용혈을 한 번 체험해본 레이는 묘한 감상에 휩싸였다.

'마치 그 기술과 비슷하군. 하긴 그 기술의 출처가...'

생각을 이어가려던 레이가 위협적인 기운을 느끼고는 눈가를 좁혔다.

다급히 검을 뽑아내려는 레이를, 밤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깔고 누워버렸다.

쿠웅!!!!

"끄악!!"

거대한 몸뚱이에 깔린 레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레이가 끙끙거리며 고개를 돌려 거대한 몸뚱이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살폈다.

거대한 몸뚱이의 정체는 바로, 고위 정령 칼가였다.

레이의 눈빛에 대번 짜증이 깃들었다.

"이게 뒈질라고. 야, 공간검 맛 좀 볼래?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키에에엑!!]

칼가가 발작하며 고개를 저었다.

칼가의 눈동자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레이는 정령의 본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간검의 주인이었다.

칼가 또한 되도록 레이와 몸을 맞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헌데 지금은 몸을 맞대는 걸로 모자라 아예 레이를 깔고 누워버렸으니, 칼가는 정령에게 나지도 않는 식은땀이 온몸에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키에에엑!]

계속해서 꽥꽥 대는 칼가를 보고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노예 계약을 맺은 이상 칼가가 명령도 없이 레이를 깔아뭉갰을 리는 없었다.

무조건 주인이 시켰다는 건데, 결국 레이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꼴이었다.

"야!! 칼 맞기 싫으면 어떻게든 좀 비켜봐!!"

[키에에에엑!!]

좆 같은 인간 새끼야, 너가 그딴 계약만 맺게 안 시켰어도 진작에 비켰잖아.

칼가가 레이를 원망하며 바둥대자 그 아래 깔린 레이는 더욱 죽을 맛이었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칼가에게 짓눌린 레이를 바라보던 카렌이 당혹에 빠진 채 중얼거렸다.

"부, 붙잡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당연히 설득이 우선될줄 알았던 카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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