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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7화 (107/446)

봉합 (1)

107화

조건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단순한 호의 탓에 레이를 백작령에 머물게 해줄 수는 없었다.

레이는 조용히 백작의 뒷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백작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듯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적막이 흐른 후, 마음을 정리한 백작이 레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알레시아를 두 번째로 삼게."

짧고 간결한 요구.

허나 그 짧은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었는가 곱씹어본 레이가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백작의 요구는 레이에게 있어 지나치게 형편이 좋았고, 또한 대단히 무겁고 광범위한 책임을 감당하라 말하고 있었다.

백작의 눈빛이 깊어졌다.

"처음엔 좀 더 뚜렷한 무언가를 그대에게 요구해야 하는가 고민했네."

혼약과 같은 서로의 사회적 직위를 엮는 강력한 속박.

그런 걸 레이에게 요구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허나 오랜 고민 끝에 백작은 섣부르게 알레시아와 레이를 묶는 게 대단히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백작령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어떤 혼란이 불어닥칠지 누구도 몰랐다.

때에 따라 레이와 모든 관계를 끊어내야 할 수도 있었다.

헌데 레이와 알레시아를 혼인 관계로 묶어버리면, 레이 하나 죽고 끝날 일에 백작령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레이를 지금 당장 백작령에서 추방하기엔, 레이의 재능이 아까웠고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다.

레이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재능을 타고났다.

또한 많은 이들이 레이를 따랐으며, 수많은 인재가 레이로부터 발아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하수인이 조금씩 이빨을 드러내는 이때, 레이는 백작령을 지키는 거대한 방패가 될 수 있었다.

허나 공간검의 계승자인 레이는 그 존재만으로 제국에 위협적이었다.

한술 더 떠 황실의 피를 이은 동생마저 레이는 포기하지 못했다.

때문에 백작은 요구했다.

알레시아를 두 번째로 삼으라고.

"그대의 첫 번째는 벨라겠지. 평생토록 변하지 않을 거야."

벨라는 레이가 내리는 모든 판단과 행동원리의 근간이었다.

백작은 이번 사태를 겪고 나서야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레이가 종종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진실을 파헤쳐보면 결국 벨라를 위한 행동이었을 거라는 걸.

"그러니 레이, 어떤 미래가 찾아오든, 알레시아를 반드시 두 번째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하게."

현 시점에서 누구도 어떤 미래가 백작령에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공간검이나 레아의 문제 탓에 필립스 백작령이 불탈 수도 있다.

레이와 전혀 관련 없는 외적인 사건에 휩쓸려 필립스 백작령이 주저앉을 수도 있다.

혹은 예상 밖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필립스 백작가가 승승장구해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문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그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벨라 다음으로 알레시아를 우선해서 상황을 판단하라.

필립스 가문을 대변하는 유일한 후계자인 알레시아를 지켜내라.

설령 백작령이 완전히 불타 역사에서 사라진다 해도, 알레시아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라.

그게 바로 필립스 백작의 요구였다.

필립스 백작의 요구가 가문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오직 사랑하는 딸아이를 위해서인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레이가 자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언뜻 과해 보이는 요구였으나, 이런 종류의 계약은 결국 구두로 밖에 남길 수 없었다.

레이가 중요한 순간 계약을 어겨봤자 백작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약 각인?

레이와 계약 각인을 맺을 수 있는 상대는 기껏해야 알레시아다.

허나 알레시아가 본인의 곁을 지켜주는 정령들과 죄다 계약을 파기하고 레이와 계약 각인을 맺어봤자, 용량 탓에 대단히 복잡하고 강제력 강한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조건은 그것 하나입니까?"

"그대가 알레시아를 두 번째로 삼는다는 전제하에, 몇 가지 더 있네."

"백작님, 절 믿으십니까?"

"..."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던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알레시아를 지키게. 그 아이만 무사하다면 필립스 가문은 설령 불에 타서 사라진다 해도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네. 나는 그대가..."

은혜를 아는 사람이기에, 두 번이나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네."

결국엔 도박이었다.

운이 좋다면 하르시아에 근접한 마스터 급 기사가 모진 풍파로부터 백작령을 지켜줄 것이며, 조금만 삐끗하면 작디작은 백작령이 제국 전체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필립스 백작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당장에야 레이가 백작에게 결의를 증명할 방법은 이런 격식밖에 없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시그니 산맥에 주인 없는 그림자가 홀로 너울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본래라면 마법사가 펼친 은폐장에 의해 그림자조차 완벽하게 은폐되어야 했지만, 주위를 잠식한 정체불명의 마나의 잔흔이 정교한 마법을 자꾸만 흐트러뜨렸다.

마법사가 펼친 은폐장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미하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솟아오른 산맥 사이로 유별난 형상을 취하고 있는 산이 하나 보인다.

산 중턱부터가 무너져내린 듯 사라져 있었고, 그 자리를 거대한 분화구가 대신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최근 산맥에서 화산활동이 감지됐다는 정보가 있었나?"

"없습니다. 그리고 추살 작전 당시에는 정상적인 형태의 산이었습니다."

답변을 들은 미하엘이 말없이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세 명의 로얄가드와 고위 마법사로 이루어진 제국의 작전조가 분화구를 지닌 산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분화구로 다가갈수록 기묘한 열기가 피부를 타고 흘렀다.

단순한 열기가 아니라 마나가 뒤섞인 열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자연적으로 생성된 분화구를 절대 아니다.

강력한 대마법이라도 직격된 것처럼 보였는데, 동행하는 마법사 또한 쉽사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답을 내지 못했다.

마침내 분화구 끝자락에 도착한 미하엘이 분화구 중심을 향해 내려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미약한 인기척이 나무 뒤에서 느껴진다.

미하엘이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레인저들의 추적술은 알아주어야겠군."

"그거야 우리 전문이니까. 그리고 여긴 우리 텃밭이잖아?"

브랜딜이 실실거리며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하엘은 브랜딜을 노려보다 마법사가 펼친 은폐 장막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제야 브랜딜은 두 눈으로 미하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하엘의 기세가 꽤나 험악했지만 브랜딜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꽤 늦었군 그래."

"1황자의..."

"1황자의 심장에 있는 드래곤하트가 혹시 여기 있는지 확인하러 오셨겠지."

미하엘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소문이 좀 나도는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황족이 드래곤하트를 이식받는다는 건 제국의 기밀이었다.

미하엘이 경고를 담아 기세를 피어 올렸다.

허나 브랜딜은 여전히 태평했다.

레이와 1황자로부터 터져 나왔던 그 압도적인 기운에 비해선 미하엘의 기세는 이래저래 부족한 감이 있었다.

"싸우러 온 건 아니잖아? 사실관계 확인하러 행차하신 것 같은데 굳이 날 세울 필요 있어?"

브랜딜이 계속해서 여유롭게 굴자 미하엘이 떫은 얼굴로 기세를 죽였다.

"아는 게 참 많아 보이는군."

"너희가 왜 여기까지 찾아와 헤매고 있는지는 잘 알지."

브랜딜이 낄낄거렸다.

그동안 제국이 꽤 혼란했고,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1황자의 시체를 되찾기 위해 루비하 왕국을 계속 압박해왔다.

헌데 압박을 받은 루비하 왕국의 반응은 제국의 예상을 꽤 벗어나 있었다.

외교적 해결을 원한다던 제국이 기습적으로 시그니 산맥을 침범하지 않았느냐.

그 충돌 과정에서 드래곤 하트의 소실을 확인해놓고 왜 뻔뻔하게 나오느냐.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왕국 또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왕국으로 망명했던 제국의 1황자가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

왕국도 곤란했지만, 제국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을 터다.

1황자가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건 황실의 권위를 굉장히 떨어뜨리는 사건이었다.

황실로서는 1황자와 관련된 사건을 최대한 덮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왕국은 제국이 이번 일을 철저히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은밀히 루비하 왕국과 접촉하리라 예상했다.

근데 제국은 대놓고 왕국에 사절을 보내 1황자 시신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왕국은 제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제국은 왕국이 대체 왜 이렇게 뻗대는 건지 의문이었다.

브랜딜이 미하엘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레인저들 사이에 내분이 있었어."

"...내분?"

"자세히는 말 못 해주고. 강경파랑 온건파 사이에서 갈등이 좀 커졌어. 아, 나는 온건파였는데 강경파 놈들이 자꾸 제국이랑 제대로 붙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잖아. 미쳐가지고."

"..."

"그래서 하극상이 좀 있었지. 지금은 뒈진 단장님께서 마지막 발악을 한다고 1황자 심장에서 드래곤하트를 꺼내 자폭했어. 저게 그 흔적이지."

"그게 말이 되는..."

"잘 안 믿기지? 한 번 조사해보든가. 아직도 드래곤하트가 녹아내린 구덩이에서 열이 펄펄 나잖아."

미하엘이 다시 분화구 중심을 살펴봤다.

마나가 잔뜩 함유된 기이한 열기는 결코 평범한 마법 같은 걸로 이루어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긴가민가한 표정을 한 미하엘을 향해 브랜딜이 말을 이었다.

"내가 윗분들 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건 아니지만... 왕국으로선 그리 자랑하던 레인저들 사이에서 내분이 있었다고 대외적으로 밝히기 힘드니까 제국 탓을 했을 거야. 혹시 왕국 쪽에서 몰래 말 안 해주든?"

미하엘은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브랜딜의 말을 들으니 대략적으로 상황이 이해가 가는 것 같긴 했다.

물론 앞으로 다양한 정보 수집과 교차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어쨌든 브랜딜의 이야기는 앞뒤 정황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그럴듯했다.

"...드래곤 하트가 전부 소실된 건가?"

"저 열기를 뚫고 뒤져보긴 했는데 아무것도 못 건졌어."

"토니."

미하엘의 부름에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를 향해 미하엘이 물었다.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소멸한 게 맞는지 확인할 수 있나?"

"마나 성분을 분석하고, 에너지 흐름을 조사하고 역산해서 계산하면 대략적으로는 파악 가능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나?"

"저 혼자라면 작업하는데 하루는 걸릴..."

"다섯 시간."

둘의 대화에 브랜딜이 끼어들었다.

브랜딜은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리며 손 하나를 쫙 펴 보였다.

"너무 오래들 계시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못해요."

"..."

미하엘이 짜증스럽게 브랜딜을 바라보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한 번 접어주었다.

"토니, 5시간 안에 가능한가?"

"최대한 줄여보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브랜딜이 산 뒤쪽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근방에 레인저 전력이 다수 집결해 있었다.

적당히 돌려보낼 수 있다는 브랜딜의 주장에 자리를 양보해주었지만, 레인저들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자들이었다.

인내심이 대단히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브랜딜은 레이가 부탁한 역할을 자신이 충분히 소화했길 바랐다.

시간이 지나면 제국도 시그니 산맥에서 1황자가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으며, 공간검의 사용자가 나타가 1황자를 베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허황된 이야기인데다 증거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니, 운이 따른다면 제국이 브랜딜의 증언을 정론으로 취급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앞으로 무엇을 이겨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운을 빌지.'

브랜딜이 산맥 너머에 있을 레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한편.

그때 백작령에서는.

카렌이 45번쯤 반복했던 얘기를 다시 하고 있었다.

"레이가 요즘 우리한테 너무 소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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