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3)
106화
까무러치려 하는 벨라를 레이가 가볍게 흔들었다.
벨라는 빙글빙글 도는 눈동자로 자기 아이를 보았다.
황족? 귀족도 아닌 황족?
황족이 내 배에서 나왔다고?
벨라는 한참을 헤맨 끝에 자기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나, 나 대체 누구랑 잔 거야?!"
"..."
레이는 골치가 아팠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귀족에 대해 학습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벨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이란 날 때부터 고귀한 자라고 학습받은 벨라에게 있어 황족이란 그야말로 하늘 위의 존재에 가까웠다.
근데 내가 낳은 아이가 황족이다? 내가 황족과 하룻밤을 보냈다?
벨라가 감정을 주체 못하고 연신 탄성을 터뜨리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서로의 귀족에 대한 인식이 너무 달랐다.
레이는 벨라 입에서 "황자님께서 내 목을 졸라주셨어!" 같은 탄성이 나오는 꼴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일단 벨라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벨라는 몇 번 더 촐싹대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총기를 되찾았다.
"내 아이가... 황족..."
벨라는 뒤늦게 상기했다.
자기 아이가 황실의 피를 이었다는 게,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걸.
귀족의 피도 홀로 감당하기 힘들어 쩔쩔매며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
근데 이제는 귀족의 피도 아닌 황족의 피란다.
귀족의 아이는 이마에 귀족이라 써놓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황족은 누가 보아도 황족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벨라의 가슴에 다시 두려움이 가득 찼다.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벨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가 자기 동생의 머리 위를 손으로 훑었다.
아프텔의 도움에 의해 간단한 환영 마법이 전개되며 레아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었다.
레이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일단 이렇게 다니다가, 나중에 염색하자. 벌써부터 염색하면 머리털 다 빠질테니까."
"아..."
어렵지 않게 해답을 내놓은 레이를 보고 벨라가 탄식했다.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인 것만으로도 아이는 훨씬 평범해 보였다.
벨라는 레아를 꼭 껴안은 채 호흡을 골랐다.
벨라가 안정을 좀 찾은 것 같자 레이가 침대 옆에 걸터앉아 1황자와 관련된 사정을 설명했다.
레이는 본인이 1황자를 죽였다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1황자가 어떻게 축출되었고 어디서 죽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레이의 설명을 들을수록 벨라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벨라는 배움이 짧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 자식이 위태로운 운명을 타고났음을 직감적으로 깨우칠 수 있었다.
레이는 벨라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준 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백작님도 레아가 어떤 혈통을 물려받았는지 아셔."
벨라의 눈동자에 경악이 번졌다.
레이가 벨라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백작님이 내 동생을 해치진 않으실 거야."
다만.
"백작님의 결정에 따라 백작령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
레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레이를 바라봤다.
벨라는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참 많은 것들을 이루었고 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벨라는 차마 레이에게 필립스 백작령에 남아도 된다고 답해주지 못했다.
벨라에게 있어, 이미 낳은 아이를 버리자는 말은 죽어도 못할 말이었다.
허나 벨라의 고집은 결국 레이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레이는 벨라의 자책이 길어지지 않도록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엄마,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가 좋을지 한 번 생각해봐."
가족 셋이서 함께하는 여행은 꽤 즐거울 거야.
대화의 끝맺음은 담담했다.
*
언박싱 데이 이후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백작은 아직 레이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레이는 차분하게 백작의 답변을 기다렸다.
만약 필립스 백작령을 떠난다고 해도, 레아가 조금 더 자라고 벨라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한두 달은 더 백작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벨라는 아직까지 영주성에서 머물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벨라가 난산 때문에 심신이 크게 상했으며, 때문에 밖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영주성에 머물며 회복 중이라고 알렸다.
물론 남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벨라는 현재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았고, 지금도 영주성 복도를 가볍게 산책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레이가 작은 침대에 누워있는 레아를 내려봤다.
레아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옹알이를 했다.
"아아!"
"왜? 안아줄까?"
"아아!"
"오냐."
레아를 안아든 레이가 레아의 머리를 잘 받든 채 아주 조심조심 흔들었다.
어린 아이의 머리를 잘못 흔들었다간 말 그대로 병신 되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러운 레이의 손길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레아는 웃는 얼굴로 옹알이를 계속했다.
"바바바바!"
"바바바바?"
"아바! 아바!"
"아빠?"
"아바!"
"미안한데 너는 아빠가 없어요. 느그 아빠는 헛짓거리하다 내 손에 뒈졌거든요."
"바바바바!"
레아는 충격적인 진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웃음꽃을 피운 채 레이의 품에서 바동거렸다.
레이가 복잡한 심경으로 레아의 눈동자를 내려봤다.
선명한 붉은색.
더군다나 툭 하면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고는 했다.
환영 마법을 씌워놓아도 오래 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그 이상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마법이 깨졌다.
마침 레이를 향한 레아의 눈이 다시 세로로 갈라졌다.
레이는 두통이 오는 걸 느끼며 물었다.
"얘 눈 왜 이래?"
[용혈 때문입니다.]
아프텔이 답했다.
[눈동자는 용혈이 짙게 서리는 부위입니다. 그 영향 탓에 환영 마법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눈이 세로로 갈라지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이거 해결법 없어?"
레아의 머리카락은 환영 마법이 덧씌워져 검은색으로 보였다.
흑발에 적안.
꽤 독특한 조합이긴 했다. 허나 이 세상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은 아니었다.
때문에 세로로 갈라지는 동공만 어떻게 하면 그럭저럭 의심 받지 않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프텔이 잠시 침묵했다.
[...용혈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를 이식해주어야 합니다. 용혈을 다룰 수 있게 되면 자연히 눈동자 또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어린 나이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면 위험하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으나, 이식 절차에 문제가 없다면 특별히 더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걱정해야 할 건 드래곤 하트의 용량입니다.]
레이의 팔목에 위치한 팔찌를 통해 레아의 상태를 대략적이나마 파악한 아프텔이 말을 이었다.
[마스터께서 가지고 있는 드래곤 하트의 파편으로는 용혈을 담아낼 용량이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이가 성인에 가까워질 수록 용혈과 관계된 문제가 생길 겁니다.]
"혹시 다른 종류의 드래곤 하트를 이식해도 용혈을 억제할 수 있나?"
[용혈은 억제해도 신체가 반드시 거부 반응을 보일 겁니다.]
"답이 안 나오네. 나중에 고민하자."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프텔의 조언을 들어보니 걸음마를 할 때쯤 드래곤 하트를 이식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더라도 드래곤 하트는 이식하고 떠나야 했다.
다행히 레아가 10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어 보였으니, 이제 로필렌만 이식 방법을 완성하면 됐다.
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로필렌이 방문을 열었다.
"레이, 날 찾았다고 들었..."
로필렌은 방 안으로 발을 들이다 말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레이 품에 안긴 레아를 내려다본 로필렌이 황급히 방문을 닫은 후 결계를 몇 개 쳤다.
"으음... 혹시 말입니다."
로필렌은 레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실실 웃기 시작했다.
"황실을 아예 갈아치우실 생각입니까?"
"...?"
레이가 의아한 눈빛을 했으나, 로필렌은 자기 혼자 신나서 낄낄대느라 바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살찐 머저리들에게 끌려다니실 바에야 허수아비를 하나 내세운 후 마스터께서 직접 제국을 이끄시는 게 백만 배 나을 겁니다."
"잠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얘는... 보험 같은 거야. 알아 듣지?"
"아, 그렇습니까?"
로필렌이 머쓱해하며 자기 볼을 한 번 매만졌다.
"저는 마스터께서 아예 제국을 엎어버리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
"그... 백작령에 이것저것 준비해두시지 않았습니까?"
레이가 재차 의아한 눈빛으로 로필렌을 바라봤다.
백작령에 준비를 해두긴 대체 뭘 준비해놨단 말인가.
고아 가챠 돌려둔 거야 제대로 결과가 나오려면 한참 멀었다.
당장 레이와 필립스 백작가가 꺼내들 수 있는 굵직한 패라고 해 봐야-
하르시아의 계승자, 레이.
리실로테의 계승자, 루나.
600년 전의 전쟁영웅 카시야스의 직계 후손, 울트.
600년 전부터 레시나의 안식을 위해 희생을 자처한 가문이자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강력한 기사단을 지닌 필립스 백작가.
그리고 한때 황태자 직위를 지녔던 제국의 1황자가 남긴 유일한 여식, 레아.
정도였다.
"..."
남이 봤다면 반역을 수십 년은 작정하고 준비했다고 오해할 조합들이었다.
레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로필렌, 드래곤 하트 이식 방법을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완성시켜."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우선해서 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믿어보도록 하지."
로필렌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방을 나갈 때쯤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레이를 찾아온 시종은 백작이 응접실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레이는 올 것이 왔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복장을 정돈한 레이는 벨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레아를 맡기고 방을 나섰다.
*
응접실로 들어온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말 없이 레이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레이는 백작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요 한 달 사이 많이 깊어졌음을 느꼈다.
레이는 백작이 겪었던 시름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필립스 백작을 기만했지.'
레이는 고의로 정보를 숨겨 백작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왜곡시켰다.
레이는 자신을 앞길 창창하며 아무 위험 없는 우량주처럼 포장했다.
때문에 백작은 레이에게 아낌없이 투자를 쏟아부었다.
'근데 우량주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니 레버리지를 닥치는 대로 땡긴 선물 상품이었느니...'
골치 아플만 하지.
레이는 약간의 자기 반성과 함께 침묵을 지켰다.
백작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제 와서 입을 놀려가며 백작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이토록 중대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누군가의 한두 마디로 휙휙 바꿀 만큼 필립스 백작은 줏대가 없지 않았다.
백작은 충분히 고심한 후 결정을 내렸을 터다.
레이는 백작의 결정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그 결과가 수많은 인연과의 단절이라 해도, 그건 레이가 감당해야할 책임이자 업보였다.
오랜 적막 끝에.
백작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