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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5화 (105/446)

갈등 (2)

105화

레이와 지미, 그리고 필립스 백작과 백작가의 기사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레이는 자리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마음을 깊게 가라앉혔다.

벨라의 아이가 황족이라면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허나 레이는 필립스 백작을 어떻게든 설득해야겠다는 강박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황이 수틀리고 서로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떠나면 될 뿐이다.

비록 백작령에서 쌓아왔던 것이 아쉬웠지만, 벨라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레이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그건 일종의 고집이었다.

벨라를 제외하고선 이 세상에서 만든 인연 따위는 언제든 끊어낼 수 있다는, 그런 고집이었다.

허나 막상 백작령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다가오자 뒤늦게 레이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레이가 이 세상에 떨어진 후 만든 모든 인연이 이 필립스 백작령에 있었다.

레이는 오직 벨라에게만 정을 주려 했고, 오직 벨라만을 사랑하려 했다.

허나 레이의 다짐과는 별개로, 이제는 참 많은 이들이 레이에게 정을 주었고, 레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언제든지 외면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막상 때가 다가오니 자꾸만 호흡이 가빠지려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레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레이는 어떻게 하면 백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새삼스레 대단히 뾰족한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호흡을 정돈한 레이가 담담하게 해야 할 이야기를 했다.

레이가 무작정 백작에게 모든 진실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레이는 자신이 우연찮게 하르시아의 진전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고, 비교적 백작이 납득하기 쉽게 스스로를 포장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탑이었다.

우연이 겹치고 겹쳐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와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가 나를 인도했다.

그 결과 하르시아의 진전을 성공적으로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였지만 레이는 이미 자신이 하르시아의 적법하고 유일한 후계임을 증명했다.

제국의 신검이라는 모로스를 뽑아들고, 수백년 전 실전된 공간검을 구사함으로써 말이다.

"다시 혼돈이 찾아올 겁니다. 이미 그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는 1황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인저가 1황자가 악마와 거래해 소생했다고 증언했고,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이자 길잡이가 증언이 진실인지 확인하라 독촉했다.

그 탓에 다급히 시그니 산맥으로 가게 되었으며, 시그니 산맥에서 1황자가 악마와 거래했음을 확인했다.

전투 끝에 1황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레인저들과는 충돌 없이 물러났다.

그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일련의 사건들이 단지 우연에 의해 벌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말인즉슨 더 거대한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 레이는 경고하고 있었다.

"감히 바라건대, 필립스 백작가가 제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백작은 침묵했다.

레이의 이야기는 일견 허황되게 들렸다.

설령 레이가 하르시아의 진전을 이었다고 해도, 너무 섣부르게 혼돈을 입에 담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수백 년 전 영웅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접하고, 동화로 여겼다.

역사서를 살핀다 해도 그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자들은 몇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백 년 전 이야기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저 흥미로운 신화에 불과했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달랐다.

필립스 가문의 주인에게 수백 년 전 영웅이란 눈앞에 실존하는 존재였다.

그들이 겪었던 투쟁의 역사는 변질되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졌으며, 그건 동화나 허황된 기록이 아닌 담담한 진실이었다.

때문에 레이의 이야기가, 레이가 말하는 '필연'이 필립스 백작에겐 너무나 무겁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나가보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네."

레이가 고개를 깊게 숙이고 식당을 나갔다. 지미가 그 뒤를 따랐다.

백작은 멀거니 레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다시 침묵했다.

*

백작은 레이의 동생만 제거하면 모든 위험이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착각이었다. 레이 본인부터가 필립스 백작가의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레이는 공간검을 계승하다 못해, 한때 황제의 상징이었던 제국의 신검 모로스까지 계승 받았다.

만약, 황실이 굉장히 안정된 시기였다면 레이라는 존재가 황제에게 환대받았을지도 몰랐다.

허나 지금 황실엔 혼란이 가득했다. 후계라고 남아있는 자들은 능력과는 별개로 정통성이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공간검의 계승자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황실 또한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할 확률이 높았다.

레이의 동생도 폭탄이었고, 레이 본인도 만만치 않은 불안 요소였다.

물론.

레이의 장래는 찬란하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다.

성인은커녕 열다섯도 되기 전에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닿았다.

거기다 공간검을 계승해, 비슷한 경지의 무사들은 상대가 되질 못했다.

레이는 언젠가 하르시아가 닿았던 그 지고의 경지와 무력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런 레이의 미래는 분명 탐이 났다.

허나 백작은 감당 못할 탐욕이 부를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를 백작령에서 내보내야 한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자 하면, 문득 의문이 들었다.

레이를 쫓아낸들, 과연 백작령이 안전할까.

레이의 주장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필연이었다면, 필립스 백작령은 앞으로 다가올 혼돈을 막아낼 수 있을까.

백작은 알고 있었다.

혼돈을 막아내긴커녕 가장 먼저 휩쓸릴 터다.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기엔 백작령이 자리한 위치가 너무 안 좋았다.

차라리 레이를 받아들이는 게 더 높은 확률로 백작령을 존속시킬 수 있는 선택이 아닐까.

레이가 의도했던 고민을 백작은 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기사들은 저들의 주인이 마음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백작은 계속해서 레이가 나갔던 문을 바라보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저주받은 영웅의 곁을 지키다 우리는 영락했다."

그건 무엇하나 과장없는 사실이었다.

필립스 가문은 영웅과 함께 영락했고, 필립스 백작의 선조들은 야망 한 번 떨치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삶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랜 시간 필립스 가문을 속박했던 계약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필립스 백작은 대단한 야망은 없었지만 적어도 알레시아 만큼은 자유를 되찾길 바랐다.

되찾은 자유로 무엇을 하든, 설령 과한 욕심이나 실수 때문에 가문을 말아먹는다 해도 만족할 수 있었다.

"헌데 간신히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더니, 수백 년전 단절된 영웅의 후계가 우리를 찾아왔구나."

그것도 황족 하나를 동생으로 두고 말이다.

"이게 우리 가문의 숙명이란 말인가."

백작은 한탄했다.

우리는 영웅을 따르다 영락했고, 이제 영웅의 후계를 따르다 파멸할 운명인가.

그게 아니라면.

오랜 희생 끝에 다시 드높이 비상할 차례인가.

그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어쩌면, 정말 대단한 운이 따라준다면.

레이와 백작의 바람처럼 평생을 그 누구에게도 '비밀'을 들키지 않고 모두가 평온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건 이루어지기 요원한 망상에 가까웠다.

백작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

지미와 함께 식당에서 나온 레이가 앤드리에게 아이를 건네받았다.

레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분만실로 향하며, 뒤를 따르는 앤드리에게 물었다.

"엄마는 깨어났어?"

"그렇습니다."

"분만실 주변에 다른 인원 있으면 전부 물려줘."

앤드리는 백작에게 언질 받은 바가 있었는지 별말 없이 레이의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이는 아이에게 덧씌운 환영 마법을 풀고 벨라를 찾았다.

아이를 받아든 벨라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기절 직전에 스치듯 보았던 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다시 품에 안겼다는 게, 너무나 다행이었다.

벨라는 한참을 훌쩍이다 어설픈 자세로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레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엄마, 할 말이 있는데..."

"우쭈쭈, 내가 엄마란다."

벨라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레이는 벨라가 아이와 충분히 교감을 나누길 기다렸다가 몇 번 더 말을 걸었다.

허나 벨라는 레이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자기 친자식 생겼다고 양아들을 없었던 사람 취급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벨라의 무시가 계속되자 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엄마, 다리 한 번 벌린 거 가지고 너무 생색..."

"야!!!!!!!!!!"

벨라가 무심코 괴성을 질렀다가, 아이가 놀랐을까 싶어 화들짝 아이를 감싸며 레이를 노려봤다.

열이 가득 오른 벨라의 얼굴을 보고 레이도 더 이상 분만과 관련된 화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벨라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 아이의 손발을 확인해보았다.

손가락이 각각 다섯 개. 발가락이 각각 다섯 개. 문제없었다.

레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불쑥 물었다.

"동생 이름은 정했어?"

"레아. 아니면 레이첼. 두 가지 중에 고르려 했는데, 아들은 어떤 이름이 좋을 것 같니?"

레이가 괜히 자기 미간을 몇 번 매만졌다.

이름의 어감만 보면 '레이'라는 이름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게 틀림없었다.

고민하던 레이가 대답했다.

"난 레아가 마음에 드네."

"그럼 레아로 하자."

벨라는 여전히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레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꿀물이 뚝뚝 떨어졌다.

웃음꽃을 피운 채 레아에게 젖을 물리던 벨라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살짝 당황했다.

"근데 우리 아가는 왜 눈을 안 뜰까?"

"어차피 지금 눈 떠봤자 보이지도 않아."

갓난아이 때의 시력으론 사물의 윤곽이나 인식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레이는 직접 겪어봤기에 갓난아기의 시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았다.

벨라는 레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조심스레 레아의 눈꺼풀에 손가락을 올렸다.

벨라의 손가락이 레아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린다.

"어머...!"

당혹스러운 탄성과 함께 벨라의 몸이 잠깐 굳었다.

벨라는 티를 안 내려 했지만 레이의 눈에는 벨라가 당황한 게 훤히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레아의 눈동자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강렬한 색을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촌구석 사람이라 해도 제국 황가의 외적 특성 쯤은 풍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찬란한 은발과 강렬한 적안.

벨라는 머리가 굳어 어버버 거리며 레이를 찾았다.

"아, 아들, 동생 눈이 빨간색인데...?"

레이가 덤덤하게 답했다.

"잡종이라서 그래. 인간 피에 드래곤 피가 섞였거든."

잡종은 레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품종이었다.

'시발 진짜.'

대체 처음에 드래곤이랑 뒹굴 생각을 한 새끼는 정신이 어떻게 된 녀석일까.

이상 성욕을 지닌 제국의 시조를 향해 레이가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벨라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다시 물었다.

"잡, 잡종?"

"아, 그러니까..."

레이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황족이라고. 내 동생이."

"..."

한참 끝에 레이의 말을 알아들은 벨라가 기절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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