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1)
104화
황족의 적안.
그건 색소 문제 같은 게 아닌, 용혈을 품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너무나도 짙게 드러나는 황가의 상징에 모두의 심장이 차갑게 달궈졌다.
저건 용납해서도 안 되고 용납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레이를 제외한 모두가 검을 뽑아들었다.
"큭...!"
지미는 잠깐 방황했다.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록 불평불만을 달고 살았다고 해도, 지미에게 있어 필립스 백작령은 두 번째 고향이자 많은 은혜를 입은 땅이었다.
지미는 봉합될 수 없는 갈등 탓에 필립스 백작령이 큰 타격을 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지미가 결국 레이를 등 졌다.
레이를 등지고, 백작을 마주 봤다.
지미는 백작과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정작 백작에게 검을 겨누지는 못했다.
한 손으론 검 자루를, 다른 한 손으론 검날을 붙잡은 지미가 자기 품으로 검을 당긴 채 필립스 백작에게 호소했다.
"백작님, 고정하십시오. 진정하시고 한 번만 더 숙고해 주십시오."
지미는 백작령이 과거처럼 유지되길 바랐다.
비록 레이가 주는 스트레스 탓에 머리털이 숭숭 빠져댔지만, 아이들이 배를 곯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그런 백작령이 앞으로도 유지되길 바랐다.
레이가 사라진다면, 지금까지 일궈놓은 대부분의 것들이 얼마 안 가 무너질 것이라는 건 지미가 가장 잘 알았다.
"숨길 수 있을 겁니다. 눈과 머리카락을 가릴 방법쯤은 넘쳐나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들킬 수밖에 없네."
백작의 목소리엔 확고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언젠가는 들킬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찾아올 것이다.
과장이나 겁박 따위가 아니었다. 빤히 보이는 미래였다.
백작의 의중이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느낀 지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레이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 됐지 않습니까."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는 지나치게 담대하고, 또한 불충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제국의 혼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황위를 이을 만한 작자들의 정통성은 다들 고만고만하다.
한때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1황자의 유일한 자식 정도 되면, 어미 출신이 어떻든 비벼볼 만 했다.
"제 동생은, 백작님께서 활용하고자 하면 그 혈통만으로 강력한 패가 될 겁니다."
동생의 정체를 평생 숨기고 살아가겠다는 설득은 어차피 안 통한다.
때문에 레이는, 귀족이라면 응당 품고 있을 야망을 한 번 찔러나 보았다.
허나 백작의 표정엔 조금의 갈등도 일지 않았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네."
몰락한 변방의 귀족 따위가 황족의 사생아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었다.
레이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백작이 아무리 관대해도 가문과 영지를 걸고 그딴 억지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레이...! 저 아이는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걸세! 저건 재앙 덩어리야!"
백작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해졌다.
백작은 답답해하고 있었다.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건가? 정 어미가 걱정됐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이런 미련한 고집을 부리는가?!"
"..."
다른 방법.
그래, 분명 조금만 타협했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도 있었을 터다.
예컨데, 아이를 바꿔친다든가 하는.
주변 영지를 돌다 보면 돈 몇 푼에 갓난아기를 넘겨주는 부모쯤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터다.
출산 직후 벨라에게 약이나 마법을 사용해 의식을 잃게 만든 후 아이를 바꿔치는 것 정도는 쉽사리 가능했을 것이다.
레이가 연기만 잘했다면 벨라는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으리라.
그럼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레이는 알고 있었다.
벨라의 인생이 기만 투성이었다는 걸.
몸을 팔아 돌봤던 가족에겐 모욕당했다.
전재산을 대가로 구한 남의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야 했다.
남에게 베풀었던 친절은 대개 업신여김으로 돌아왔으며, 혼약조차 남들의 수군거림 속에 거짓으로 맺어야 했다.
벨라의 인생은 정말이지 기만 투성이었다.
때문에 레이는, 그녀가 바라왔던 평생의 소원만큼은, 결코 기만할 수 없었다.
레이의 품에서 단검이 뽑혀 나왔다.
서로의 입장엔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간극을 메울 유일한 방법은, 폭력뿐이었다.
*
레이와 심각한 갈등이 생기는 건 필립스 백작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레이에게 쏟아부은 투자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금전적인 계산을 제외하고라도 레이라는 역사적인 인재와 원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 자체로 끔찍했다.
다만 백작은 레이의 냉정한 판단력을 믿었다.
백작은 일단 벨라가 낳은 붉은 눈의 아이부터 죽일 계획이었다.
물론 레이는 분노하겠지만, 레이가 아끼는 건 벨라의 아이가 아니라 벨라 본인이었다.
레이는 벨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선을 넘어 날뛰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열이 좀 식는다면, 레이는 아이를 죽이는 게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운 판단이었음을 납득해 줄 것이다.
백작은, 입안이 바짝 말랐음을 느끼며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 모두를 위한 선택임을 이해해주게."
필립스 백작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백작과 레이 사이에 끼어 있던 지미가 무심코 검을 들어 올렸다.
카각!!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지미는 볼 수 있었다.
탁하고 안타까운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백작의 눈동자를.
지미는 백작의 검을 막아내는 것 말고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백작 또한 지미의 발을 잠깐 묶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모하메드와 디디에가 레이를 향해 뛰쳐나갔다.
모하메드의 검에 검강이 서렸다.
모하메드가 있는 힘껏 레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가가각!!!
레이가 짧디짧은 단검으로 모하메드의 공격을 막았다.
단검 따위로는 곰만한 덩치를 지닌 모하메드가 휘두른 공격을 완전히 상쇄할 수 없었다.
검기와 검강이 부딪치는 순간 레이가 주르륵 밀렸다.
모하메드가 곧장 발을 뒤로 뺐다.
모하메드의 빈자리를 디디에가 대신했다.
아무리 레이가 단검을 들고 있다 해도 일대일에선 디디에가 필패였다.
허나 디디에는 단 몇 초만 시간을 끌면 됐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다가간 모하메드가 검을 들어올렸다.
옹알이도 제대로 못 하는 갓난아기를 벤다는 것은 모하메드에게도 대단히 부끄럽고 분하며 비극적인 일이었다.
허나 베어야만 했다.
아이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재앙을 타고났다.
마음을 굳게 먹은 모하메드가 검을 내려 베려고 했다.
그 찰나.
허공이 찢어졌다.
"?!!"
쩌어엉!!!!
간신히 방어에 성공한 모하메드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모하메드는 비틀거리면서도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레이의 손아귀가 텅 비어있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잡아챘다.
기이한 존재감을 발하는 은백색 검이 허공에서 뽑혀 나온다.
모두의 호흡이 덜컥 굳는다.
선뜻 이해 안 가는 기묘한 상황의 연속 속에서.
은백색 검을 보고 떠오른 억측이 모두의 뇌리를 두들겼다.
은백색 검이 레이의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돈다.
미약한 검기가 점멸한 순간.
재차 허공이 찢어졌다.
쩌저정!!
정말 미약한 검기였다.
때문에 백작도, 디디에도, 모하메드도 쉽사리 검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허나 그 미약한 검기가, 허공을 찢고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레이의 코어와 서클이 세차게 요동치며 냉기를 발산한다.
"함부로 내 동생을 건드리지 마."
분만실을 질주했던 냉기가 레이를 중심으로 압축된다.
"나의 어머니가 남은 생을 서서히 말라죽어 가는 꼴을 보느니 내 손으로 안식을 드릴 것이고..."
날뛰는 코어로부터 뻗어나온 정제된 마나가 수십 가닥의 검기를 이루었다가 이내 하나가 된다.
"나는 내 평생을 바쳐 제국을 저주할 거야."
그건 경고이자 선언이며 맹세였다.
레이는 전생에나 현생에나 죽지 못해 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삶 그 자체가 축복이라며 찬양했지만, 레이가 보기에 그건 배부른 자의 허영이었다.
고통과 후회, 허무로 점철된 삶은 저주이지 축복 따위가 아니었다.
레이는 벨라의 안위도 중요했지만, 벨라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행복이 선행되지 않는 삶에 목 매여 질질 끌려가는 꼴을 볼 생각은 없었다.
츠즈즉!
레이가 검강을 두른 은백색 검으로 필립스 백작의 발아래를 겨누었다.
"필립스 백작, 내가 가진 모든 걸 내보였다."
그러니까, 선택해라.
"당신이 여전히 내 동생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겠다면, 나는 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백작령을 떠나겠다."
레이는 백작에게 많은 빚을 졌다.
허나 그만큼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여러 위협에서 백작령을 구했으며, 미래가 찬란한 아이들을 백작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였다.
이제 와서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갈라서면 될 뿐이었다.
레이는 가슴이 쓰라림을 느꼈다.
그게 코어와 서클의 부하 탓인지, 아니면 이제 헌신짝처럼 버릴 인연들이 건넸던 온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에게 우선순위는 항상 명확했다.
다른 이들을 위해 벨라를 희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가 다시 물었다.
"백작님, 어찌하실 겁니까?"
"..."
필립스 백작은 레이의 타오르는 검강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검을 집어넣었다.
"그대의 동생은 해치지 않겠네."
백작이 먼저 전제를 깔았다.
백작은 레이의 겁박이 허투가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결론을 내리기 위해선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봐야 할 것 같군."
*
한바탕 칼부림을 하고 자리를 옮기기 전.
레이는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아주 간단한 환영 마법을 걸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처럼 보였고, 눈은 꼭 감고 있었다.
레이는 아이를 앤드리에게 맡겼다.
이제 와서 아이를 남에게 건네주는 건 껄끄러웠지만, 백작이 레이를 아는 만큼 레이 또한 백작을 알았다.
레이는 아이를 해치는 순간 타협은 없으리라 경고했다. 백작도 이를 받아들였다.
백작은 레이가 허언을 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레이가 평범한 엑스퍼트 급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현 시점에서 레이는 영주성 기사 전력을 몽땅 끌고와도 발을 묶을 수 있을까 말까한 강자였다.
이제 백작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레이와 벨라를 영지에서 쫓아내고 남은 흔적을 말살하거나.
혹은 거대한 리스크를 지고 레이와 계속 함께하거나.
레이와 백작이 분만실을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모조리 둘의 뒤를 따랐다.
디디에와 모하메드를 제외하면 대체 무엇 때문에 마찰이 있었는지 다들 모르는 눈치였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백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다들 앉아서 이야기하지. 백작은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