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3)
103화
가을이 다가왔다.
날씨가 쌀쌀해져 갈수록 벨라의 배가 부풀었다.
만삭에 가까워진 벨라의 배를 보며 레이는 슬슬 영주성을 찾아갈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여기서 버텨봤자 필립스 백작이 사람을 보낼 터다.
"엄마, 할 얘기가 있어."
레이는 벨라를 앉혀 놓고 출산을 영주성에서 진행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벨라가 자기 손가락을 매만지며 목소리를 떨었다.
"아들..."
벨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바보가 아닌 이상 굳이 출산을 영주성에서 진행하자는 저의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가슴을 가득 메우는 불안 탓에 벨라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졌다.
레이가 얼른 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 이상한 걱정 안 해도 돼."
레이는 영주성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며 벨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도 소문 정도는 들어봤겠지만, 제국의 귀족가들 중에 특이한 외견이 대대로 유전되는 가문이 몇 군데 있어."
머리카락이나 눈 색이 독특하거나, 신체의 특정 부위가 유난히 발달한 경우도 있었다.
"만약 내 동생이... 그런 귀족가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조치'가 좀 필요하잖아."
"조치...?"
"조치라고 해도 별거 아니야."
벨라의 손을 더욱 꽉 말아쥔 레이가 반댓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동생이 이상한 분홍색 머리카락이라도 가지고 태어나면 염색이나 좀 시키려고. 염색으로 해결 안 될 부위면 마법사님 도움받아 환영 마법 같은 걸로 가리면 돼."
장기적으로는 좀 더 확실한 해결법을 찾아야겠지만, 당장은 그 정도 조치로도 충분할 것이다.
레이는 그리 말하며 벨라를 달랬다.
"괜히 마을 사람한테 동생을 보였다가 의심이라도 받으면 곤란하잖아. 그러니까 차라리 영주성에서 안전하게 출산하고 조치 취할 거 있으면 취하라고 백작님이 배려해주신 거야."
"그렇...구나."
벨라의 거칠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레이가 벨라의 손을 자기 얼굴로 가져가 비비며 가볍게 웃었다.
"내 동생은 내가 지킬 테니까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마. 약속할게."
"..."
벨라는 가만히 레이를 바라봤다.
툭 하면 실종되거나 사고를 쳐대서 걱정을 많이 끼치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의지되며 믿음직한 아들을 바라봤다.
레이의 얼굴을 쓱쓱 쓰다듬어본 벨라가 따뜻하게 웃었다.
"그래, 아들이 지켜준다는데 엄마가 믿어야지?"
이 엄마가 아들을 못 믿으면 대체 누구를 믿겠니.
진심이 가득 담긴 벨라의 중얼거림이 잔잔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얼마 후.
벨라는 이때 아들놈을 믿은 걸 뼈아프게 후회하게 된다.
*
벨라가 영주성으로 몸을 옮겼다.
영주성에서 머물기 시작한 후 벨라는 영주성의 고용인들에게 굉장히 좋은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벨라는 자신이 과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가에 대해 불안해했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일단 백작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백작은 이번 일로 추문이 돌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문의 일원들만 이용 가능한 영주성의 분만실에 외부인을 들이는 건 누가 봐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사안이었다.
허나 잠깐 돌다 사라질 추문 따위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추문 따위는 정말이지 하찮은 문제에 불과했다.
필립스 백작은 앤드리라는 중년 여인에게 벨라의 생활을 돕게 했다.
귀족가들은 전통적으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산파를 따로 두고 있었고, 앤드리는 필립스 백작가의 산파였다.
입이 아주 무겁게 교육된 산파인 앤드리는 이런저런 의문을 기억 뒷편으로 치워버리고 충실히 벨라의 생활을 도왔다.
그렇게 벨라가 영주성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보름이 조금 넘어갔을 때.
출산의 징후가 나타났다.
벨라는 앤드리의 도움을 받아 분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민감한 문제들, 예컨대 관장이나 제모와 같은 부분도 전부 앤드리가 곁에 붙어서 처리해 주었다.
때문에 벨라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이를 앤드리가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벨라가 모든 분만 준비를 마치고 호흡법을 활용해 진통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도, 앤드리는 벨라 곁에 있었다.
헌데 본격적으로 진통 주기가 짧아지자 앤드리가 모습을 감췄다.
"...화장실 가셨나?"
벨라는 불안을 억누르며 차분히 앤드리를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분만실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끼긱!
벨라가 앤드리를 반길 준비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헌데 문 너머로부터.
벨라의 예상을 한참 넘어선 인물이 천으로 입을 가린 채 들어오고 있었다.
벨라가 벌리고 있던 다리를 반사적으로 좁히며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들...?"
"아, 엄마."
옷이고 장갑이고 전부 다 깔끔히 소독하고 분만실로 들어온 레이가 산뜻하게 웃으며 벨라에게 다가갔다.
"내가 고민해 봤는데."
"...?"
"내 동생은 내가 직접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대단히 정신 나간 소리에 벨라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
레이는 대체 누구에게 벨라의 분만을 부탁해야 할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이번 일은, 벨라의 아이를 받는 당사자에게도 굉장히, 정말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황가의 핏줄을 두 눈으로 보는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아마도 평생을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제국에서,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내 입을 막기 위해 자객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 말이다.
지미 또한 비슷한 이유로 레이에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불만을 늘어놓고는 했다.
또한 레이는, 오랜 고민 끝에 이번 일에서 만큼은 그 누구도 믿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필립스 백작도 백작령의 기사들도 심지어 지미와 매튜조차, 완전히 믿기 어려웠다.
때문에 레이는 결심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가장 먼저.
내 동생 녀석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물론.
벨라가 동의한 내용은 아니었다.
벨라가 진통이 오는 배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누가 얘 좀 데리고 나가요!!!!!!!!"
"엄마, 걱정 마. 이론은 완벽히 익혔어. 산파 따라다니며 견학도 몇 번이나 했다니까?"
레이는 요 몇 달 사이 아이 받는 광경을 질리도록 봤다.
더군다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험 많은 산파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도 가까운 것에 대기시켜 두었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레이가 빼먹은 건 단 하나였다.
벨라의 마음의 준비 말이다.
"나가라고옥!!!"
벨라는 정신이 없었다.
분만실에는 레이 말고도 필립스 백작과 기사 두 명, 그리고 지미까지 들어와 있었다.
벨라는 의아했다.
귀족들은 여자가 분만할 때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지켜보는 문화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뭐, 벨라도 백작이나 지미가 출산을 지켜보는 것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남 앞에서 다리를 한두 번 벌려본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이에게 애를 받게 하는 건.
결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 빨리 안 나가?!!!!!"
"엄마, 소리 그만 지르고 다리나 더 벌려봐."
효심이 넘쳐 흐르는 레이의 대꾸를 듣고 분만실 구석에 서 있던 지미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용병 생활을 하며 온갖 추한 꼴은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던 지미도 이런 개판은 처음이었다.
벨라는 레이를 걷어차서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진통 탓에 그럴 체력도 정신도 부족했다.
레이가 바둥대는 벨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익숙한 감각에 벨라가 잠깐 진정을 되찾자, 레이가 벨라의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였다.
"엄마, 아들 믿지?"
"?"
"아들 믿는다고 했잖아."
"아들은 믿지만..."
"그럼 아들 믿고 다리 좀 벌려봐."
"그냥 빨리 꺼지라고오!!!!!"
결국 벨라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벨라는 레이를 쫓아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허나 시간은 벨라의 편이 아니었다.
진통 주기가 계속해서 짧아진 끝에 경부가 완전히 열리고 양수가 흘렀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벨라는 레이에게 분만을 맡겨야 했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할 짓이었지만, 출산의 고통 탓에 정신이 왔다갔다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세히 서술하기엔 굉장히 겸연쩍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레이의 눈에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 위엔 얇게나마 머리카락이 덮여 있었다.
숨을 몰아쉰 레이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폈다.
아이의 머리카락 색은...
붉은빛이 어린, 은색.
'시발.'
출산 과정에서 발생한 약간의 출혈 탓에 조금 붉게 보일 뿐.
아이의 머리카락은 명백히 흰색 내지 은색에 가까웠다.
벨라는 아이를 낳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이의 머리가 보인 순간 분만실 내의 긴장감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아직은 걸어볼 희망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황족의 외적 형질이 완전히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니 아이의 눈깔이 붉은색만 아니면 됐다. 마나를 활용하기 시작하면 세로로 갈라지는 그 빌어먹을 붉은 눈깔 말이다.
만약 벨라의 아이가 용혈을 굉장히 옅게 타고났으며, 평범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면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이야 뭘 잘못 먹어 탈색됐다고 변명도 가능하고, 정 껄끄러우면 염색시키면 될 일이었으니까.
시간이 계속 흘렀다.
심각한 난산은 아니었으나 아이가 나오기까지 벨라는 꽤 고생해야 했다.
"아악...!!!"
벨라가 탄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아이가 벨라의 뱃속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레이는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 벨라가 태반을 배출하는 걸 도운 후 벨라의 몸에서부터 출혈이 심각하지 않은 지 체크했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레이가 아이의 코와 입안의 이물질을 제거한 후 깨끗한 천으로 아이를 감쌌다.
갓 태어난 동생은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아이의 눈가를 자세히 살피면 동공의 색이 비칠 것 같았지만, 레이는 확인을 뒤로 미뤘다.
"끄애애앵!"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레이가 벨라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겨주었다.
"딸이야, 엄마."
"정말?"
벨라가 화색 하며 아이를 받았다.
벨라는 울먹임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아이에게 부디 축복이 깃들길 기도한 후 완전히 탈진해 기절하듯 잠들었다.
레이가 급히 벨라를 살폈다.
다행히 호흡도 안정적이었고 맥박도 문제없었다.
더 이상 레이가 산파로서 할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레이는 자리를 간단히 정리한 후 아이를 옆에 있던 침대에 눕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계속해서 울린다.
허나 아이의 울음소리를 벗겨 내고 나면, 적막한 침묵만이 분만실을 차갑게 달궜다.
이제 아이의 눈동자를 확인해봐야 했다.
장갑을 벗어 던진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스스로도 지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레이를 향한다.
레이는 약간의 허탈함과 함께,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될 대로 돼라지.'
그래, 이미 벌어진 판이다.
이제 와서 동생을 반품하거나 교환할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이면 될 뿐이었다.
레이가 핍립스 백작과 기사들, 그리고 지미를 둘러보며 조금 들떠 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자, 지금부터 눈깔 확인 들어가겠습니다."
붉은색만 아니면 된다. 붉은색만.
붉은색만 아니라면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터다.
레이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린다.
들어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인 동생의 눈동자는.
붉은색.
"애미 시발."
카가가강!!!
검 네 자루가 동시에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