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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2화 (102/446)

동생 (2)

102화

필립스 백작령 주변 냇가에서 몸을 닦은 레이는 바로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서 일을 보던 아델이 레이의 몰골을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들어오렴."

레이는 아델의 안내를 받아 병상에 누웠다.

아델이 상처를 살피기 위해 이곳저곳을 눌러볼 때마다 레이가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악!"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발을 헛디뎌서 절벽에서 굴렀어요."

"그 핑계만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듣는 것 같구나. 거짓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아델은 레이를 핀잔하면서도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맛이 가기 직전이었던 레이의 육체가 게걸스레 신성력을 받아들인다.

아델이 자기 몸에서 신성력이 쫙쫙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중상이 아니고야 이 정도 흡수율을 보일 수가 없었다.

레이는 아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내심 안도했다.

'신성력 아니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병신 됐지.'

레이가 신성력의 메커니즘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신성력이 대충 어떤 효과를 지닌 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잘려나간 부위까지 복구 가능한 걸 보면 단순히 세포 분열을 활성화시키는 수준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유전 물질에 새겨진 정보를 기반으로 신체를 복구시키는 것 같은데...'

이리 가정하면 신성력이 노화나 선천적 질병을 해결 못 하는 게 설명이 됐다.

결국 타고난 설계 결함은 어쩔 수 없단 소리였다.

'근데 이러다 진짜 죽겠네.'

신성력으로도 해결 못 할 육체의 피로와 손상들이 계속해서 쌓여가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회복을 위해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근래 사건 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혹사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이가 자기 팔찌를 매만졌다.

그나마 간이 제세동기가 팔목에 달려 있어 자다가 비명횡사할 걱정은 덜었다.

'...여벌 목숨이라 생각하니 팔찌 빌려주는 게 좀 부담스러워지는데.'

그래도 만약을 위해 드래곤 하트 이식 방법은 완성시켜 놔야 했다.

레이가 자기 팔찌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델이 레이에게 다가와 기사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레이가 옆에 있던 루나의 등을 툭툭 쳤다.

"루나, 자리 좀 비켜줄래?"

"..."

교회까지 레이를 쫄래쫄래 쫓아왔던 루나가 입을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가 재차 재촉하자, 루나는 마법진을 하나 만들어내더니 레이의 팔뚝에 덧씌웠다.

레이가 팔뚝 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법진을 들어 보이며 로필렌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추적 마법이네.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방향 정도는 특정할 수 있어."

"에헤잇...!"

레이가 기겁하며 마법진을 부수자 루나가 신경질적으로 레이의 가슴 위를 내려쳤다.

무게가 실린 일격에 레이가 켁켁 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어억...!!"

데굴데굴 구르는 레이를 두고 루나가 볼을 빵빵히 부풀린 채 병실을 나갔다.

루나가 사라지자 젠킨슨과 디디에가 병실로 들어왔다.

"레이! 대체 뭘 하다 온 거냐?!"

젠킨슨이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레이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레이는 이번 일을 상당히 충동적으로 진행했다.

앞뒤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지른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하고 급하게 움직였다.

때문에 제대로 된 변명도 준비해 놓지 못했다.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는 젠킨슨을 디디에가 억지로 말린 후 레이를 보며 한숨 쉬었다.

"레이, 일단 설명을 부탁한다."

"음..."

레이는 떠듬떠듬 변명을 입에 담았다.

레인저의 내분이 발생했고, 내분 탓에 레인저 여럿이 멋대로 백작령 안에 발을 들였다.

백작령에서 장교급 레인저와 접촉한 후, 그를 이용해 산맥에서 발생한 레인저들의 내분 상황을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헌데 전투에 휘말려 복귀가 늦어졌다.

레이가 보기에도 대단히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레인저들의 내분이 종결된 것 같아요. 백작령도 걱정을 좀 덜어도 될 것 같아요."

레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젠킨슨이 병상 옆의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쾅!!

"레이!! 제정신이냐?"

젠킨슨으로서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레인저를 잘못 자극하면 필립스 백작령 전체가 위험해진다.

함부로 레인저들의 내분 상황에 간섭해 전투까지 벌였다는 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이었다.

레이가 장교급 레인저의 조력을 얻어 산맥에 남긴 자신의 흔적을 숨겼다고는 했지만, 장교급 레인저가 레이를 배신하지 않을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레이, 왜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한 거냐?"

젠킨슨이 연거푸 레이를 다그쳤다.

디디에도 더 이상 젠킨슨을 말리지 않았다.

디디에는 지금 진지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레이에게 너무 관대하게 굴었던 건가?'

레이가 이제까지 주제넘은 행동을 많이 하긴 했다.

허나 대개의 경우, 레이가 올바른 판단을 해왔기에 좋게좋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레이가 자기 힘에 취해 너무나 철없게 행동한 것처럼 느껴졌다.

디디에가 가만히 서 있으니 갈수록 젠킨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이는 묵묵히 젠킨슨의 고함을 들었다.

백작령을 지키는 기사들이라면 당연히 격분해야 할 상황이었다.

악마의 사도와 격전을 치르고 왔다고 고백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레이는 아직 이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젠킨슨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레이를 보고 이빨을 꽉 물었다.

젠킨슨도 알고는 있다.

지금까지 레이가 보여주었던 성과를 감안하면, 분명 이번에도 이유 없이 돌발 행동을 한 것은 아닐 터다.

허나 레인저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적어도 필립스 백작과 상의를 해야 했다.

젠킨슨이 그 점을 다시 한 번 짚어주려다 문득 옆으로 눈을 돌렸다.

로필렌이, 벽에 등을 기대고 짝다리를 짚은 채 젠킨슨을 흘겨보고 있었다.

젠킨슨은 괜히 더 열이 받아 로필렌에게 따졌다.

"로필렌 님, 대체 시그니 산맥에 가서 뭘 하다 오신 겁니까?"

왜 보고도 없이 거길 들어갔냐.

왜 레이를 말리지도 않았냐.

거기 들어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런 다양한 질책이 담겨 있는 질문에, 로필렌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든 채 답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멸망을 막아내고 왔습니다."

잠시 눈을 깜박인 젠킨슨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지금 비꼬십니까?"

"어머, 그리 들리셨습니까? 그것참 유감이군요."

젠킨슨과 로필렌이 서로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새끼는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깝치지?

계속되는 신경전 속에서 레이가 두 손을 크게 맞부딪쳤다.

모두의 이목이 쏠리자 레이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 압니다만... 제가 지금 몸이 많이 상해서 하루 정도만 휴식을 취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레이는 오늘은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고 싶었다.

문 너머에서 루나가 은색 안광을 빛내며 병실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젠킨슨의 머리 위에 화염구라도 쏘아낼 기세인지라, 괜히 레이가 더 눈치가 보였다.

젠킨슨은 레이를 노려보다 혀를 짧게 차더니 결국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일단 몸부터 회복해라."

"감사합니다, 마스터."

"다음엔 더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잘 쉬어라."

젠킨슨과 디디에가 병실을 나섰다.

레이의 말만 믿고 경계를 풀 수는 없었으므로, 두 기사는 앞으로 열흘 정도는 추가 근무를 계속해야 했다.

피로가 느껴지는 젠킨슨과 디디에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가 착잡한 얼굴을 했다.

*

레이는 치료를 받은 후 몇 번 더 해명의 자리를 가졌다.

변명이 워낙 궁색했던지라 질책을 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레이는 필립스 백작과 기사들에게 1황자에 관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것도 분명 고려해 보았으나, 일단은 숨겼다.

물론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허나 분명한 갈등 요소가 하나 남아 있었다.

벨라의 아이.

레이는 그 하나 때문에, 자기 '전력'을 숨겼다.

벨라의 아이에 관한 문제만 원활히 해결되면 필립스 백작과 기사들에게는 1황자에 관한 이야기를 터놓을 생각이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느끼며 레이가 벨라와 지미의 집에 들렀다.

"엄마? 집에 있어?"

"아들!!"

벨라는 레이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직접 과일을 깎아주었다.

어느새 벨라의 배는 많이 부풀어 있었다.

벨라는 자주 자기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레이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래도 벨라가 행복해하는 것에 안도하며 다 먹은 과일 접시를 치웠다.

"엄마, 애 이름은 정했어?"

레이가 별생각 없이 묻자 벨라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고민해 봤는데, 아들이면 '프리드리히'로 하고 싶고..."

프리드리히?

레이는 할 말이 있었지만 일단 침묵했다.

벨라는 아이가 태어나는 상상만 해도 행복한지 웃음꽃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딸이면 '아나스타샤'가 어떨까 싶어."

"..."

레이의 뇌리에 난데없이 옛날에 보았던 책 내용이 플래시백 됐다.

[섬찟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오르자, 굴욕적인 자세로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발가락을 오므리며 경련했다.

"레온하르트! 미쳤느냐?! 네가 감히...!!"]

"엄마, 잠깐만."

레이가 자기 미간을 꾹꾹 누르다 손을 저었다.

"다른 이름이 좋을 것 같아."

"왜? 아들 듣기엔 별로야?"

"그러니까..."

레이는 고민했다.

동생 이름이 야설 주인공 이름이랑 똑같아서 껄끄럽다고는 아무리 레이라도 말하기 힘들었다.

레이가 적당히 돌려 말했다.

"이름이 너무 귀족 이름 같잖아. 난 평범한 게 좋을 것 같아."

"...그런가?"

벨라는 아쉬워하면서도 납득했다.

뱃속의 아이가 귀족의 피를 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라도, 굳이 남의 이목을 끌만한 이름은 자제하는 게 좋았다.

벨라는 자기 아이에게 멋지고 예쁘고 고상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레이의 충고에 따라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한 번 더 생각해볼게."

벨라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 레이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오니 지미가 과일을 놓았었던 접시를 닦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었단 뜻이다.

왠지 모르게 지미의 뒷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진 레이가 지미의 곁에 서서 같이 접시를 닦았다.

접시를 뽀득뽀득 닦던 레이가 불쑥 물었다.

"품종이 뭘까요?"

앞뒤 없는 질문에 지미가 눈을 깜박였다.

"...요즘 개 키우냐?"

"아뇨, 제 동생 녀석 품종요."

"..."

지미는 말없이 레이를 쳐다보다, 이 새끼가 원래 미친놈이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황가 쪽만 아니면 돼."

"머리 털이 은색만 아니고, 눈깔이 빨간색만 아니면 되죠."

그 말이 그 말이었으나, 약간은 달랐다.

아프텔에게 듣기로는 정말 정말 드물게 황가의 외적 형질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만 황가 핏줄이 아니면 됐다.

레이와 지미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설거지에 열중했다.

벨라가 부푼 배를 잡고 나와보더니 미안한 얼굴을 했다.

"가만히 두시면 제가 할 텐데..."

"아이 나올 때까지는 남편 노릇 해야지."

지미가 덤덤하게 답했다.

벨라는 잠깐 서성이다 의자에 앉아 지미와 레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거짓이라 해도 언젠가 꿈꿔 왔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생글생글 웃던 벨라가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하는 것을 느끼고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곧 출산일이 다가온다.

벨라가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아이를 받아달라 부탁하는 게 좋을까요?"

"..."

레이와 지미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필립스 백작령에도 산파는 몇 있었다. 꼭 산파가 아니더라도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문제는 벨라 뱃속의 아이가 황가의 핏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황가의 핏줄이라면, 나올 때부터 황족의 외적 특성은 다 갖추고 나올 확률이 높았다.

레이와 지미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

2달 후, 언박싱 데이.

필립스 백작가 영주성의 분만실 내부.

계속되는 진통 탓에 땀에 푹 젖어있는 벨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꽥꽥 소리쳤다.

"야!!!!! 빨리 안 나가?!!!!!"

벨라가 기겁하며 바둥거리자, 벨라의 가랑이 사이를 지켜보던 레이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엄마, 소리 그만 지르고 다리나 더 벌려봐."

그꼴을 지켜보던 지미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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