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1)
101화
산산이 쪼개진 드래곤 하트로부터 터져 나온 만물을 불태우는 화염이 산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전장을 지켜보던 모두가 분출되는 열기를 피해 다급히 도주했다.
방대한 에너지의 격류가 넓게 퍼지다 못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후우욱!!
불어닥친 열풍이 한바탕 산맥을 뒤집어 놓았다.
열기의 근원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함부로 숨을 몰아쉬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열풍이 조금씩 가라앉자 하나둘 전투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산의 절반이 내려앉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레인저들 모두가 비슷한 확신을 품었다.
저 폭발의 한가운데서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고.
허나 얼마 안 가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거대한 분화구처럼 변한 장소 위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트득!
레이는 마그마처럼 변한 지면에 발을 내디뎠다.
사방이 들끓어댔지만 레이의 코어가 발산하는 냉기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레이의 걸음을 따라 얼어붙은 길이 만들어진다.
카리우스가 최후를 맞이한 곳에는 모로스가 홀로 꼿꼿이 서 있었다.
레이가 다시 모로스를 움켜쥐었다.
모로스 옆에, 아주 자그마한 무언가가 붉게 반짝였다.
레이가 그 붉게 반짝이는 자그마한 돌을 집어들었다.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쯤 되는, 카리우스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카리우스가 소멸한 탓인지 이 자그마한 파편에는 더는 악마의 권능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자그마한 파편을 챙기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인저들이 몰려와 분화구처럼 변한 산을 감싸듯 포위하고 있었다.
레이는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는 한계였다.
아직 코어와 서클은 만약을 대비해 회전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 와서 믿을 게 로필렌 아가리 하나라는 사실에 레이는 남몰래 실소했다.
레인저들에게 포위된 로필렌의 목에는 칼만 여섯 자루가 겨누어져 있었다.
로필렌이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레인저 중 하나가 선수를 쳤다.
"우리는 관계없는 일이다."
레인저가 시체 하나를 레이 쪽으로 던졌다.
*
사령검.
네크로맨서 혹은 사령군주라 불렸던 과거의 사도가 사용한 유물이다.
아르투르는 이 사령검을 매개체로 삼아 카리우스에게 탐욕의 축복을 부여해 부활시켰다.
허나 카리우스가 사도로 각성할 줄은 아트투르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다.
더 나아가, 각성한지 얼마 안 되어 대단히 미흡하다 해도, 설마 탐욕의 사도를 단신으로 밀어붙일 존재가 갑자기 등장할 줄은 더욱 예상치 못했다.
카리우스가 레이를 상대로 모든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아르투르는 바로 도망쳤다.
허나 레인저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곧장 아르투르를 추적해 붙잡았다.
레인저들은 고문이라도 가해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으나, 아르투르는 붙잡힌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미 사망해 있었다.
부단장 직위를 지닌 레인저가 아르투르의 시체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우리와 무관하다. 악마 숭배의 용의가 있는 자를 붙잡았으나 자결했다."
부단장의 얼굴 위로 짜증과 수치가 치솟았다.
제국이 보낸 자객에게 변명을 늘어놓는 상황 자체가 짜증 났고, 늘어놓는 변명의 내용이 자기가 듣기에도 뻔뻔하고 편의적이어서 수치스러웠다.
레이는 가만히 부단장을 바라보다, 한 마디 툭 던졌다.
"설마 그놈 하나뿐일까."
"...!"
레인저, 더 넘어가 루비하 왕국 전체에 악마 숭배 혐의를 덧씌울 생각인가.
부단장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방울진 순간, 레이가 모로스를 아공간으로 수납했다.
"주의해라.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왕국도 제국도 악마의 농락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항상 경계해라. 악마는 영악하고 잔혹한 존재니."
도저히 가볍게 흘러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레인저들의 표정이 새삼스레 심각해졌다.
레이가 손을 대충 휘젓자 로필렌에게 검을 겨눴던 레인저들이 눈치를 보다가 마지 못해 검을 치웠다.
왕국으로 망명했던 카리우스가 악마의 권능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분명 왕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할 터다.
허나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레이를 공격한다는 건, 상당히 염치없는 짓거리임과 동시에 굉장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제국이 미치지 않은 이상 레이 쯤 되는 전력을 홀로 타국에 보냈을 리는 없다.
레인저들의 눈을 피한 제국의 자객들이 주변에 여럿 더 있을 게 분명했다.
레인저 대다수를 희생한다 해도 이들 모두를 잡아 죽일 수 있을지, 부단장은 회의적이었다.
결국 길이 열렸다.
레이와 로필렌은 레인저들의 시선을 받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레인저들은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적어도 레이가 느끼기엔 그러했다.
레이는 호흡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1황자는 죽였으나 이번 일에 대해 왕국과 제국의 수뇌부가 어찌 반응할 지는 레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망명한 1황자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게 제국한테나 왕국한테나 밖으로 떠벌리고 싶은 일은 아닐 테니...'
의외로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요즘 제국은 1황자 문제가 아니라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1황자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한 병력이 아직까지 안 움직인 것을 보면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함이 틀림없었다.
"이봐."
나무 위에서 브랜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어떻게 처리할 거야?"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레이가 나무 위를 흘깃 쳐다봤다.
브랜딜은 다른 레인저와 달리 아는 게 너무 많았다.
단기적으로 보면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 게 맞았다.
"네가 계약 각인이라도 새길 수 있었다면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그거 아쉽게 됐네."
브랜딜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계약 각인으로 무언가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나무에서 내려온 브랜딜을 가만히 쳐다본 레이가 혀를 짧게 찼다.
"인생이 별로 재미없는 것 같던데, 어차피 버리려던 목숨 날 위해 써먹는 건 어때?"
"오, 날 믿어?"
"내가 그렇게 순진해 보이나?"
레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브랜딜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다만, 리스크를 지더라도 브랜딜의 조력이 필요했다.
"뭐... 날 따른다면, 역사에 이름 한 줄은 남겨줄게."
"매력적인 제안이네."
악마의 사도를 정면에서 꺾어내는 그 전율적인 광경은 여전히 브랜딜의 각막에 새겨져 반짝이고 있었다.
레이에게 충성을 바치진 못하더라도 레이의 조력자로 남을 용의는 브랜딜에게 충분히 있었다.
"살려준다면 최대한 협력하지."
"당장 원하는 건 세 가지야."
시그니 산맥에 레이와 로필렌이 오고 간 흔적을 지워줄 것.
제국의 관계자가 1황자와 관련해 시그니 산맥을 찾아왔을 때 거짓 정보를 흘려줄 것.
"마지막으로, 이번과 같이 왕국에 악마와 관련된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필립스 백작령 영주성으로 은밀하게 서신이라도 보내. 필립스 백작에게는 내가 미리 말해두도록 하지."
"흠..."
대충 레이의 의도를 이해한 브랜딜이 솔직히 답했다.
"내가 이미 제국의 첩자라 한 번 의심 받았던 몸이라서, 네 생각 만큼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어. 재수가 없으면 내 목이 아예 잘릴 수도 있고."
"그거야 네가 잘 처신해야할 문제지."
"뭐, 알겠어."
브랜딜이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어."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랜딜이 숲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레이는 자기가 실수한 게 아닐까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건 알았지만 레인저 측의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브랜딜의 도움이 없다면 왕국과 제국에 추적당할 건덕지를 너무 많이 남겨 주게 된다.
흔적을 지우고, 먹히든 안 먹히든 제국을 교란할 정보를 흘리고, 또한 왕국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경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레이는 당장의 불안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후우..."
"괜찮으십니까?"
"힘들긴 하군. 지금 신체가 영 받쳐주질 못해."
레이는 사도와의 전투를 상기했다.
만약 사도라는 존재가 악마에게 실시간으로 권능을 받아쓰는 존재였다면 훨씬 대적하기 편했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전송되는 힘쯤은 공간검으로도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
허나 사도란 악마의 권능 일부를 통째로 머금은 존재였다.
제 아무리 공간검이라도 초월적 존재인 악마의 권능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로필렌이 챙겨왔던 포션 하나를 꺼내 주었다.
성능이 그리 대단한 포션은 아니었지만 일단 온몸에 들이부었다.
"바로 교회로 가봐야겠는데..."
화끈거리는 피부를 느낀 레이가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쯤 되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거 때문에 더 고생했군."
악마의 권능이 드래곤 하트와 뒤섞이며 만물을 불태우는 불길을 만들어 냈다.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었다면 카리우스에게 접근도 못 했을 것이다.
레이는 세리아의 아티펙트에서나 보았던 드래곤 하트가 왜 카리우스에 심장에 박혀 있는 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헌데 로필렌이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을 바라보더니 작게 감탄했다.
"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무슨 소문?"
잠시 눈치를 본 로필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드래곤 하트 조각 아닙니까? 황족이 체내에 흐르는 용혈을 다루기 위해 드래곤 하트를 심장에 이식한다는 소문이 떠올랐습니다."
"아프텔."
레이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아프텔이 차단막을 생성했다.
로필렌이 차단막과 거리를 벌린 뒤 눈치껏 등을 돌렸다.
레이가 아프텔을 향해 물었다.
"저게 지금 무슨 소리야?"
[황족의 신체엔 드래곤의 피가 섞여 흐릅니다. 순수한 용혈은 혈액이라기보다는 마나 덩어리에 가까운데,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장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한다고?"
[정확히는 황가의 선조가 되는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입니다.]
"이식 시기는?"
[황실 기밀 사항이나, 대략 10살 전후로 파악됩니다.]
"이식 방법은 알고 있어?"
[역시나 황실 기밀 사항이긴 하나, 대략적인 과정은 파악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성년까지 생존 불가합니다.]
"이걸로도 황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
레이가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을 내밀었다.
아프텔이 잠시 침묵했다.
[애매하군요. 아이의 재능이 평범하다면 괜찮겠지만, 용혈의 농도가 진하게 발현된다면 그걸로는 버텨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레이가 이를 잘게 갈더니 차단막을 벗어났다.
발소리를 들은 로필렌이 뒤를 돌아보자 레이가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을 로필렌에게 던졌다.
"로필렌, 간간이 팔찌 빌려줄 테니까, 아프텔 조력 받아서 드래곤 하트를 심장에 이식하는 방법을 완성해."
"어... 황족이 아닌 신체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했다간 부작용을 예측할 수가..."
"내 몸에 이식할 거 아니야."
로필렌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로필렌은 언제나 레이가 까라면 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흐흐..."
막상 드래곤 하트의 파편의 파편을 연구할 생각을 하니 입가가 헤실헤실 풀렸다.
다시 산행이 시작됐다.
휴식 없는 산행 끝에 레이와 로필렌은 필립스 백작령에 거의 도착했다.
저 멀리 익숙한 풍경을 확인한 레이와 로필렌이 동시에 한숨을 삼켰다.
둘 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쨍쨍했다.
레이나 로필렌이나 몰골이 말이 아닌지라 사람들을 피해 백작령으로 들어서려는데 웬 쬐그만한 아이가 산길을 막고 서 있었다.
레이가 반갑게 웃었다.
"루나,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사실 레이도 루나가 왜 이 산길을 지키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워낙 마나에 민감한 아이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던 전투였지만 대단히 고농도의 마나가 맞부딪친 격전이었던지라 루나 또한 마나의 파동을 느낀 모양이었다.
루나가 말없이 다가오더니 두 팔을 앞으로 벌렸다.
"냄새날 텐데?"
레이는 머쓱해하면서도 루나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평소라면 가볍기 그지없을 루나의 무게가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루나가 레이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역시나 평소라면 닿았는지도 모를 주먹질이었으나, 루나의 주먹이 가슴에 꽂힐 때마다 레이는 '억억' 소리를 냈다.
몸 상태가 개판이었다.
루나는 주먹질을 멈춘 후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체력도 열심히 기를게요."
"루나가 너무 방 안에만 있기는 해."
"체력 많이 기를 테니까 다음부터는 나도 데려가요. 나도 레이를 도울 수 있어요."
레이가 루나의 은색 눈동자를 마주 봤다.
루나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미흡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레이를 제외하면 필립스 백작령 최고 전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내가 왜 널 데려가지 않았을까.'
레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껏 뽑은 레전드리 고아를 위험한 전장에 데려갔다가 어이없게 날려 먹을 수 없다는 판단 탓이 컸다.
그리고 아직은, 레이에게 루나는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였다.
레이는 새삼스레 궁금했다.
'원래 네가 그려갔던 미래는 어떤 길이었을까.'
그리고.
'널 여기까지 인도해준 것으로, 백작령에서의 내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레이는 루나를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으려다, 손이 더러운 걸 깨닫고 이마를 한 번 톡 쳤다.
"다음엔 고민해 볼게."
"...다음엔 나도 데려갈 거예요?"
"고민해 본다니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에 루나는 드물게 진심으로 투덜거리며 볼을 빵빵히 부풀렸다.
"자꾸 무리하면 키 안 커요. 꼬맹이 돼요. 레이는 꼬맹이야."
"요하나한테 안 좋은 말만 골라 배웠네."
"아우으으..."
루나의 뺨을 잡아당긴 레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오니 싱숭생숭한 감정이 다시 가슴을 메운다.
언박싱 데이가 다가온다.
빌어먹을 동생의 품종이 무엇일지 밝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가 남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동생을 내 손으로 애비 없는 새끼로 만든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이미 충분히 꼬여있는 가정사가 더 꼬이길 레이는 바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