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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0화 (100/446)

연기 (4)

100화

모로스를 휘감은 검강으로부터 찬란한 빛 무리가 쏟아져 나온다.

수십 개의 검기가 서로의 반발을 이겨내고 뒤엉키며 공간의 일그러짐을 야기했다.

자줏빛 불길조차 레이의 검강과 맞닿는 순간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일순 카리우스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든다.

카리우스를 덮친 건, 멸망을 이겨냈다고 구전되는 신화 속 섬광이었다.

쿠웅---!!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카리우스는 귓가를 울리는 이명을 느끼며 지면을 더듬거렸다.

여기저기 손발을 뻗어본 카리우스는 시야가 회복되고 나서야 자신이 구덩이 사이에 처박혀 있음을 알아챘다.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레이가 오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뒤늦게 카리우스는 자신이 까마득한 거리를 튕겨져나가 비탈에 틀어박혔음을 깨달았다.

"크윽...!!"

카리우스가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며 주변을 살폈다.

레인저들이 근방에 진을 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카리우스가 명령했다.

"나를 도와라...!! 당장 저놈을 공격해...!!"

비탈에 틀어박혔던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카리우스의 명령에도 레인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는 두 존재의 충돌에 위압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었다.

그들은 레인저였고, 분명 전장에서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허나 레인저들은 침묵했다.

카리우스가 연거푸 외쳤다.

"무엇하는 거야...!! 나를 도우라 하잖아!! 빨리 움직여!!"

"..."

레인저들의 노골적인 적의가 카리우스를 향한다.

레인저들의 시선이 뻥 뚫려 있는 카리우스의 허리춤을 훑었다.

카리우스의 명치 아래로, 내장의 태반이 날아가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스스로 제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카리우스의 몸으로 부터 혈액 대신 검은 진액이 흘러나와 내장이 사라진 구멍을 메우기 시작한다.

인간이라곤 도저히 여길 수 없는 그 괴이한 광경을 보며, 레인저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악마의 수하..."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인류의 파멸을 바라는 존재들.

설령 국왕의 명이 내려온다 해도 카리우스의 정체를 확인한 이상 카리우스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점점 짙어지는 레인저들의 적대적인 기세에 카리우스가 아빨을 뿌드득 갈아냈다.

흘러넘치는 카리우스의 분노가 레인저들에게 번진다.

"이 잡것들이...!!"

촤아악!!

자줏빛 불길이 너울지며 레인저들을 차례차례 휩쓸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레인저들이 황급히 카리우스와 거리를 벌렸다.

악마의 권능이 결합된 드래곤 하트에서 발현되는 불길은, 도저히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사령검이 허공을 날아 다시 카리우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내게 충성하란 말이다!!!!"

콰가가각!!!

쓰러진 레인저들을 향해 카리우스가 자줏빛 축복을 내리꽂았다.

죽음을 맞이했던 레인저들의 육체가 다시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탐욕의 악마로부터 비롯된 불멸의 권능을 나눠 받은 레인저들의 육체가 카리우스에게 종속된다.

되살아난 레인저들이 괴상한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더니, 자줏빛 안광을 터뜨리며 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레이의 곁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아프텔이 격렬히 반응했다.

[네크로맨서...!!]

탐욕의 악마로부터 태어난 불멸에 가까운 존재이자, 가장 껄끄럽고도 불길한 권능을 구사했던 최악의 사도.

600년 전 등장해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켰던 사령군주의 후계가,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제거해야...?!]

목소리를 높이려던 아프텔이 뒤늦게 레이를 돌아보았다.

팔찌를 통해 감지되는 레이의 맥박이 이리저리 날뛰어 대고 있었다.

미친듯이 박동 주기를 높였던 심장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기를 반복한다.

심장이 부하를 버텨내지 못한다.

아직 제대로 성장조차 끝마치지 못한 심장이, 폭발적으로 회전하는 코어와 서클 사이에 짓눌려 제 기능을 상실해갔다.

흐려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아프텔, 심장에 전기 충격. 아주 짧게."

[마스터!]

"어서."

[...!]

파득!!

전격이 무방비해진 심장을 꿰뚫는다.

전류가 흐르며 잠시 정지했던 심장이 본래의 박동을 되찾는다.

레이가 흐트러졌던 초점을 간신히 맞춘 순간.

자줏빛에 휩싸인 레인저의 시체가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정말이지..."

환생하고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는군.

촤악!!!!

세로로 휘둘러진 모로스에 의해 레인저의 시체가 양단됐다.

본디 네크로맨서가 되살린 망자는 손가락 하나만 남아서도 꿈틀거리며 적의를 드러냈으나, 공간검이 시체에 깃든 네크로맨서의 힘을 괴리시키며 망자에게 침묵을 선물했다.

짓쳐들어오는 되살아난 망자들을 향해 레이가 걸음을 옮겼다.

네크로맨서의 힘을 공유 받은 망자들은 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했다.

허나 모로스를 휘감은 검강의 파괴력을 이겨내기엔, 그 존재가 너무나 미약했다.

콰가가가각!!!

레이는 너무도 쉽사리 카리우스에게 예속된 종들을 베어냈다.

하르시아를 흉내내며 하르시아처럼 검을 휘두르는 레이를 보고 카리우스가 격분했다.

"날 기만하지 마라!!!"

지면을 내리밟은 카리우스가 삽시간에 레이에게 접근해 사령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서로의 검격이 맞닿는다.

콰앙!!!!

"네놈은 가짜다!!! 진짜일 리 없어!!!"

네놈이 하르시아일 리 없다.

그저 하르시아의 흉내를 내는 가짜일 뿐이다.

"날 기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자줏빛 불길을 머금은 사령검이 잔상을 남기며 레이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가 모로스를 고쳐 잡으며 허리에 들러붙은 레인저의 시체를 발로 짓이겼다.

레이는 물러설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레이로부터 재현된 하르시아의 신화는, 멸망을 형상화했다고 여겨지던 악마의 사도를 수십은 베었던 기적 그 자체였다.

촤아아악!!!

다시 한번 카리우스의 신체에 긴 자상이 새겨진다.

바스러진 내장이 갈라진 가죽 사이로 터져 나오며 지면을 적셨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레이의 입꼬리가 비틀려져 올라갔다.

"굉장히 실망스럽군."

멸시가 가득 어린 목소리가 거듭해서 카리우스의 귓가를 괴롭혔다.

"내가 베었던 수십의 사도 중에서, 네가 가장 하찮구나, 카리우스."

"...닥쳐, 닥치라고!!!!!"

삽시간에 상처를 복구한 카리우스가 괴성을 지르며 레이에게 돌진했다.

되살아난 망자들 또한 계속해서 레이를 해치기 위해 날붙이를 휘둘렀다.

레이가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모로스 위로 서린 검강의 빛 무리가 반원을 그렸다.

촤아아아아악!!

레이를 둘러쌌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일방적인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이의 검격은 몇 번이고 카리우스의 몸뚱이를 부수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끝없이 다시 일어나 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프텔이 조언했다.

[탐욕의 사도는 다른 사도에 비해서도 특히나 끈질긴 존재입니다. 힘과 권능의 주체가 되는 코어를 수십 번은 부수어야 합니다.]

레이는 이미 카리우스의 드래곤 하트를 몇 번이나 부수었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면 언젠가는 카리우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다.

허나 아프텔은 레이의 육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나가 고갈되어 갔고 근육이 지나치게 혹사됐으며 심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를 방증하듯, 레이의 검격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도질을 당하던 카리우스가 압박이 약해짐을 느끼고 반쯤 잘려나간 얼굴로 웃음을 토해냈다.

재생된 카리우스의 눈동자가 검강에 휩싸인 모로스를 직시한다.

탐욕이 가슴을 잠식한다.

카리우스가 레이의 팔목을 붙들고 소리쳤다.

"내놔!!"

제국의 신검, 모로스.

그건 천한 자가 감히 탐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제국의!! 오직 나를 위한 신검이다!! 당장 내놔!!"

카리우스의 손아귀가 로브를 파고들어 레이의 목을 움켜쥔다.

자주빛 불길이 카리우스로부터 옮겨붙어 레이의 살갗을 태우기 시작했다.

카리우스는 레이에게 고통과 공포를 선사하고 싶었다.

만물을 불태우는 자줏빛 불꽃은 인간이 견뎌내기엔 지나치게 끔찍했다.

허나 레이의 입꼬리엔, 여전히 멸시 어린 조소만이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이 검이 네 것이라고?"

촤악!!

기이한 궤적을 그린 모로스가 카리우스의 팔다리를 잘라냈다.

인간에겐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이었지만, 카리우스는 잘려나간 팔다리조차 몇 초 안에 복구했다.

레이는 카리우스의 팔다리가 복구되기 전 모로스를 휘감았던 검강을 거두었다.

은백색 검신이 온전히 드러난 모로스가 카리우스의 심장을 뚫고 드래곤 하트를 파고든다.

레이가 카리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 가져가 봐."

푸욱!!

모로스에 의해 드래곤 하트가 양단됐다.

허나 카리우스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사도로 각성하며 권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된 카리우스는 부서진 드래곤 하트조차 단숨에 수복할 수 있었다.

나는 불멸이다.

카리우스가 그리 고함치려는 순간 레이가 모로스를 손에서 놓았다.

갑자기 무기를 버린다고?

레이의 의도를 파악 못 한 카리우스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불길이 뻥 뚫린 가슴에서부터 타올랐다.

화르륵!

주인이 전달한 에너지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증폭시키는 신검, 모로스.

레이에 의해 강제로 카리우스를 주인으로 인식한 모로스가 드래곤 하트에 가득한 에너지를 급격히 증폭시킨다.

자신감이 가득 어렸던 카리우스의 표정에 금이 갔다.

카리우스는 사도로 각성하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새롭게 얻었다.

허나 선천적인 재능이 부족하여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힘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해야 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힘은 강제로 안정시켜 드래곤 하트에 압축해 놓았다.

헌데, 모로스가 드래곤 하트에 압축된 막대한 에너지를 억지로 증폭시킨다.

터져 나오는 힘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

당장 드래곤 하트를 관통한 모로스를 뽑아내야 한다.

허나 모로스를 뽑아내기 위해 필요한 두 팔이 수복될 때마다 레이가 재차 손아귀로 카리우스의 두 팔을 뜯어냈다.

카리우스가 가슴에서부터 치솟기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열기를 느끼고 괴성을 토해내려 했다.

그 찰나.

레이가 카리우스의 턱을 움켜잡았다.

"이 빌어 처먹을 머저리 새끼야."

레이는 카리우스가 속든 말든 끝까지 하르시아를 연기하려 했다.

허나 흘러넘치는 증오가 결국 레이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냈다.

레이가 마지막으로 짜낸 목소리는, 증오와 멸시와 함께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있었다.

"네놈이 자랑하는 그 고귀하고 좆 같은 혈통답게, 하다 못해 뒈질 때라도 좀 고상함을 갖춰봐."

"...!!!!!"

카리우스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카리우스는 무언가를 지껄이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했다.

하지만 레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리우스의 턱을 붙잡은 손아귀를 풀어주지 않았다.

카리우스의 유언 따위 귀에 담을 가치가 없었다.

마침내.

드래곤 하트가 산산이 쪼개지며 폭주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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