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3)
99화
카리우스는 로필렌의 오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리우스는 단지 분노했으며, 되도록 빠르게 로필렌이란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내가 여전히 우습게 보이나 보군."
한놈 정도는 먼저 태워버려야 태도가 바뀔 터다.
검붉은 불길이 지면 위에서 파도쳤다.
불길은 스스로가 의지를 지닌 듯 거센 열기로 이루어진 손아귀를 뻗어 로필렌을 움켜쥐려 했다.
악마의 권능을 마주한 로필렌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허세를 부리는 로필렌을 레이가 지나쳤다.
레이의 눈가에 핏물이 맺힌다.
카리우스로부터 뻗어나온 기이한 권능이 검붉은 불길과 뒤섞여 날뛰는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에 잡힌다.
권능을 하사받은 사도.
카리우스의 본질을 간파한 레이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코어가 휘몰아침과 동시에 서클이 회전하며 심장을 옥죈다.
코어와 서클로부터 번져 나온 마나가 냉기로 변해 주변을 잠식했다.
시야 가득 덮쳐오는 검붉은 불길 위로 서리가 낀다.
치지직-!
검붉은 불길에 뒤섞여 있던 괴이한 권능이 레이의 마나에 맞닿자 억지로 괴리된다.
만물을 불태우는 불길은 레이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 차게 식었다.
후욱!!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 탓에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카리우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과연 제국이 보낸 자객들. 아주 맥없이 목을 내주지는 않는다.
탐욕을 관장하는 악마의 권능조차 잠시 중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수단을 상대는 가지고 있는 듯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지금 지면을 불태우는 불길은 카리우스가 건낸 환영인사일 뿐이었다.
카리우스가 녹슨 검을 옆으로 뻗었다.
사방에 번졌던 검붉은 불길이 삽시간에 응축되어 녹슨 검을 타고 흘렀다.
카리우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쿠웅-!
둔중한 소음이 레이의 귓가를 울리기도 전에 시야를 가렸던 연기가 좌우로 갈라진다.
무지막지한 가속과 함께 레이에게 도달한 카리우스가 까마득한 열기를 토해내는 녹슨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전능감에 취한 카리우스는 이 일격으로 상대를 두 동강 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이는, 얼굴 가죽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강렬한 열기를 앞에 두고 레인저에게 강탈했던 검 두 자루를 뽑아냈다.
세로로 그어지는 검붉은 선을 향해, 레이의 검이 교차한다.
쩌억!!!!!!
강대한 두 힘이 충돌한다.
카리우스와 레이를 중심으로 열기와 냉기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휘몰아쳤다.
체격에서 밀린 레이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작 그뿐이었다.
카리우스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레이를 고작 세 걸음 물러서게 했을 뿐이었다.
그제야 카리우스의 눈에 당혹감이 인다.
레이는 카리우스의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마주 봤다.
벨라의 삶을 일그러뜨린 그 눈동자는, 이제 아이들이 살아갈 터전인 필립스 백작령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레이의 가슴 속에 흐드러진 증오가 이내 모멸로 환원되어 입가에 담긴다.
"카리우스, 너는 제국의 수치다."
"...!"
카리우스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업신여김에 카리우스는 고함조차 내지르지 못할 만큼 분개했다.
뿌드득!!
카리우스가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려 레이를 찍어 눌렀다.
레이는 힘 싸움에 응하지 않고 카리우스의 검을 흘려내며 역습을 준비했다.
카리우스는 손쉽게 레이의 의도를 읽어냈다.
역습의 기회를 잡은 건 레이가 아닌 카리우스였다.
촤악!!
카리우스가 한 박자 빠르게 레이가 역습할 검로를 차단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분명 그리 할 계획이었다.
헌데, 레이의 신체가 일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가속했다.
오버드라이브.
관절 내의 마나가 폭발하며 레이의 신체가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쩌엉!!!!
"커억!!"
간신히 레이의 일격을 막아낸 카리우스가 꼴사납게 지면을 굴렀다.
레이는 곧장 카리우스를 쫓아 가서 검을 휘두르려다 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앙!!
하늘에서 마법사가 발현한 벼락이 내리친다.
동시에 레인저 한 부대가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며 검기를 쏘아냈다.
레이가 중얼거렸다.
"아프텔."
레이의 팔찌가 발광하며 실드를 머리 위에 생성한다.
잠시 벼락에서 벗어난 레이가 양손에 쥐어진 검을 느릿하게 회전시켰다.
검에 맺힌 검기가 점멸하는 걸 보고도, 레인저들 중 누구도 위협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 탓에 허공이 찢어지며 도약 검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레인저들은 멍청하게 중얼거려야 했다.
"이게 무슨...?"
콰아앙!!!!!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육편이 터져 나왔다.
코앞이나 사각에서 떨어져 내린 도약 검기에 대응 가능했던 레인저들은 극소수였다.
살아남은 레인저라 해도 사지가 멀쩡하진 않았다.
"공간...검?"
눈이 달렸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전 영웅이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검술.
영웅의 죽음과 함께 실전되었다는 전설적인 검술이 그 어떤 징조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고도로 훈련받은 정예 병력이라 평가받던 레인저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현실감 없는 광경을 앞에 두고, 전능감에 취했던 카리우스조차 당혹에 찌든 얼굴로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 우스운 꼴을 보며 레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황가의 축복 받은 혈통에 악마의 권능까지 받아들인 결과가 고작 그것이더냐?"
아프텔의 보조에 의해 변조된 레이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이유를 알만하구나."
"네, 네놈이 감히...!!!"
카리우스의 흰자에 핏발이 줄기줄기 선다.
평생 동안 쌓아왔던 열등감에서 비롯된 분노가 탐욕이 내린 권능의 영향 아래 증폭된다.
실전되었다는 공간검을 황실이 언제 어떻게 복구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르시아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면 저건 그저 황실의 사냥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두려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고, 분노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황실의 사냥개가 감히 나를 능멸해?!!!"
카리우스가 탐욕의 악마로부터 내려받은 권능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녹슨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을 따라 검붉은 재가 휘날린다.
카리우스로부터 터져 나오는 열기가 강맹해질 수록 레이의 코어가 거칠게 회전했다.
검붉게 타들어 가는 땅에 서리가 쏟아진다.
쩌억!!!!!!
서로의 검격이 충돌한다.
카리우스는 녹슨 검으로부터 전해진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온갖 고강한 검술을 이해하고 숙달했다.
만약 카리우스의 재능이 충분했다면, 카리우스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극한의 직전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허나 카리우스가 지닌 재능이 뒤떨어졌기에, 카리우스는 여전히 달인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했다.
카리우스의 검술 실력은, 명백히 레이보다도 떨어졌다.
"으아아아!!!"
카리우스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검격 한 번에 지면이 통째로 뒤집히고 만물이 타올랐다.
허나 카리우스의 불길은, 레이에게만은 닿지 못했다.
레이의 검이 빙글빙글 돈다.
도약 검기가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려 카리우스의 살갗을 갈라냈다.
허나 카리우스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
길게 찢어져 나간 살가죽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도 전에 새살이 돋아나 상처를 덮었다.
수십 개의 자상을 허용했으나 카리우스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 이치를 벗어난 괴이를 앞에 두고, 레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기 몸에 자리 잡은 악마의 권능을 제대로 사용도 못 하고 허덕이는 카리우스의 모습이 그리 우스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군, 악마야. 왜 이런 머저리를 사도로 선택했지?"
"...!"
카리우스의 눈동자에 세찬 격동이 일었다.
레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카리우스의 열등감을 계속해서 짓쑤시고 있었다.
턱을 찢어버릴 거다. 턱을 찢어서, 저 시건방진 아가리를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할 거다.
카리우스는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모순적이게도 카리우스는 레이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허나 레이의 시선은 이미 카리우스를 떠나 저 너머를 향해 있었다.
"단순한 축복만으로도 이 머저리를 소생시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째서 이 머저리에게 과분한 힘을 내렸지?"
그건, 레이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사도란 본디 네놈들이 지닌 비장의 카드이자, 오랜 선별과 인내 끝에 택하는 존재가 아니었나? 무엇이 그리 급했지? 무엇이 네놈에게 이런 '악수'를 두게 만들었지?"
고민을 이어가던 레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혹시..."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 하나.
"네놈이 사도로 삼기 위해 눈여겨보았던 '씨앗'을..."
레이의 입꼬리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내가 낚아채기라도 했나?"
가만히 방치당했으면 분명 세상을 저주했을 수많은 씨앗들.
그리고 레이의 품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그 수많은 씨앗들.
그중 가장 찬란히 빛나는 씨앗을...
"그걸 되찾고자 이리 무리수를 두었나?"
부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레이의 조소 가득한 중얼거림이 카리우스의 심장을 헤집었다.
모멸을 참지 못한 카리우스가 광분하며 괴성을 질렀다.
"한눈팔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나를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츠즈즉!!!
볼품 없이 녹슬었던 카리우스의 검에서 자줏빛 섬광이 세차게 점멸한다.
탐욕의 힘을 받아들인 사도가 완전히 개화하며 '사령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불멸을 야기하는 탐욕의 권능이 박동하는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침식했다.
자줏빛 불꽃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카리우스가 지면을 내리밟으며 레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필멸자가 감당하지 못할 강대한 에너지의 파도가 레이를 덮쳤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공격을 막아낸 레이의 신체가 삽시간에 백 미터가 넘게 밀려났다.
간신히 검을 놓치지 않은 레이가 턱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허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레이에게 달라붙은 카리우스가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완벽히 각성한 사도가 자아내는 폭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는 레이를 보호하던 냉기가 자줏빛 불길을 막아내지 못했다.
레이의 몸을 싸매고 있는 검은 로브가 타들어 감과 동시에 레이의 발아래 핏물이 질척하게 찍혀 나오다 증발했다.
승기를 잡은 카리우스가 발광했다.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빠드드득!!!
레이의 육체보다 앞서 레이가 레인저에게 강탈했던 두 자루의 검이 먼저 바스러져 나간다.
카리우스가 레이를 거칠게 찍어누르며 연거푸 부르짖었다.
"내가!! 제국의 황태자다!! 내가!! 제국의 올바른 주인이란 말이다!!!"
"뭐 어쩌라는 거냐."
레이의 코어가 심장을 짓이길 것처럼 회전한다.
무기를 잃은 레이의 손아귀가 허공을 붙잡는다.
그 찰나.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갈라진 공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카리우스의 시선이 무심코 은백색의 검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황실에서 보았던 초상화에서, 한 남자가 저 검을 들고 전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은백색의 검에 적힌 문구가 카리우스의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카리우스가 은백색의 검에 적혀 있는 문구를 채 읽어내리기도 전에.
수십 가닥의 검기가 솟구치며 은백색의 검을 중심으로 서로를 옭아맸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 너머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제국의 심판자이자..."
레이는 카리우스를 증오했다.
때문에, 오직 카리우스의 절망을 위해.
거짓을 연기했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