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2)
98화
레이가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브랜딜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 복잡한데 갑자기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칼부터 집어넣어."
레이가 주의를 주자 브랜딜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바로 납검했다.
레이는 깨진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벨라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더럽혀졌음은 굉장히 불쾌했으나, 지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부활했다는 1황자, 대역일 가능성은 없나?"
"...똑 닮은 사람일 수는 있어."
"풀어서 설명해."
"만약 다른 누군가가 1황자로 분장했으면 내가 알아봤을 거야. 그런 쪽으론 나도 조예가 있으니까. 환상 마법 등으로 외모를 속였다면 내게 공격받았을 때 본모습이 드러났어야 해. 결계라도 따로 치지 않는 이상 환상 마법은 쉽게 해제되니까."
그러니 우연찮게 똑 닮은 사람을 왕국이 고용한 것이 아니라면.
"1황자 본인이 맞아."
"..."
날카로운 눈빛으로 브랜딜을 훑은 레이가 발을 옮겼다.
"따라나와. 따라오면서 시그니 산맥에서 벌어졌던 일을 더 자세히 설명해."
*
브랜딜은 레이가 원하는 정보를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제공한 정보의 대부분이 1황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레이가 브랜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간 탓에, 브랜딜은 레이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아닌가 의문을 품었다.
허나 레이는 허공에다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브랜딜의 주장이 신뢰할만한가?"
[단정 짓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아프텔이 답했다.
[설령 '시기'가 다가왔다고 해도, 악마와 무지한 이가 기도만 읊는다고 악마와 닿지는 못합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력자와 매개체가 존재할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다만, 뭐?"
[저자의 말에 따르면, 1황자가 얻어낸 건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악마의 축복을 받아들여도 검술처럼 숙달이 필요한 분야의 급격한 발전을 이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험'의 동화는... 사도의 특권입니다.]
"...?"
악마, 혹은 악신의 사도.
그 이름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일 개체로 대규모 전장의 판도조차 뒤엎을 수 있는 강대한 재앙들.
쉽사리 툭툭 튀어나올 존재가 아니었다.
"사도라는 게 악마가 내키는 대로 뽑아낼 수 있는 존재였나?"
[아닙니다. 하나의 악마가 동시기에 탄생시킬 수 있는 사도는 기껏해야 하나에서 둘입니다.]
"일단 확인하겠는데, 사도는 얼마나 강하지?"
[개체마다 격차가 천차만별인지라 단언하기 힘듭니다.]
"악마의 종류에 따라 사도의 강함이 달라지나?"
[로필렌 님의 연구에 의하면, 어떤 악마에게 선택받았느냐는 권능의 형태에 영향을 끼칠 뿐입니다. 사도의 강함은 사도로 선택된 존재가 본래 내재하고 있던 재능의 크기와 직접적으로 비례합니다.]
"..."
레이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악마, 혹은 악신. 그들은 절대성을 지닌 초월자처럼 여겨졌으나, 직접 소통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의 추종자든 적대자든, 하찮은 필멸자에게 악마의 의도라는 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황자가 정말 사도로 개화했다면...'
1황자의 숨겨진 재능이 그토록 뛰어났던 것일까? 악마가 사도로 선택할 만큼?
'그게 아니라면... 뭐가 그리 급했지? 설마...'
[정말 사도가 발아했다면 빠른 제거가 필요합니다.]
레이가 아프텔을 돌아보았다.
아프텔은 덤덤히 자기주장을 이어갔다.
[더 성장하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그래. 설령 1황자가 사도가 아니라 해도 제거해야지."
2황자가 죽었다. 왕국으로 망명한 1황자는 악마의 조력으로 부활해 제국을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제국에 남은 황족들은 정통성이 많이 떨어진다.
이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과 함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할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1황자는, 존재 자체가 세상에 있어 종양 덩어리와 다르지 않았다.
쾅! 쾅!
레이가 지미와 벨라의 신혼집 문을 두드렸다.
지미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레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레인저 쪽에서 내분이 발생한 것 같아요. 백작령까지 내려와서 난리를 치네요. 엄마 데리고 영주성으로 가서 백작님께 영지 경계를 강화하라고 말씀 좀 전해주겠어요?"
"아이고."
지미는 말귀를 빠르게 알아들었다.
일단 고개부터 끄덕인 지미가 레이에게 물었다.
"너도 영주성으로 가냐?"
"저는 할 일이 하나 생겨서."
"일단 알겠어. 몸조심 해라."
"네, 엄마 좀 잘 부탁할게요."
지미에게 감사를 전한 레이는 계속해서 길을 걸으며 브랜딜에게 물었다.
"황태자가 로얄가드를 기다린다고?"
"맞아. 제국의 배반자들에게 자기 건재함을 알려야겠다나 뭐라나."
"레인저들도 악마를 숭배하는 건가?"
"이봐, 그건 절대 아니야. 우리 모두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가 레인저임을 자랑스러워 하지. 첩자 한두 놈이 숨어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레인저는 절대 악마를 숭배하지 않아."
"..."
"생각해보니 단장 놈이 무지하게 수상하긴 하네. 근데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레이는 답하지 않고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브랜딜은 레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끈적한 무언가가 피부를 훑고 감을 느꼈다.
결계였다.
침입자에 반응한 로필렌이 경계 어린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레이를 발견하곤 긴장을 풀었다.
"레이, 무슨 일로 찾아왔니?"
"네가 도와야 할 일이 생겼다."
레이의 강경한 말투에 로필렌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1황자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부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로필렌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하실 건지요?"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 우리가 로얄가드로 위장해서 1황자에게 접근한다.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제거한다."
"알겠습니다."
"얼굴 가리고, 환영 마법으로 그럴듯하게 위장해. 가능한가?"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환영 마법은 전투라도 벌어지면 쉽게 해제됩니다."
"그럼 너는 전투에 참여하지 말고 뒤에서 머릿수 맞추며 적당히 분위기나 잡아."
레이가 로필렌의 자택으로 들어가 검고 두꺼운 로브를 몸에 걸쳤다.
헐렁한 모자가 머리를 덮으며 얼굴 전체에 칠흑 같은 그림자를 지게 했다.
로브의 사이즈가 몇 치수 큰 탓에 끄트머리가 땅에 질질 끌렸으나, 그게 오히려 묘한 위압을 자아냈다.
로필렌이 자책 얼굴로 조심스레 레이에게 물었다.
"제가 무언가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1황자 만나면 아가리 좀 그럴듯하게 털어봐."
"그거야 맡겨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로필렌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일련의 대화를 지켜본 브랜딜이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지금 단둘이서 레인저들의 본거지를 습격하겠다는 거야?"
"너까지 셋이야. 그리고 네 말이 진실이라면..."
레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가 레인저 모두를 상대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
백작령의 경계가 삼엄해지기 전에 레이의 일행은 시그니 산맥으로 진입했다.
브랜딜이 길잡이가 되어준 덕분에 험난한 산맥을 짧은 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시그니 산맥 초입을 지나친 후에는 고의로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레인저들은 레이의 일행을 손쉽게 발견하고 추적했다.
레이의 일행이 제국령을 벗어나자마자 사방에서 나타난 레인저들이 퇴로를 차단했다.
레인저 중 하나가 명령했다.
"제압해. 저항하면 죽여도 된다."
레인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로필렌이 곧장 실드를 생성해 자신과 브랜딜을 보호했다.
홀로 실드의 범위에서 벗어난 레이를 레인저들이 우선해서 공격했다.
촤악!!
가장 먼저 레이에게 도달한 레인저가 명치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레이는 몸을 틀어 가볍게 기습을 피하고는 무릎으로 레인저의 턱을 올려 찍었다.
직후 관절기를 걸어 상대의 검을 강탈한 레이가 검기를 발현했다.
레인저들이 레이의 사방을 점한 채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파가각!!
레이가 검을 크게 휘둘러 전후좌우에서 행해지는 공격을 한꺼번에 쳐냈다.
레인저들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동 탓에 4명 중 3명이 검을 놓쳤다.
레이는 눈앞에서 휘청이는 레인저의 다리부터 걷어찼다.
다리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레인저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직후 레이는 뒤에서 행해지는 찌르기를 어깨 아래로 흘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찍었다.
코뼈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레인저가 땅을 굴렀다.
"그쯤 하지?"
입을 연 건 로필렌이었다.
"우리는 1황자의 사체를 돌려받기 위해 찾아왔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레인저들은 자존심이 퍽 상한 얼굴로 로필렌을 쳐다봤다.
로필렌은 단 두 마디를 던졌을 뿐이지만 레인저들은 알아서 상황을 해석했다.
레이는 레인저 여럿의 합공을 어렵지 않게 압도했다. 그것도 적당히 봐주면서 말이다.
저런 실력자가 갑자기 찾아온데다, 옆에는 제국의 첩자라 의심되는 브랜딜도 끼어 있고, 황태자의 사체까지 운운한다.
자연스레 상대가 제국의 정예 부대, 예컨대 로얄가드 정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단 하나 이상한 건 브랜딜에게 안내를 받아놓고 1황자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점인데, 브랜딜이 고의로 정보를 누락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로필렌은 푸른 색 로브를 흩날리며 레인저들에게 오만함을 드러냈다.
"제국을 완전히 적대하려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검을 내려놓아라."
"..."
"네놈들이 순순히 사체를 내놓지는 않겠지. 관대하신 폐하께서 루비하 왕국에 협상을 제안하시었다. 곧 폐하의 전언이 왕국에 전해질 거다."
"협상...?"
"그래. 우리는 협상에 앞서 사체의 상태를 살피라는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 1황자의 사체가 시그니 산맥에서 반출되지 않은 것은 이미 확인했다. 너희들의 상급자를 만나야겠다."
레인저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로필렌의 요구가 아니라 해도, 부활한 1황자는 제국의 추적자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들을 자기 앞으로 인도하라고 떠들었다.
레인저의 단장인 아르투르 또한 1황자의 말을 따르라고 강요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레인저가 검을 꽂아넣었다.
"따라와라."
*
"하하하..."
레인저들의 보고를 들은 카리우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협상? 폐하께서 내 시체를 되찾기 위해 왕국과 협상을 진행하려 하신다고?"
그럴 리가.
현 황제나 2황자나 그리 유들유들한 성격이 아니었다.
"협상하는 척 방심시키고 내 사체의 위치만 확인되면 병력을 보내 이곳을 쓸어버리겠지."
한참을 더 낄낄거린 카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이조차도 양동이거나. 날 찾아왔던 두 놈에게 레인저들의 시선이 쏠린 사이 로얄가드들이 우르르 시그니 산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깜짝 놀라는 레인저를 향해 카리우스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뭐, 상관없겠지. 나의 건재함을 알리기만 하면 될 뿐이니."
카리우스가 막사를 걸어나왔다.
산맥을 걸어 내려가는 카리우스의 발걸음에는 자신감과, 분노와, 탐욕과, 기대가 잔뜩 서려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확인한 로얄가드들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다.
"손수 네놈들의 팔다리를 찢어내며 적합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저 아래서, 로브를 뒤집어 쓴 '배반자'들이 레인저들에게 둘러싸인 채 올라온다.
배반자들을 향해 마주 다가가는 카리우스의 발걸음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검붉은 불길이 일어나며 카리우스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난데 없이 일어난 불길에 모두의 시선이 카리우스에게 집중됐다.
배반자들 또한, 카리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브의 그림자에 숨겨진 두 쌍의 시선을 마주 본 카리우스의 입꼬리가 유쾌하게 찢어졌다.
"제국의 배반자들아, 내 시체를 찾으러 왔나?"
배반자들은 침묵한 채 자리에서 가만히 굳어 버렸다.
카리우스의 유쾌한 웃음이 산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런! 놀랐나 보군? 내가 멀쩡히 살아 있어서?"
한참을 웃던 카리우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 속을 가득 메운 분노와 탐욕이 검붉은 불길이 되어 새어나온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제국의 배반자들아.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하니, 한두 놈은 숨을 붙여서 보내줄 것이다."
카리우스를 둘러싼 검붉은 불길은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레인저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위압감을 발했다.
저 검붉은 불길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가 말을 잃는다.
전능감에 취한 카리우스가 광소를 토해내려는 순간.
누군가가 한발 앞서 실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크크큭..."
"...?"
모두의 시선이 실소를 터뜨린 로필렌에게 돌아갔다.
로필렌은 거리낌 없이 카리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리우스와 가까워질수록 로브 아래 드러난 입술이 더욱 길쭉하게 찢어졌다.
"제국의 변절자야, 그 부질 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느냐? 추하고 어리석구나."
"...네년이 미쳤구나."
화르르륵!!!
만물을 탐욕스럽게 태우는 화염이 카리우스의 분노에 응해 로필렌을 향해 번져나갔다.
그 이질적인 불길의 접근에 로필렌은 잠깐 공포에 질렸으나, 이내 평온을 되찾고 웃음을 머금었다.
등 뒤로부터.
"1황자 카리우스."
차디찬 냉기가 번져 나온다.
"네놈은 숭배할 대상을 잘못 골랐다."
카리우스의 시선이 천천히 레이에게로 옮겨간다.
레이는 차분하게 카리우스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쩌면, 그날 밤 벨라가 마주했을 그 눈동자를, 레이는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래, 어차피 내 손으로 너를 죽일 거라면.
오로지 네 절망을 위해.
네가 가장 바라지 않을 파멸의 형태를 연기하겠다.
레이의 곁에 선 로필렌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변절자야, 제국 역사의 정점을 맞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