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1)
97화
불꽃인지 검기인지 구분 안 가는 괴상한 빛 무리가 카리우스의 낡은 검을 감쌌다.
브랜딜은 화끈거리는 열기를 안면으로 느끼며 맞닿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카리우스는 황태자 직위를 지녔던 황족이다.
숨겨둔 비장의 수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허나 브랜딜은 여전히 카리우스의 목을 벨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브랜딜이 아는 카리우스는 결코 검법에 통달한 무사가 아니었다.
기기긱!!
브랜딜의 검이 카리우스의 검을 타고 흐른다.
브랜딜은 카리우스가 어설프게 검에 힘을 불어넣는 순간을 노려 치명상을 입힐 계획이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손아귀에 힘을 뺀 채 불쑥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카리우스와의 간격이 확 좁아지자 브랜딜이 당황해서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각!!!
코앞에서 서로의 검격이 번쩍인다.
이 거리에선 상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마저 제대로 시야에 담을 수 없다.
오랜 기간 검을 숙달한 검사만이 지근거리에서의 수 싸움이 가능하다.
브랜딜은 카리우스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세에 몰린 건 브랜딜이었다.
카리우스의 검술 실력을 낮잡아 본 브랜딜은 크게 당황했다.
박자가 꼬인 브랜딜이 허리를 찔러오는 카리우스의 공격을 흘려내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그 순간.
카리우스의 비어있던 손이 브랜딜의 멱살을 잡아챘다.
촤악!!
브랜딜이 간신히 팔뚝으로 카리우스의 공격을 흘려냈다.
뒤로 물러선 브랜딜이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옷을 얇게 입고 와 멱살 잡힌 부근의 천이 쉽사리 찢어져 나간 게 다행이었다.
두꺼운 가죽 갑옷이라도 둘렀다면 카리우스의 손아귀에 붙잡혀 배를 꿰뚫릴 뻔했다.
"큭...!"
브랜딜이 뒤늦게 검상을 입은 팔뚝이 미친듯이 화끈거림을 인식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리 검붉은 불길이 검상을 따라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브랜딜은 황급히 흙을 움켜쥐어 팔뚝에 붙은 불길을 덮었다.
화르륵!
검붉은 불길이 흙 사이를 빠져나와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
흙을 움켜쥐었던 손의 장갑에도 불이 번졌다.
꺼지지 않는 불길.
그 괴이함을 눈치챈 브랜딜이 곧장 장갑을 벗어 던진 후 자기 팔에 검을 휘둘렀다.
가죽과 근육 일부가 베어져 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
브랜딜이 팔에서 피를 줄줄 쏟아내며 카리우스를 바라봤다.
카리우스는 제자리에 서서 오만한 시선으로 브랜딜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이제야 약간이나마 이해됐다.
만만하게만 보였던 카리우스가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암살은 실패했다.
브랜딜은 곧장 등을 돌려 도주를 시작했다.
암살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기에 지금의 도주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아르투르가 산맥이 통째로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국의 첩자다!!! 잡아!!!"
곧장 레인저들이 브랜딜의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브랜딜 또한 오랜 경험과 훌륭한 실력으로 무장된 레인저였으나 이곳은 레인저들의 본진이었다.
브랜딜은 얼마 못 가 레인저들에게 포위당했다.
길목을 가로막은 레인저들이 우르르 검을 뽑아 브랜딜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모리와 머록이 다른 레인저들의 허리를 붙잡고 지면을 굴렀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모리가 지면을 구르며 불평했다.
모리와 머록에게 방해받은 레인저들은 쉽사리 두 사람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
만약 모리와 머록이 먼저 무기를 휘둘렀으면 대처가 달랐겠지만, 둘은 비무장 상태였다.
평소 안면을 트고 지내던 동료에게 가감 없이 손을 쓰는 건 레인저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브랜딜은 그 틈을 타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브랜딜은 레인저들을 피해 산맥을 넘어가며 자신에게 되물었다.
'도망쳐서 뭘 하겠다고 이렇게 가슴을 쥐어짜며 달리는 거지?'
브랜딜은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러니까, 1황자 암살을 성공한 다음 말이다.
브랜딜은 군법에 따라 처형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고도 일을 벌였다.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이것저것 있었지만, 아무래도 산맥 생활이 너무 지겨워진 탓이 컸다.
수십 년을 산맥에서 보내다보면 약간의 정신병 쯤은 누구나 찾아오는 법이다.
근데 암살에 실패했다. 그다음을 생각해두지 않아 무작정 도주했다. 이제 어떡하지?
머리가 복잡해질수록 스스로 잘라낸 상처가 욱신거렸다.
브랜딜의 발은 언젠가 한 번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며 계속 움직였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침내 브랜딜은 몇 달 전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아이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브랜딜은 허탈한 심정을 내비치며 멋대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브랜딜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밤하늘을 지켜보던 레이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중얼거렸다.
"그때 너무 좋게좋게 보내줬나? 자기 집 안방처럼 기어들어 오는군."
"..."
브랜딜은 잠깐 고민했다.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1황자가 정말 악마의 하수인일까?'
확신할 수 없다.
브랜딜은 그저 '굉장히 이상한 정황' 몇 개를 확인했을 뿐이다.
어쩌면 1황자는 그저 타고난 회복력이 많이 뛰어난, 억울하게 쫒겨난 황족일지도 몰랐다.
다만 1황자는, 그 존재 자체가 제국과 왕국 간의 갈등을, 혹은 제국과 왕국의 내분을 야기하는 트리거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이쯤에서 퇴장해주는 게 모두에게 이로웠다.
브랜딜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망명을 시도했던 고위 귀족이 부활했어."
"...?"
레이의 고개가 브랜딜을 향해 돌아갔다.
몇달 전보다 훨씬 거칠어진 눈빛을 보고 브랜딜은 무심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믿기지 않겠지만..."
"부활했다는 고위 귀족이 1황자 카리우스를 말하는 건가?"
"어, 음.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어?"
깡촌의 일개 스콰이어가 1황자에 관한 정보를 꿰고 있으리라곤 예상 못 했던 브랜딜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설명하기 편하겠네. 이봐, 잘 들어. 이건 전부 악마의 농간이야."
브랜딜은 다짜고짜 그리 주장했다.
"1황자는 즉사해야할 부상을 입었어. 내장이 다 터져 나갔다고. 척추에 하반신이 간신히 매달려 대롱거렸다니까? 근데 두 달도 안 돼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어. 이해해? 악마와 계약한 게 분명해."
"..."
"살아 돌아온 그놈은 배반자들에게 복수하고 제국을 되찾겠다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고 있어. 왕국은 탁상공론에 빠져 1황자의 처분을 자꾸만 미루고 있지. 나는 1황자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그놈은... 악마의 힘을 사용해 내 기습을 막아냈어."
브랜딜은 되는 대로 '악마'란 단어를 가져다 붙이며, 팔을 묶은 붕대를 풀어냈다.
거칠게 도려내진 흉측한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꺼지지 않는 불꽃. 그건 분명 악마의 힘이었어. 이걸 봐. 살짝 베였을 뿐인데, 그 불이 옮겨붙은 탓에 팔을 통째로 잘라낼 뻔했어. 악마가 1황자를 이용해 제국과 왕국이 충돌하는 걸 부추기고 있는 거야.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게 누구일 것 같아? 바로 너희야."
레인저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 필립스 백작령은 존속될 수 없다.
전쟁이 터지는 순간 필립스 백작과 영주민들은 영지 전체를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네 주인에게, 제국의 추적자들에게 전달해."
브랜딜은 자기가 지금 되는 대로 지껄인 말들을 제국 측이 순진하게 믿어주리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1황자의 생존을 알아챈 제국이 신중하게 움직인다면, 그리고 '악마'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계한다면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그리 바랐다.
스릉!
몇 마디 덧붙이려던 브랜딜이 입을 다문 채 검을 뽑아들었다.
추적자들이 따라붙었다. 브랜딜은 더는 도망칠 곳도, 도망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봐, 여길 빠져나가. 1황자의 암살을 시도한 탓에 난 지금 제국의 첩자로 오해받고 있어. 내가 추적자들을 막을 테니, 넌 가서 내가 한 말을 네 주인에게 전해."
콰앙!!
브랜딜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현관과 창문이 박살났다.
레인저 하나가 현관을 지나쳐 브랜딜과 격돌했다.
동시에, 레인저 셋이 깨진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돌입했다.
창문을 뛰어넘은 레인저들은 브랜딜을 포위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레인저 중 한 명의 돌격 경로에 레이가 서 있었다.
레인저는 '제국의 첩자'와 접촉한 레이를 제거 대상으로 판단했다.
검기가 서린 검이 레이에게 휘둘러지는 광경을 보고 브랜딜이 이를 악물었다.
'안 돼...!!'
브랜딜에게 있어 레이는 유일하게 남은 메신저였다.
레이가 나이에 비해 성취가 드높기는 했지만, 상대는 노련한 레인저였다.
정면에서 맞붙으면 레이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반드시 레이를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브랜딜이 억지로 몸을 틀어 레이에게 향하려는 순간.
레이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오는 레인저를 돌아보았다.
"너희들에겐 우리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이나 봐."
레이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검에서 강렬한 검기가 치솟는다.
"여기는 필립스 백작령이다."
카각!!!!
서로를 향한 검격이 부딪친다.
다음 순간, 레인저의 손아귀가 찢어져 나갔다.
검을 놓친 레인저가 당황해서 움직임을 멈춘 찰나.
레이가 검을 내리그었다.
"네놈들이 허락 없이 칼을 뽑아도 될 장소가 아니란 뜻이다."
촤악!!!
레이의 검격이 레인저를 반으로 갈랐다.
브랜딜에게 향하려던 레인저 둘이 발걸음을 멈춘다.
눈빛을 주고 받은 레인저 둘은 레이를 향한 합공을 준비했다.
레이의 우측을 점한 레인저가 먼저 바닥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레인저는 힘 싸움을 피한 채 화려하게 검을 놀렸다.
찬란히 빛나는 검기 탓에 시야가 온통 반짝일 지경이었다.
그때 레이의 좌측을 점했던 레인저가 사각을 파고들었다.
카각!!
레이는 어렵지 않게 두 번째 레인저의 검을 막아냈다.
허나 두 번째 레인저의 진짜 공격은 훨씬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퓩!
레인저의 팔뚝 아래서 길고 얇은 독침 하나가 쏘아졌다.
엑스퍼트 급 무인은 갑옷을 갖춰입지 않고는 몸의 방어력을 항상 끌어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레인저가 사용하는 독침은 루비하 왕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마비독이 발라져 있는, 가장 날카로운 암기였다.
일단 피부를 조금만 뚫고 들어가도 곧장 독이 퍼진다.
레인저는 갑옷도 입지 못한 레이가 이 은밀한 일격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허공이 갈라졌다.
팅-!
갈라진 공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독침을 가볍게 튕겨냈다.
레이의 손에 제국의 신검, 모로스가 쥐어진다.
모로스를 타고 흐른 검기가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일순 섬광이 되었다.
모로스가 횡으로 휘둘러진다.
촤아악!!!
레인저 둘의 허리가 동시에 양단됐다.
쏟아져 나오는 핏물을 찰박이며 레이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위압적인 광경에 브랜딜과 검을 마주대고 있던 레인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레이는 상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레이의 자그마한 육체가 레인저를 향해 삽시간에 쏘아졌다.
모로스에 의해 증폭된 공간검의 검기를, 기사보다도 방호력이 떨어지는 무장을 선호하는 레인저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촤악!!
레인저의 목이 검과 함께 양단됐다.
떨어져 나간 목이 바닥을 구르기 전에 레이는 모로스를 빙글 돌렸다.
콰앙!!!
집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외부에서 작전 상황을 관찰하던 레인저가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린 도약 검기에 폭사했다.
"..."
전투가 끝나고 내려앉은 적막은 브랜딜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 머리로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이가 허공의 틈으로 모로스를 다시 수납한 후 질퍽이는 바닥을 걸어 브랜딜에게 다가갔다.
브랜딜은 레이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결국 벽에 등이 닿았다.
브랜딜은 검 자루를 붙은 손아귀에 힘을 주다가, 이내 포기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상대의 수준은 명백하게, 엑스퍼트 급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브랜딜."
레이의 부름에 브랜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레이가 브랜딜의 칼집을 가리켰다.
"여긴 필립스 백작령이다."
백작령 안에서 칼 함부로 뽑지 말란 소리였다.
브랜딜이 눈치껏 납검했다.
레이는 깨진 창문 너머로 잠깐 밤하늘을 바라보다 브랜딜에게 눈을 돌렸다.
벨라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더럽혀졌음은 굉장히 불쾌했으나, 지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부활했다는 1황자, 대역일 가능성은 없나?"
"...똑 닮은 사람일 수는 있어."
"풀어서 설명해."
"만약 다른 누군가가 1황자로 분장했으면 내가 알아봤을 거야. 그런 쪽으론 나도 조예가 있으니까. 환상 마법 등으로 외모를 속였다면 내게 공격받았을 때 본모습이 드러났어야 해. 결계라도 따로 치지 않는 이상 쉽게 해제되니까."
그러니 우연찮게 똑 닮은 사람을 왕국이 고용한 것이 아니라면.
"1황자 본인이 맞아."
"..."
잠깐 침묵한 레이가 발을 옮겼다.
"따라 나와. 따라오면서 시그니 산맥에서 벌어졌던 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