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96화 (96/446)

의심 (2)

96화

레이는 지미와 벨라의 신혼집에 들렀다.

위장을 하자면 제대로 하자는 의도로 마련한 신혼집이었는데, 덕분에 레이는 요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벨라가 지미와 레이 앞에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은 후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지미가 레이를 향해 찻잔을 들어 보였다.

"이거 애들한테 선물 받은 잔이야."

"애들 누구요?"

"카렌이랑 요하나랑 루나랑 용돈 모아서 샀다던데."

"카렌 돈으로 샀겠죠."

레이가 차를 한 모금 삼키며 중얼거렸다.

용돈 따박따박 모아놓는 아이라곤 셋 중 카렌밖에 없었다.

요하나야 항상 용돈을 탈탈 털어 썼고, 루나 또한 교회에서 책을 빌릴 때 대여료를 내느라 모아둔 돈이 넉넉하진 않았을 것이다.

"...잠은 같이 자요?"

레이가 침실을 바라보며 실없는 소리를 하자 지미가 눈가를 구겼다.

"인마, 여기 침실만 두 개 더 있어."

워낙 큰 집이라 딸린 방이 많았다.

괜히 관리하기만 힘들다고 투덜거린 지미가 찻잔을 옆으로 치우며 한숨을 쉬었다.

"또 뭐가 불만인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인상을 구기고 있어?"

레이의 얼굴에 억지로 드러났던 웃음기가 싹 빠졌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1황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함구하고 싶었지만, 지미에게만은 그래서는 안 됐다.

"1황자가 사망했어요."

"오, 이런. 귀족 나으리들이 골치 좀 아프시겠구나."

지미의 반응은 태평했다.

변방을 살아가는 평민에게 있어 나라님이 누가 되느냐는 대단한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에는 말이다.

"1황자가 죽기 전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기 위해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렀다고 해요."

"그래, 망명을... 지금 뭐라고 했어?"

별 생각 없이 레이의 이야기에 호응하던 지미가 눈을 부릅떴다.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렀다고? 1황자가?"

"네."

"..."

지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레이가 왜 갑자기 사람을 앉혀 놓고 이딴 이야기를 하는 지, 지미는 모를 수가 없었다.

지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방황하다, 간신히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이, 이, 이건 우리끼리 상의할 문제가 아니야."

"백작님도 아세요. 백작님과는 일단... 엄마 뱃속의 아이가 누구의 피를 이었는지 불확실하니 아이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어요."

"그, 그거 다행이네. 아... 이런 맙소사."

지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안이 자신의 손을 떠났음에 대해 안도했다.

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미를 바라보다 세상 멍청한 질문을 했다.

"엄마의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면 어떻게 해야 하죠?"

"죽여야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른 지미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레이를 마주 봤다.

레이는 얼핏 덤덤해 보였다.

허나 오랜 시간 레이를 보아왔던 지미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섬찟함을 느꼈다.

지미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레이에게 사정했다.

"레이, 이상한 생각하지 마. 만약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라면 벨라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죽여야 해. 벨라도 이해해줄 거야."

"맞아요. 엄마도 이해해주시겠죠."

벨라는 결코 고집만 쎈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네가 낳은 아이가 모두를 죽일 재앙 덩어리라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설득하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근데 말이죠, 지미."

레이의 입꼬리 하나가 천천히 올라갔다.

"자기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판 여자가... 자기 동생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모아왔던 재화와 평생 동안 바라왔던 소망을 희생한 여자가... 스스로 배 아파 낳은 아이를 잃고도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지미가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조소를 머금고 있는 레이의 눈동자는, 그저 삭막해 보였다.

레이는 의아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에 대체..."

벨라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세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레이...!!"

지미는 레이의 눈동자 속에서 맹목을 보았다.

레이가 두 번째 삶을 제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심리적 기반은 '벨라'였다.

기반이 무너지면, 그 위에 쌓인 것들은 전부 의미를 잃는다.

지미가 탁자를 내려쳤다.

"레이...! 대체 어쩌려고 그래?!"

"엄마의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라면... 백작님께 아이의 존재를 허락받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곳을 떠날 거예요."

멀리 멀리 떠나 신분을 고치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의미의 선언에 지미가 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이 이곳에 있어.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이, 바로 여기 필립스 백작령에 있다고!"

지미의 필사적인 설득에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마른 침이 레이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에요."

"레이!!!"

지미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레이, 네게 벨라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널 세상의 전부처럼 여기는 아이들도 있다고, 그리 외치고 싶었다.

허나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레이의 표정을 보자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문고리를 잡았다가, 잠깐 지미를 돌아봤다.

"만약 일이 안 좋게 풀린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올게요.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지미와의 약속을 지켜야죠."

"..."

지미는 말 없이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둔중한 통증이 지미의 머릿속을 울렸다.

*

신성력. 신의 축복을 받아 변형된 마나의 일종.

이름 그대로 신성한 힘을 지닌 신성력은 모든 부상과 질병에 대처 가능한 기적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허나 그건 거짓이었다.

예컨데 신성력으로는 선천적인 기형을 해결할 수 없었으며, 노화와 같은 자연의 이치 또한 되돌릴 수 없었다.

커다란 자상을 입었을 때도 출혈을 막지 못하면 신성력을 아무리 쏟아붓는다 해도 과다출혈로 절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치료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

치료사는 인체 구조에 해박했으며 약재나 물리적인 수술을 통해 환자를 치료했다.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 중에서도 치료사의 지식을 익힌 자들이 몇몇 존재했지만, 비교적 소수였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성력으로 치료 불가한 질병을 '신의 징벌' 혹은 '신의 저주'라 여기고는 했다.

선천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악마에게 혼을 판 인간이라며 학살한 역사조차 존재할 정도였다.

때문에 선천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 또한 인식이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루비하 왕국의 타라니스 가문은 상당히 독특한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타라니스 가문은 오랜 가문 역사 속에 뛰어난 마법사를 몇몇 배출했으며, 치료사의 학문인 의학에도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위세는 대단치 않으나 나름의 명성을 지니고 있던 타라니스 가는 최근 급격하게 성장했다.

노환 때문에 고생하는 국왕의 시름을 의학적 지식을 활용해 크게 완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국왕을 등에 업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타라니스 가문은 결국 레인저의 단장 자리에 자기 가문의 사람을 꽂는 데 성공했다.

그 자가 바로 아르투르였다.

연줄로 들어온 인물인데다 마법사인 아르투르는 처음부터 레인저들의 환대를 받지 못했다.

허나 까라면 까야 되는 게 군사조직이다.

브랜딜도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르투르의 명령을 되도록 충실히 따랐다.

그러다가 1황자의 망명 사건이 터졌다.

1황자의 망명을 종용하고 도우라 명령한 건 루비하 왕국의 국왕이었다.

국왕이 제국의 1황자를 확보하려 했던 이유는 브랜딜도 대충 짐작이 갔다.

콧대 높은 제국도 엿 먹일 수 있었으며, 제국의 1황자쯤 되면 정치적 수단으로 써먹을 곳도 많았다.

제국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다는 게 위험했지만 말이다.

허나 결국 레인저들은 1황자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서 일이 끝났어야 했다.

허나 아르투르는 제국의 추적자들을 섬멸하라고 레인저들에게 지시했다.

제국과 지나치게 각을 세우는 모양새라서 브랜딜은 적당히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연줄로 꽂힌 인사가 너무 설친다 싶었는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황자가 부활했다.

'그게... 회복 가능한 상처였나?'

브랜딜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1황자의 내장조각이 흩날리는 꼴을 지켜봤다.

허리가 완전히 양단된 건 아니지만 그만한 부상이면 거의 즉사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다.

아르투르가 타라니스 가문의 사람이라 해도, 성녀라도 나타나 신성력을 쏟아부어 주지 않은 이상 절대 1황자를 살릴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헌데 몇달 뒤 1황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레인저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기적.

기적이었다.

뭐, 1황자가 대단히 운이 좋았나 보지.

브랜딜은 스스로를 대충 납득시키려 했다.

어차피 1황자가 시그니 산맥을 넘어 왕국 중심부로 향하면 레인저들도 더는 1황자를 마주할 일이 없었으니까.

허나 부활한 1황자는 자기 정체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시그니 산맥을 떠나려 하지도 않았다.

"배반자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내가 직접 배반자들을 징벌하겠다."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며 말이다.

죽다 살아나서 머리가 돌아버렸나?

왕국은 저 미친놈을 방치하려는 건가? 레인저 보고 저 미친놈을 대신해서 칼을 맞으라는 건가? 아니 애초에, 1황자는 어떻게 부활한 거지?

정말로, 회복 가능한 상처가 맞았나?

브랜딜은 뒤늦게 레인저들 중 1황자가 부상을 입었던 순간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자들을 찾았다.

허나 1황자를 가까이서 호위했던 레인저들 대부분은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고 이리저리 전출되어 버렸다.

'회복 가능한 상처가 아니었어.'

브랜딜은 자기 눈을 믿기로 했다.

내장이 대부분 날아갔다. 그건 즉사에 가까운 부상이었다.

헌데 황태자는 살아났다.

제국의 황족은 무시무시한 회복력이라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언데드.'

브랜딜의 머릿속에 어처구니 없는 가정 하나가 스쳤다.

수백 년전 신화 속에 적힌 악몽들.

악마의 권능을 받아 되살아난 자들.

너무도 지나친 비약에, 브랜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산맥에 박혀있으니 이상한 망상만 느네."

브랜딜은 터덜터덜 산맥을 걸었다.

1황자는 복수를 천명하고 있었고, 왕국의 윗선에선 아직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

브랜딜이, 아르투르와 함께 산맥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리우스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은 겁니까?"

"..."

카리우스가 등을 돌려 브랜딜을 바라봤다.

좀처럼 제국의 추적자가 찾아오지 않자 카리우스는 짜증이 나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으시냐고 물었습니다, 1황자님."

"우문이군.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나를 적대하고 배반한 그것들은, 제국이 아닌 반역자들이다."

"아이고, 정신이 나가셨군."

브랜딜의 노골적인 모욕에 아르투르가 격분했다.

"브랜딜!! 너야말로 제정신이냐?! 이게 대체 무슨 무례냐?!"

브랜딜이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끌끌 찼다.

"뭐 어쩌라고요? 내가 제국민도 아닌데, 제국에서 쫓겨난 제국 귀족한테 뭐 대단한 예의라도 지켜야 합니까?"

"브랜딜!!!!"

분노하는 아르투르의 앞을 카리우스 막아섰다.

"날카롭기만 해야할 도구가 말이 많군. 생각도 많고."

"제가 도구인 건 맞지만, 제국이 아닌 루비하 왕국의 도구이지요. 도구의 머리로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쿵! 쿵!

브랜딜은 귀를 활짝 열었다.

카리우스의 가슴 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저것이 과연 사람의 심장일까. 아니면 사람의 심장을 흉내내는 다른 무언가일까.

뭐, 꺼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냥 땅에 영원히 눕는 게 왕국에게 이로울 것 같아."

카리우스가 악마와 손을 잡았든 잡지 않았든.

아르투르가, 타라니스 가문이, 혹은 루비하 왕국이 1황자를 어떻게 사용할 생각이든.

이대로 가다간 1황자 때문에 제국과 마찰이 더욱 극심해질 게 확실했다.

잘못하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수천 수만 혹은 그 이상의 병사가 죽는다.

때문에 브랜딜은 결심을 세웠다.

촤악!!

검기가 서린 브랜딜의 검이 기습적으로 휘둘러졌다.

브랜딜은 이 일격으로 카리우스의 목을 벨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앙!!

그 순간.

웬 녹슨 검이 카리우스의 품에서 튀어 나왔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처럼 생긴 녹슨 검이 브랜딜의 검기를 막아선다.

츠즈즈즈즈즉!

카리우스의 드래곤 하트의 파편에 악마의 권능이 뒤섞인다.

심장에서 쏟아져 나온 불길한 화염이 녹슨 검에 깃든다.

그에 응답하듯, 녹슨 검에 녹아있던 누군가의 기억이 카리우스에게 역류했다.

카리우스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몇 번 잡아보지도 못한 검이 익숙하게 손에 감긴다.

언제나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고급 검술의 궤적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너도 날 우습게 봤군."

탐욕을 관장하는 악마의 사도가 붉은 눈을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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