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95화 (95/446)

의심 (1)

95화

플로리아가 필립스 백작령에 들렀다.

플로리아와 함께 온 마차엔 오시리스 백작이 보낸 선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준 것에 대한 성의의 표시였다.

플로리아는 필립스 백작과의 면담을 끝내고 레이를 불러들여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수풀 뒤에 숨은 알레시아가 두 사람을 훔쳐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레이와 플로리아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작았던 탓인지 대화의 내용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으으, 불안하구나아..."

불안하다, 불안해.

플로리아가 자꾸만 레이에게 은근히 꼬리를 치는 것 같다.

알레시아는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신의를 믿지만, 필립스 백작령보다 몇 배는 거대한 오시리스 백작령을 생각하니 영 등 뒤가 불안해졌다.

"카렌, 잘 듣거라."

"?"

레이를 찾으러 왔다가 알레시아에게 붙들린 카렌이 눈을 깜박였다.

알레시아가 카렌을 자기 옆으로 바짝 당기며 속닥였다.

"우린 서로 양립 가능한 존재이니라."

"??"

거창한 알레시아의 선언에 카렌의 머리 위에 두 번째 물음표가 떠올랐다.

알레시아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카렌을 타박했다.

"본처가 동의해주면 첩은 얼마든지 들일 수 있느니라. 나는 마음이 넓으니 첩 몇 명 정도는 너그럽게 용인해줄 것이다. 물론 여섯은 좀 많은 것 같지만 말이다아..."

나의 기사는 보기보다 호색한이로구나.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알레시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아니 된다. 플로리아는 나와 같은 귀족이니라."

귀족을 첩으로 들이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본처 자리는 통상 하나였다.

말인즉슨 귀족인 알레시아와 귀족인 플로리아는 레이를 사이에 두고 양립 가능한 존재가 아니란 소리였다.

만약 플로리아에게 레이를 뺏겼다간 레이는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훅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 플로리아를 견제해야 하느니라!"

알레시아의 말을 얼추 알아들은 카렌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플로리아 님 편에 붙을래요. 제 생각에는 플로리아 님이 이길 것 같아요."

"...!"

알레시아가 벼락 맞은 표정으로 카렌을 쳐다봤다.

예상도 못 해본 뒤통수 선언에 알레시아가 큰 충격을 받은 채 카렌의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너무하는구나! 그동안 너희들에게 잘해주지 않았더냐!"

당장 카렌의 품속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도 자금의 출처를 따지자면 알레시아였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아무튼 지미 보육원에 들어간 영지 예산만 해도 적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연거푸 배신감을 토로하자 카렌이 결국 마음을 돌렸다.

"알았어요. 알레시아 님 편에 붙을게요."

"고맙구나!"

알레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장 카렌이 옆에 있다 해도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마음이 든든했다.

*

알레시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플로리아와 레이의 분위기는 그다지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플로리아는 레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탓에, 꽤 오랫동안 입을 우물거리며 정원을 거닐어야 했다.

결국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필립스 백작령에 오셨어요?"

"음, 그러니까..."

플로리아는 바람 정령을 활용해 목소리가 외부로 새나가지 않게 방비하며 답했다.

"성의를 보이려고 찾아왔어."

첫 마디가 끝나니 긴장이 좀 풀렸다.

목을 가볍게 가다듬은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큰 도움을 받았잖니? 아버지께서 그에 대한 성의를 표할 겸, 이웃 영주와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를 곁들여 선물과 함께 나를 보내셨어. 원래는 마차가 두 대는 더 따라올 예정이었는데... 이번 일로 손해를 크게 보시는 바람에 말이야."

"이번 일이라면?"

"1황자가 사망했어."

원래 필립스 백작 외에는 발설하면 안 되는 정보였지만 플로리아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레이의 이면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대단치도 않은 정보를 숨겨가며 점수를 잃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레이는 1황자의 사망 소식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1황자가 황제의 눈 밖에 났음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놀랄 게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됐나 보네요."

"필립스 백작령에는... 별일 없었나봐?"

"무슨 말씀이시죠?"

"1황자가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추살당했어."

"...!"

순간 레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플로리아는 마침 정원의 꽃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레이가 뒤처졌음을 깨닫지 못했다.

레이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플로리아에게 따라붙었다.

"추살당했다고요?"

"그래. 정확하진 않지만... 1황자가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러 시그니 산맥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얻었어. 근데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야."

"..."

레이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하며 진동했다.

시그니 산맥을 넘어 도망가려 한 제국의 고위 귀족.

그 고위 귀족을 처단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 급을 대거 동원한 제국.

근데, 망명을 시도한 고위 귀족의 정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1황자였다고?

"이런 시발."

레이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플로리아는 눈치껏 욕설을 못 들은 척하고 넘겼다.

레이가 콧잔등을 쥐어짜며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엉망이 된 머릿속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벨라가 품고 있는 아이.

사실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애비가 누구인지 따위는 레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아이의 부친은 지미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면.

만약 그렇다면...

"흐읍, 후우..."

제자리서 멈춘 레이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여기 홀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는 억지로 머릿속의 혼란을 가라앉혔다.

플로리아와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상기한 레이가 표정을 고친 채 물었다.

"1황자가 숙청 당했는데 오시리스 백작님이 크게 손해를 보셨다고요?"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오시리스 백작은 2황자 쪽에 줄을 댈 생각이었을 테니까.

플로리아가 부채를 펼쳐 멋쩍어하는 표정을 가렸다.

"2황자님께서 암습을 당해 돌아가셨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1황자야 권력을 잃고 숙청된거니 어떻게 죽어도 이해할만했다.

허나 2황자를 상대라면 어쭙잖은 암습으로는 생채기도 입힐 수 없었다.

"대체 누가 2황자를 해친 거예요?"

"잘 몰라. 현시점에서 거기까지 알아낼 만큼 강한 정보력과 영향력을 지닌 가문은 몇 안 될 거야."

"떠도는 소문이라도 알려줄 수 있나요?"

"...몇몇 귀족들은 포이보스 님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한다고 해."

포이보스. 황제가 둔 유일한 서자의 이름이다.

"황실이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게 그 증거래. 만약 제국의 귀족이나 타국의 세작이 2황자를 암습했다면 황실이 지금보다 훨씬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을 거래."

"아니, 고작 황실의 서자가 2황자를 어떻게 해쳐요?"

"다들 똑같은 의문을 품었어. 그러다 보니 소문에 이런저런 살이 붙어서 귀족 사이에 떠돌더라고."

제국의 검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포이보스에게 붙었다.

제국의 특임대에 속한 누군가가 토사구팽을 걱정해 포이보스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팔았다.

1황자와 가깝던 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복수를 단행하기 위해 포이보스를 지원했다.

소문은 참 많았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온갖 소문을 늘어놓던 플로리아가 괜히 혼자 흥분했나 싶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2황자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도 크게 손해만 보셨어."

아직 제국에는 황제의 서자를 비롯해 황족이 여럿 남아있다.

허나 누가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될지는 혼돈 속이었다. 2황자가 죽은 이상 다들 정통성이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그 개판을 눈앞에 두고, 오시리스 백작은 다행히도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오판하지 않았다.

도박판에 판돈을 올리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고 발을 뺐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레이가 침음을 삼키며 어려운 질문을 했다.

"누가 제위를 이을 것 같나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플로리아의 부채가 탁 접혔다.

"황제 폐하께서 편을 들어주는 자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 하셨어."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디디에가 굳은 얼굴로 레이의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

필립스 백작은 몇 년째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가 더해진 지미 패밀리는 단순 깡패 집단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들은 시기만 잘 노리면 백작령을 통째로 전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장세력이었다.

그럼에도 필립스 백작은 지미 패밀리를 크게 억압하지 않았다.

그건 객관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판단이었다.

영지 안에 영주의 사병보다 더 강력한 무장 세력이 똬리를 튼 꼴을 묵인하고 있다?

다른 귀족이 알았으면 미친 새끼라 손가락질했을 터다.

때문에 필립스 백작은 최소한의 방비 차원에서 지미와 매튜의 과거를 면밀히 조사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둘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조치를 지미와 매튜 또한 모르지 않았지만 백작의 판단이 지극히 합리적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작은 오랜 조사 끝에 깨달았다.

지미는 신의가 있는 용병이었고, 유흥을 멀리할 만큼 소탈하고 무욕적이었으며, 야망은 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정이 많았다.

지미는 믿음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선인이었다.

그런 지미가, 과연 술을 먹고 실수를 할 인간일까?

벨라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백작이 처음 품었던 의구심이었다.

허나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

지미는 단 한 번의 실수를 외면하지 않고 곧장 책임을 졌다.

그 또한 지미다웠기에, 백작은 처음 품었던 의구심을 마음속에서 지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1황자가 필립스 백작령을 지나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기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한 번 터져 나온 의심은 삽시간에 크기를 불렸다.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며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머릿속에 세워진다.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백작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레이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

"..."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본 둘은 직감적으로...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나 다짜고짜 칼을 뽑기에는 둘은 주고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레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백작이 한참을 찻잔을 바라보다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대 모친이 새로운 연을 맺었음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 모친이 겪었던 안타까운 사건 말인데."

"..."

"혹시 행패를 부렸다는 귀족의 신원을... 확인했나?"

"확인 못 했습니다."

레이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 행패를 부렸다는 자가 정말 귀족일지, 젠트리일지, 그도 아니면 낭인이 허세를 부린 것인지... 무엇하나 알 수 없습니다."

그래, 여전히 불확실하다.

벨라를 폭행한 자의 정체도 불확실했고, 벨라가 품은 아이가 정말 그날의 폭행범의 아이일지도 불확실했다.

모든 게 불확실했다.

허나 하나는 확실했다.

1황자의 피가 필립스 백작령에 남아있는 것만큼은,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필립스 백작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그대에겐 참 많은 은혜를 입었네."

"아닙니다, 백작님. 제가 입은 은혜가 훨씬 귀했습니다."

"영주성 안에 분만실이 있네.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져 있으며, 본래는 필립스 가의 일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네. 때가 되었을 때 영주성 안의 분만실을 그대의 모친이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겠네. 괜찮은가?"

필립스 백작과 레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스산한 침묵이 흐른 끝에,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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