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3)
94화
맙소사, 아빠라니!
내가 저 악마 같은 새끼의 애비라니!
"크아악!"
따져 보니 벨라와 표면적으로라도 연을 맺는다는 건 레이를 슬하에 두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지미가 뒤늦게 각혈하며 레이를 노려봤다.
"닥쳐!! 내가 왜 네놈 애비야?!"
"엄마 남편이면 제 아빠죠."
"한 번만 더 날 아빠라고 부르면, 절대 안 도와줄 줄 알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드러내는 지미를 보고 레이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닥치라고 했지!!"
레이에게 아빠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미는 등허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지미에게 있어 레이는 악마와 비견되는 비열한 인성을 지닌 이해 불가의 존재였다.
그런 놈이 내 자식이라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몸을 덮쳤다.
물론, 레이를 슬하에 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분명 존재했다.
레이는 그 점을 지미에게 상기시켜보려고 옛날에 던졌던 공수표를 다시 던졌다.
"아빠, 아빠 아들이 누구?"
"크아아악!!"
눈이 반쯤 돌아간 지미가 비명을 질렀다.
결국 레이도 설득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
필립스 백작령에 소문 하나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지미가 술 한잔하며 험한 일을 겪은 벨라를 위로해주다가 하룻밤 눈이 맞았는데, 그만 애가 들어섰다.
그런 자극적인 소문이 필립스 백작령을 뜨겁게 달구었다.
혹자는 지미가 자기 '실수'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리라 장담했다.
지미가 뭐가 아쉽다고 창부와의 실수를 인정한단 말인가.
허나 지미는 벨라가 자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고 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지미의 결단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가, 레이를 떠올리곤 상황을 납득했다.
"레이 눈치 보여서 저러는구만?"
벨라의 아들은 스콰이어였으니까, 스콰이어와 연결된 기사들의 눈치가 보였다고 하면 대충 말이 됐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가설이 나돌았지만, '벨라가 지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의구심을 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결혼식은 최대한 빠르고 간소하게 진행될 계획이었다.
허나 두 지역을 아우르는 암흑가의 지배자, 지미의 결혼식이다.
본인이 싫다고 해도 판이 커지는 건 불가피했다.
결국 결혼식 당일날 꽤 많은 수의 하객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결혼식까지 약 두 시간 정도 남았을 때.
벨라는 교회의 대기실에서 자기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어색한 손길로 매만졌다.
이런 화려한 드레스를 교회에서 입을 일이 생기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더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리 거창하게 식을 올릴 수 있으리라곤, 망상으로라도 꿈꿔보지 못했다.
"그..."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있는 지미를 향해, 벨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지미는 자기 암시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가정을 차려서 평생 동안 오순도순 얼굴 보고 살자는 건 아니잖아? 이건 그냥 위장일 뿐이야."
만약에라도 벨라가 낳은 아이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부친이 누구인가 정확하게 명시해두는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악랄한 갱단의 수장이야. 가정에 충실해 봤자 얼마나 충실하겠어?"
"..."
"그냥 몇 달 남편 흉내 좀 내다가 밖으로 나돌아도 아무도 의심 안 해. 혹시 다른 여자 생기면 당신한테 돈이나 쥐여주고 이혼하면 되는 거고."
지미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려다 손을 말아쥐었다.
안 그래도 머리숱이 적어지는 데 자꾸 자극하면 안 됐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 뱃속 아이를 위해 잠깐 연기한다고 생각해."
"...고마워요."
벨라로서는 전할 감정이 그것밖에 없었다.
지미는 가볍게 말했지만, 오래 굴러먹은 창부와 식을 올린다는 건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창부가 품고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고 말이다.
지미는 벨라와 연을 맺으며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자면 '레이'가 발행한 공수표의 전망이 밝긴 했다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보상이었다.
미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벨라를 향해 지미가 자기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냥 좀 웃어.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잡아온 줄 알겠어."
"푸흡..."
벨라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지미가 나서서 문을 열어주니 매튜와 함께 카렌, 요하나, 루나가 고개를 쏙쏙쏙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그... 결혼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구나."
"선물 전해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보아하니 선물을 들고 헤매고 있던 아이들을 매튜가 데려온 모양이었다.
지미가 피식 웃으며 문을 완전히 열어주었다.
아이들이 포장된 상자를 들고 쪼르르 벨라에게 다가갔다.
"경사 맞으심을 축하드려요! 화목한 가정 이루시길 기원할게요!"
어디서 듣고 외운 듯한 문구를 열심을 읊는 카렌을 보고 벨라가 활짝 웃었다.
"이렇게 와 줘서 너무 고마워."
"이거 저희가 같이 준비한 선물이에요!"
"정말?"
이런 경사스러운 날 받은 선물은 자리에서 곧장 풀어보는 게 예의였다.
벨라가 상자를 열자 고급 식기 세트가 반짝이는 조명 아래 드러났다.
예상보다도 한참 값비싼 선물에 벨라가 깜짝 놀랐다.
"어머!"
벨라의 반응에 카렌이 흡족한 얼굴을 했고, 요하나는 살짝 불편한 얼굴을 했다.
평소 카렌은 레이에게 도움 되는 물건을 선물하고 싶다며 용돈을 받는 대로 모아놓았다.
정작 괜찮은 물건을 찾지 못해 돈만 잔뜩 쌓여갔는데, 이번에 탈탈 털어넣었다.
그에 반해 요하나는 용돈을 받는 대로 쓰는 타입이라, 벨라의 선물을 사는데 들어간 예산은 대부분 카렌과 루나의 것이었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벨라는 연신 탄성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너무 너무 고마워. 소중히 아껴 쓸게."
비록 위장이라고 해도 이리 축복 받는 결혼식을 경험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벨라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가 맺혔다.
한편.
지미는 잠깐 자리를 옮겨 매튜를 상대하고 있었다.
매튜가 지미의 검은 코트를 정돈해주며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큽... 옷이 참 잘 어울...크흡! 어울리는 것 같아, 대장."
"시발 너 지금 놀리려고 왔냐?"
"크읍... 차라리 내가... 큽! 대장 대신... 큽! 이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이거 미친놈 아니야?"
지미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매튜는 지미의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다, 복부를 가격하던 주먹이 얼굴을 향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팔을 들어 올렸다.
"아우! 대장, 이 좋은 날에 얼굴 상하게 하면 안 되지."
"내 얼굴이 중요하지, 네 얼굴이 중요하냐?"
이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그날 날 버리고 그렇게 도망쳐 버리다니.
지미의 주먹질에 분노가 깃들었다.
결국 인중에 정타를 허용한 매튜가 얼굴을 감싸 쥐고 앓다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장, 큰 결심 했네."
"그래, 큰 결심 했지."
"뭐어..."
주변을 둘러본 매튜가 지미와 가까이 붙은 채 작게 속삭였다.
"레이 그놈이 은혜를 모르는 녀석은 아니니까... 나중에 잘해줄 거야."
"안 그래도 이자까지 쳐서 단단히 받아낼 생각이다."
"내가 대장 존경하는 거 알지?"
"존경은 개뿔."
혀를 찬 지미가 복장을 정돈한 채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지미와 벨라가 황급히 무릎을 낮추려 했다.
알레시아가 곧장 말렸다.
"그러지 말거라. 드레스가 더러워질 수 있으니, 오늘은 특별히 무례를 용서해주겠다."
"알레시아 님을 뵙습니다. 여, 여긴 어떻게...?"
"필립스 백작님께서 두 사람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다."
알레시아가 백작을 '필립스 백작님'이라 칭했다는 건 백작이 공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음을 뜻했다.
알레시아가 벙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빠와 내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음을 양해해다오."
귀족이 평민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건 통상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알레시아가 식 전에 잠깐 얼굴을 내민 것만 해도 상식에 많이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선물을 준비했으니 기뻐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젠킨슨이 다가와 작은 상자 두 개를 지미와 벨라에게 건넸다.
상자 속에는 남성용과 여성용의 브로치가 각각 담겨 있었다.
브로치의 중앙엔 행운을 상징하는 초록색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끄응...'
지미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백작의 호의는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괜히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일단 감사를 표한 지미가 브로치를 바로 착용했다.
벨라의 조금 허전해 보이던 어깨 아래에도 아름다운 브로치가 새롭게 자리했다.
지미는 복잡한 생각을 일단 뒤로 밀었다.
당장은 그저,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기뻐하기로 했다.
그날 지미와 벨라는 연을 맺었다.
다분히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형식상의 결혼이었지만, 벨라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로얄가드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1황자 카리우스를 베었지만, 레인저들의 거센 저항 탓에 시체를 회수하는 데 실패했다.
말인즉슨 드래곤 하트의 파편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황족의 코어 역할을 하는 드래곤 하트의 파편은 반드시 회수되어야 한다.
로얄가드는 전력을 정비한 후 시그니 산맥을 초토화시켜서라도 반드시 드래곤 하트의 파편만은 회수하려 할 것이다.
때문에 카리우스는, 위협을 피하려면 당장 시그니 산맥을 벗어나야 했다.
카리우스가 루비하 왕국 깊숙이 몸을 숨긴다면 제국도 일단은 루비하 왕국과 외교적인 해결이 가능한가 물색할 것이다.
허나 카리우스는 시그니 산맥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로얄가드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카리우스는 그들을 단죄하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릴 생각이었다.
"배반자들의 죄를 내 손으로 직접 물을 것이다."
복수를 다짐하는 카리우스의 곁에서 루비하 왕국의 제2특수작전단, 속칭 '레인저'의 단장 아르투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탐욕의 악마가 다시 세상을 향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던 타라니스 가가, 작디 작은 탐욕의 속삭임을 듣고 은밀하게 발아했다.
탐욕. 그가 관장하는 권능은 불멸.
타라니스 가는 탐욕의 권능을 온전히 하사받길 바랐다.
그리하기 위해선, 탐욕의 악마를 이 세상에 더욱 가까이 불러들여야 했다.
탐욕의 악마를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오직 거대한 목소리뿐이다.
공포에 빠져 울부짖는, 끔찍한 죽음에 저항하고자 하는, 생을 원하는 목소리.
전쟁.
전쟁이 필요했다.
때문에 1황자의 망명을 부추겼고, 죽어가는 1황자에게 몇 존재하지 않는 '유물'을 사용해 탐욕의 힘을 받아들이게 했다.
준비가 하나둘 갖춰져 간다.
늙어가는 루비하 왕국의 국왕을 은밀히 회유하는 것도 성공을 앞두고 있었다.
카리우스가 제국의 추적자와 다시 맞닥트렸을 때.
전쟁의 신호탄이 터진다.
곧 제국의 추적자들이 시그니 산맥으로 짓쳐들어올 것이다.
제국에 대단한 혼란이 발생해, 행정이 마비라도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지금 뭐라고 했나?"
필립스 백작이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고 당혹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플로리아는 필립스 백작의 반응을 이해하며 또박또박 끊어서 다시 말했다.
"1황자가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2황자께서 암습을 당해 승하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