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2)
93화
지미의 줄어가던 머리카락이 천장을 향해 쭈뼛 섰다.
'쾌락 없는 책임'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지미의 단련된 육감은 굉장히 기민하게 불길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도 눈치 하나만큼은 매튜가 지미보다 몇 단계 뛰어났다.
매튜는 직감적으로 이대로 있다가는 좆된다는 걸 깨달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매튜가 곧장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쨍그랑!!
창문을 깨고 3층 아래로 몸을 던진 매튜가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등에 유리조각이 몇 개 박혔지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매튜가 다급히 달려나가 골목 사이로 몸을 감췄다.
"..."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지미가 뒤늦게 레이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발을 옮긴 지미는 간신히 사무실 문앞에 도착했다.
지미가 곧장 사무실 밖으로 몸을 던지려던 순간.
쩌적!
갑자기 생겨난 얼음이 지미의 왼쪽 발을 바닥에 묶었다.
도주에 실패한 지미가 결국 미간을 와락 구기며 짜증을 토해냈다.
"아니 또 왜?!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인데?!!"
"진정하고 여기 앉아봐요."
레이가 지미를 반쯤 강제로 끌고 와 의자에 앉혔다.
툴툴대는 지미를 향해 레이는 솔직하게 상황을 밝혔다.
"엄마가 아이를 가졌어요. 정황상 사고 치고 도망간 귀족놈 아이인 것 같아요."
"?!"
상상도 못한 폭탄 발언이었다.
벙 쪘던 지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뭐? 아이를 가져? 임신했다고? 그것도 귀족의 아이를?"
"네. 그래서 남들 눈을 속이기 위해... '부친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하나 필요할 것 같아요."
"..."
지미가 제자리서 얼어붙었다.
잠깐의 침묵 후.
지미가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레이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해줄 거죠?"
"해주긴 뭘 해줘 이 시발놈아!!!!!"
지미가 괴성을 지르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크아아악!! 내가 미쳤냐?! 안 돼!! 못 해줘!!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이 악마야!!"
분노가 가득 서린 검격이 레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는 휘몰아치는 지미의 공격을 피하다가 결국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지미,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닥쳐!! 닥치라고!!"
"지미, 나는 벨라에게 빚을 졌어요."
레이의 눈가에 슬픔이 깃들었다.
*
이 빌어먹을 세계에 환생한 후.
나는 한동안 생물학적 애미 애비가 교접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살아야 했다.
헉헉 앙앙 퍽퍽.
참으로 좆같은 경험이었다.
반쯤 강제로 귀가 열려 있던 탓에 나는 좋으나 싫으나 생물학적 애미애비의 대화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생물학적 애미에겐 언니가 한 명 존재했다.
생물학적 애미의 언니의 이름은 벨라. 내게는 이모 되는 사람이다.
벨라와 생물학적 애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고 한다.
벨라는 험한 세상에서 동생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창관에 발을 들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만, 굶어 죽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했을 터다.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일임에도 벨라는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덕분에 벨라는 창관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 괜찮은 수익을 얻게 됐다.
벨라는 비록 자기 자신은 창관에서 몸을 버렸을지언정, 동생은 귀하게 키우려 노력했다.
벨라의 노력 덕분에 내 생물학적 애미는 그럭저럭 모자람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내 생물학적 애미는 그럭저럭 얼굴이 반반했고, 그 덕분에 나름 괜찮은 남자를 꾀어 인연을 맺는 데 성공했다.
허나, 내 빌어먹을 생물학적 애미는 천성이 방탕하고 문란했으며 개념이 없었다.
벨라의 희생이 무색하게, 그년은 가정을 꾸리고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그년은 심지어 생물학적 애비와 함께 벨라의 뒷담을 하며 경멸의 감정을 내비치곤 했다.
어떻게 돈을 받고 다리를 벌릴 수 있냐며, 자기 언니와 자기 언니가 지닌 직업을 향해 역겨움을 드러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생물학적 애미를 몇 번이고 비웃었다.
천박하고 미천한 창부는 벨라가 아니라 바로 네년이다.
내가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네년부터 찢어 죽여버릴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 다짐했으나, 나는 패륜을 저지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담대한 불륜 행각이 계속되던 와중.
어느날 호적상 아버지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생물학적 애미애비는 서로를 핥아대는데 정신이 팔려 호적상 아버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호적상 아버지를 두 눈으로 보고도 침묵했다.
호적상 아버지의 인기척이 가까워졌지만 남녀의 달뜬 신음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추후 알게 된 사실이다만.
그날 호적상 아버지가 집에 일찍 돌아왔던 이유는 자기 여동생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기사의 종자가 되어 미궁에 들어갔던 자기 여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호적상 아버지는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생물학적 애미애비는 그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몸을 섞으며 내 호적상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시야 끝에서 호적상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다가온다.
호적상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는, 가장 먼저 생물학적 애비의 대가리를 반으로 갈랐다.
생물학적 애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도끼질은 계속됐다.
아 시발.
속이 시원하네.
박수라도 힘차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팔에 힘이 붙지 않아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비명 끝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당한 심판을 끝낸 호적상 아버지는 미적미적 다가와 날 내려다봤다.
이제는 호적상 아버지도 내가 자기 자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호적상 아버지가 당장 내 머리를 도끼로 내려찍는다 해도, 나는 호적상 아버지를 결코 원망하거나 힐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적상 아버지는 갈등하듯 한참을 더 나를 바라봤다.
길고 긴 대치 끝에 질린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갓난 아이의 한숨은 옹알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아..."
"......."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나의 한숨이, 호적상 아버지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는지 말이다.
호적상 아버지는 결국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가족을 전부 잃었다고 판단한 호적상 아버지는,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막이 찾아온 공간 속에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나는 악의가 가슴 속을 달구는 것을 느끼며 그저 인내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호적상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것을 걱정한 지인이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의 지인은 집안 꼴을 보고 구역질부터 했다.
그 다음부터 일이 좀 복잡해졌다.
보호자를 잃은 나는 언제 뒈져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벨라가 가장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겼다.
동생을 잃은 그녀는 참 많이 울었다. 갑자기 벌어진 비극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벨라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머리가 쪼개질 때까지 철이 들지 못했던 자기 동생도.
자기 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내 생물학적 애비도.
자기 동생의 머리를 쪼갠 내 호적상 아버지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저 많이 슬퍼했다.
슬픔을 꾸역꾸역 마음속에 쑤셔 넣은 벨라는 일단 나를 거두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내 생물학적 애비 말인데, 신분이 하필 젠트리였다.
생물학적 애비가 속했던 귀족가는 평소 생물학적 애비를 신경도 안 쓰고 방치하다가, 막상 살인 사건이 터지자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벨라를 찾아왔다.
그들을 벨라에게 호적상 아버지의 연좌제를 물어 나의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라가 나를 내어주길 거부하자, 막대한 배상금을 대신 지불하라고 강요했다.
이 사건을 들은 필립스 백작이 벨라를 불쌍히 여기고 적정한 타협안을 대신 제시해주었다.
필립스 백작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벨라는 그때까지 창관에서 일하며 모아두었던 모든 재화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나는 그때 갓난아기였기에, 벨라는 남에게 숨겨왔던 비밀스러운 소망을 나에게 털어놓고는 했다.
벨라는 가정을 가지길 원했다. 자기 배로 낳은 사랑스러운 아이가 차근차근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길 바랐다.
벨라는 자기 동생이 좋은 혼처를 얻어 독립한 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매춘부인 벨라가 정상적인 가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돈 많은 자의 첩으로 들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열심히 모은 재화로 기둥서방을 구해야 했다.
허나 그때 벨라는 젊고 아름다웠기에,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남자를 붙잡아 소망을 이루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 벨라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빈털털이가 된 채 아이까지 맡게 된 벨라는 결국 창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벨라에게 짐덩이였다.
그녀의 소망을 부순, 빌어먹을 종양 덩어리였다.
그럼에도 벨라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인 나에게 자주 환히 웃어주었다.
"우리 둘다 운명이 기구하구나."
벨라가 작디 작은 내 손에 자기 손가락을 쥐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말렴. 안심해도 된단다."
그날 보여주었던 벨라의 따뜻한 미소가...
"오늘부터... 내 아들하자. 오늘부터 네가 내 아들이야."
식어가던 나의 영혼을 달구었다.
"아들, 고마워. 아들 덕분에 엄마가 소원 이뤘네?"
나는 그날.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손아귀로 벨라의 손가락을 움켜쥐며 맹세했다.
그래, 오직 당신을 위해.
이 빌어먹을 세상의 멸망을 막아보겠다고.
*
"크흡...! 흡...!"
이야기를 듣고 질질 짜는 지미를 바라보며 레이가 턱을 괴었다.
대체 저런 감수성과 멘탈로 용병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 의아했다.
하긴 타고난 성정이 저러니 필립스 백작령으로 내려와 보육원 차릴 생각을 했을 터다.
"지미, 근데 내 말을 믿어요?"
레이가 뒷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레이는 자기가 '갓난아기 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갓난아기 때 벨라가 자기 앞에서 남몰래 입에 담았던 소망을 이뤄주고 싶다고 지미에게 이야기했다.
말을 하면서도 믿어줄까 의문이었는데, 지미는 도리어 의아한 얼굴로 레이에게 되물었다.
"9살 때 검기를 발현한 미친놈이 갓난아기 때 기억 좀 가지고 있다고 이상할 게 뭐 있어?"
"...그건 그렇네요."
납득한 레이가 헛기침을 했다.
"흠, 지미...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탁할게요. 남의 의심을 사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요. 누군가 이름이라도 빌려주면 좋겠는데, 믿을 사람이 지미나 매튜 정도밖에 없어요."
"나한테 뭘 원하는데?"
"그... 술 먹고 엄마랑 한 번 잤다고... 증언해주면..."
어색하게 중얼거리는 레이를 향해 지미가 호통쳤다.
"됐어! 할 거면 제대로 해!"
"...네?"
"어차피 지금은 마음 가는 여자도 없었어. 벨라 뱃속의 아이, 내 아이라고 밝히고 아예 식을 올리자고."
"진심이에요?"
"나한테 나중에 짝 생겼을 때, 그때 이혼하든가 해. 그럼 되잖아?"
"..."
지미의 제안에 레이가 퍽 감동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처음 보는 레이의 표정을 보고 지미가 실소를 터뜨렸다.
"왜, 고마워 죽겠냐?"
입을 우물거린 레이가 망설이다 물었다.
"...오늘부터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크아악!!"
지미가 각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