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1)
92화
나태한 황태자. 황실의 망나니.
불경한 자들은 카리우스를 그리 칭하고는 했다.
카리우스는 실제로도 망나니라고 소문이 났으나 그러한 평판은 상당히 왜곡된 것이었다.
황태자의 직위를 가진 자가 작정하고 망나니 짓을 했을 때.
그 여파가 얼마나 커다랄지는 겪어보지 않은 자는 몰랐다.
카리우스는 망나니 흉내만 냈지, 실제로는 황제의 손아귀 안에 얌전히 잡혀 있는 편이었다.
황제가 잡아챌 수 있는 목줄을 카리우스는 언제나 목에 두르고 있었다.
카리우스는 이를 나름의 처세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눈 밖에만 크게 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면, 알아서 권력이 결집될 것이라 여겼다.
크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다들 황태자란 직위를 지닌 카리우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열성이었으니 말이다.
카리우스가 생각하기에, 서자는 아예 경쟁할 상대가 아니었고 2황자는 그 성정이 난폭하여 지금 같은 평화로운 시기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크게 착각했다.
카리우스의 가장 큰 결점은 성격이 아닌 '무능'이었다.
눈치 보기만 즐겨하는 카리우스를 보고 황제는 판단했다.
카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앉으면 황권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황제가 카리우스를 버렸다.
황제의 함정에 말려든 카리우스는 황태자 직위를 반납해야 했다.
2황자는 카리우스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건 모두가 알았다.
권력의 냉정함 앞에, 카리우스와 가까웠던 자들이 하나둘 떠나가거나 숙청당하기 시작했다.
카리우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황제도, 형제도, 권력에 아부하던 귀족들도 모두가 등을 돌렸다.
카리우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권력에서 밀려나고도 천수를 누린 황족이야 다수 존재했지만, 상대가 2황자였다.
그냥 황족도 아닌, 한때 황태자 직위를 지녔던 카리우스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공포에 빠진 카리우스에게 혹할 만한 제안이 찾아왔다.
루비하 왕국으로의 망명.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였다.
카리우스는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한 후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상심한 카리우스에게 더는 대담한 욕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허나 추적자가 따라 붙었다.
한둘도 아니었으며, 로얄 가드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카리우스는 황제에게 격분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인데,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충성했는데, 이렇게 쓰레기 치우듯 치워버릴 수 있냐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결국 국경을 넘는 것은 성공했지만 추적자에게 따라 잡혔다.
가로 막는 레인저들은 뚫어낸 추적자들이 마침내 카리우스에게 검을 겨눴다.
기억의 마지막에서, 카리우스는 자기 허리가 양단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분하고, 억울하고... 죽음이 두렵구나.
공포에 질린 카리우스는 하늘로 손을 뻗은 채 의식을 잃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탐욕.]
언젠가부터, 칠흑 속에서 무언가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모든 생물이 지닌,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강렬한 탐욕. 삶을 향한 갈망.]
시야가 갈라지며 괴기한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문에 그분은 탐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불멸이라 불리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사방을 가득 메운 끈적한 무언가가 몸을 뒤덮는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여, 그분의 힘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소서.]
치지지직!
멈춘 심장 속에서, 코어를 대체하는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홀로 박동하며 검게 물들었다.
핏기가 가신 손아귀가 천천히 움직여 주먹을 말아 쥔다.
길게 찢어진 붉은 동공이 빛을 되찾았다.
"그 배반자 놈들을 전부 죽여버릴 것이다."
*
"아으...!"
레이가 자기 머리를 쥐어 싸맸다.
혈압이 급격히 높아져 눈앞이 번쩍였다.
근래 벨라의 행동이 영 이상하긴 했었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에서 폭행을 당한 후 약 한 달간 교회에서 머물렀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교회에 잔뜩 실려 온 지미 패밀리를 보고 레이를 가볍게 질책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벨라는 한 달 동안 무사히 상처를 회복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집으로 돌아온 벨라는 '정리할 일이 남았다'며 다시 라일락의 저녁으로 출근했다.
레이가 라일락의 저녁을 무너뜨린 탓에 벨라가 출근한 곳은 간판을 바꿔 단 옆 건물이었다.
레이는 이때 무슨 일이 있겠구나 감을 잡긴 했다.
허나 일단은, 벨라를 지켜봤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에 재출근하고 한 달 후에 은퇴했다.
벨라가 은퇴하는 날 간소하게나마 파티도 열렸다. 일종의 송별식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가 바로 오늘이다.
벨라의 폭탄 선언에 레이는 괴상한 신음을 연거푸 내뱉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기 뺨을 쫙쫙 몰아쳤다.
"엄마, 임신했어?"
"글...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벨라를 보고 레이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애비가 누군데?"
"...최근 받았던 손님 중에 있지 않을까?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피임구에 문제가 있었나봐."
"엄마, 솔직히 말해."
레이의 이빨이 부드득 갈렸다.
"그때 그 새끼지?"
"..."
무언의 긍정에 레이가 재차 폭발했다.
"아니 시발 엄마!!! 진짜 제정신이야?!!"
"아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말버릇이고 나발이고!! 아오!!"
레이가 두 손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려다 간신히 팔에서 힘을 뺐다.
임신한 벨라를 앞에 두고 물건을 쾅쾅 부숴댈 수는 없었다.
"으그그그그그그그그극...!!!!!"
레이가 앓는 소리를 길게 빼며 최대한 벨라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몸을 팔다 쓰레기의 폭행에 노출되는 것? 간간이 있는 일이다.
물론 벨라의 경우 아예 폭행에 방치당하긴 했지만, 어디 병신된 곳 없고 무사히 회복했으니 객관적으로는 대단한 사고라 평하기 힘들었다.
매춘부가 피임에 실패해 아이를 가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지미 패밀리가 백작령을 완전히 장악한 후엔 창관의 관리가 많이 섬세해져 그런 일이 크게 줄었지만, 과거에는 이래저래 개판이었다.
안전하게 낙태할 돈도 없는 매춘부는 낳은 지 얼마 안 된 자기 아기를 길거리에 유기하곤 했다.
레이가 보육원으로 주워 온 갓난아기 상당수는 그러한 케이스였다.
"끄으으응..."
뭐, 어쨌든 간에.
벨라 입장에서 이번 일이 레이가 느끼는 것 만큼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이 세계에서도 아이를 지우는 건 당연히 가능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건강에 좋았고 말이다.
허나 벨라는 한 달 동안 몸을 회복하고, 알리바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는지 한 달 동안 다시 창관에 나가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에야 임신 사실을 처음 알렸다.
레이의 한숨이 길어졌다.
벨라가 혈육에게 보이는 애정과 헌신. 그리고 레이가 벨라에게서 뺏어간, 그녀의 소망.
레이는 알 수 있었다. 벨라는 아이를 지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엄마... 하필 낳아도 그 개망나니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겠어?"
"아빠가 누구든 아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니."
잠시 침묵한 벨라가 썩 들뜬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기왕이면 평민 씨앗보단 귀족 씨앗이 좋지 않을까?"
레이가 초롱초롱한 벨라의 눈빛을 보고 뒷목을 붙잡았다.
'진정하자, 진정.'
이쪽 세계 사고관을 생각하면 벨라가 저리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귀족에 대한 환상은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것이었고, 천민이나 평민이 귀족을 동경하는 건 당연했다.
레이가 자포자기해 중얼거렸다.
"그래, 시발. 기왕 씨를 받을 거면 구하기 힘든 로얄 시드가 낫지."
노말 가챠보다는 확률업 가챠다 이 말이야.
영혼 털린 얼굴을 한 레이를 향해 벨라가 웃음꽃을 피우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엄마는 뭐가 좋은데?"
"아무래도 딸이 좋지. 아들 키워보니까 재미가 없더라."
"제가 어머니 속을 대차게 썩였어야 새로 낳겠다는 생각을 안 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레이는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앞으로 몇 달 뒤면 벨라의 아이가 태어날 거다.
벨라의 아이라는 건, 레이의 동생이란 뜻이었다.
"으그그그그극...!!!"
동생, 동생이라니!
호적으로 따지면 친동생이고 혈연 관계로 따져도 사촌 동생이다.
그건 상관 없지만, 동생 애비란 작자가 씹어먹을 개새끼라는 걸 상기하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작게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레이를 바라보던 벨라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낳아도?"
"하아, 엄마."
머리를 벅벅 긁어낸 레이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동생 애비일 가능성이 있는 작자가 무슨 결말을 맞았는지는 벨라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레이는 '망명을 시도하다 죽은 고위 귀족'에 대해 벨라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벨라가 자기 팔목을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내 아이... 위험할까?"
벨라는 벌써부터, 자기 자신이 아닌 뱃속의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답답한 모습을 보고 레이가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아직 레이가 환생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뇌리를 헤집는다.
'걱정 마렴. 안심해도 된단다.'
입술에서 피가 터진다. 레이의 입속에서 비릿한 혈향이 넘쳐 흘렀다.
'오늘부터 내 아들하자.'
"후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레이가 입을 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엄마는 아들이 지킬 거야."
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내 동생도, 내가 지켜야지."
"아들..."
퍽 감동한듯한 벨라를 앞에 두고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아, 근데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 태어날 때 머리 위에 '귀족'이라고 찍혀나오는 것도 아니고."
씨를 뿌린 귀족 가문에 먼저 찾아가 따지고 들지 않는 이상 벨라가 아이를 낳든 말든 신경 쓸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괜한 의심을 받는 건 피하는 게 좋았다.
벨라가 굳이 한 달을 더 창관을 왔다갔다한 것도 추후 핑계를 대기 위한 목적이었다.
허나 레이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로는 조금 부족했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남의 눈을 속이는 게 좋았다.
레이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엄마, 이건 어때?"
*
"으으음..."
사무실로 찾아온 레이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양심이 맨들맨들 해 남의 뒤통수를 심심찮게 쳐 온 레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레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운을 뗐다.
"지미, 매튜."
"...?"
지미와 매튜가 세상 떫은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저렇게 뜸을 들이는 꼴을 보니 괜히 마음만 더 불안해졌다.
슬금슬금 도망갈 준비를 하는 둘을 향해 레이가 어렵사리 본제를 꺼냈다.
"혹시 '쾌락 없는 책임'이란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지미의 줄어 들어가던 머리카락이 천장을 향해 쭈뼛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