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 (3)
91화
브랜딜은 필립스 백작령을 나름 가까운 이웃처럼 여기고 있었다.
신입 레인저들은 필립스 백작령도 제국의 일부라며 맹목적으로 적대하곤 했지만, 강제로 학습된 적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법이었다.
브랜딜은 때때로 소소한 연민까지 백작령에게 느끼고는 했다.
'제국 중추 세력에게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이쪽 눈치도 봐야 하는 처지니.'
물론 이제까지 레인저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레인저의 남하는 곧 루비하 왕국과 제국의 전면전을 뜻한다.
레인저 창설 이후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루비하 왕국과 제국의 갈등이 고조된 적은 없었다.
다만 레인저들이 작정하고 필립스 백작령을 괴롭히고자 한다면, 방법이야 많았다.
브랜딜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웃 사이니까 얘기해주는 거야. 공감대도 있고. 우리나 너희나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쁘잖아?"
필립스 백작령 밖으로 정보가 새나가면 재미없을 거란 협박이었다.
레이가 실소했다.
"너희들이랑 척질 생각 없으니까 겁박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레이의 확언에 브랜딜이 작게 웃었다.
"그 기사에 그 종자네. 뭐, 좋아. 최근에 제국의 고위 귀족이 이쪽 루트를 통해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 했어. 우리는 제국의 고위 귀족을 추적자로부터 보호하라는 임무를 하달받았고."
"...그래서 시그니 산맥에서 우리를 마주쳤을 때 민감하게 반응했군."
"그 말이 맞아."
레이가 서랍에서 깨끗한 붕대를 꺼내 브랜딜에게 던졌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는 놈, 정확한 정체가 뭐야?"
"정보를 너무 싼값에 거저먹으려 하는데."
"대답해."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우리도 몰라. 상대가 정말 제국의 귀족이 맞는지도 알 수 없어. 원래 현장 뛰는 애들한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진 않거든. 물론 최고 기밀이라 알아도 말은 못 해줘."
"그렇군."
레이는 굳어 더 캐묻지 않은 채 넘어갔다.
레인저는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특수 부대다.
어설픈 회유와 고문으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굳이 날을 세워가며 어설픈 기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보아하니 추적자랑 한 판 붙은 모양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레이가 이번엔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육포 더미를 꺼내 던졌다.
육포를 잡아챈 브랜딜이 실소를 터뜨렸다.
"간식 받아먹은 애완견이 된 기분인데?"
"대답해. 아니면 이것도 기밀이라서 답 못 해주나?"
"으음... 네 추측 대로, 제국 측의 추적자랑 제대로 붙었어."
"...왕국이 자랑하는 레인저의 명성이 허명이었나? 홈그라운드에서 붙어놓고 부상을 입은 채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레이는 브랜딜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됐다.
차라리 레인저 간의 내분이 발생해 브랜딜이 상처를 입고 제국령으로 도망쳤다는 게 말이 됐다.
눈살을 찌푸린 레이에게 브랜딜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 측이 보낸 추적자들의 무위가 예상을 크게 벗어나 있었어."
"...?"
"추적자 중 그래듀에이트만 최소 다섯이었어. '최소'. 내게 들어온 보고만 그 숫자였으니, 더 있었을걸?"
"..."
개소리.
거짓말 그만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브랜딜의 이야기가 아주 허황된 건 아니었다.
최근 황실 권력 구도에 격변이 일었다.
2황자의 잔인한 손속을 두려워한 제국의 고위 귀족이 망명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망명을 택한 귀족이 제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라면 황실 또한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그래듀에이트를 분대 단위로 파견했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제국이 보낸 추적자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요인 확보? 혹은 요인 사살?'
확보를 우선하되 여의치 않으면 사살하라. 아마 그쯤 아니었을까.
레이는 홀로 자문자답하다가 다시 브랜딜을 마주 봤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전 결과가 어떻게 됐지? 너희가 망명을 시도한 귀족을 확보한 건가?"
"..."
브랜딜의 옆에 있던 레인저가 대놓고 살기를 내뿜었다.
이런 곳에서 떠벌리기엔 너무 귀한 정보라는 걸, 레이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시그니 산맥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결말을 맺었는지 알아야 필립스 백작령도 처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만약 루비하 왕국이 망명을 시도한 귀족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면 제국은 2차 추격대를 보내거나, 경우에 따라선 일이 더 커질 수 있었다.
"대답해."
"이봐."
브랜딜이 레이를 향해 허리를 조금 기울였다.
"너무 기어오른다 생각하지 않아? 이 정도에 만족하는 게 어때?"
"불순한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야."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풀었다.
레이가 몸에 지니고 있던 마지막 무기였다.
레이는 거침없이 허리춤의 검을 레인저를 향해 던졌다.
촤악!!
검집이 땅에 쓸리며 거친 소리를 낸다.
레이가 비무장이 된 채 레인저들 사이에 섰다.
"필립스 백작령은 와일드호그 사이에 낀 토끼 신세지. 어떻게 몸을 사려야 무사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야."
"...거 참 담대한 친구네."
레이가 아무리 엑스퍼트라 해도, 비무장 상태로는 결코 레인저에게 저항할 수 없다.
허나 레이는 검 한 자루 없이 레인저 셋 사이로 걸어들어왔다.
브랜딜은 찰나 간 고민했다.
이대로 레이를 깔끔하게 베어버린 후 여기를 떠날까, 하고.
허나 나이 어린 종자의 패기가 꽤 마음에 들었으며, 레이의 심정 또한 충분히 이해됐기에 브랜딜은 검을 뽑지 않았다.
"우리가 실패했어."
"..."
"제국의 추적자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레인저들을 뚫고 들어와 요인의 허리를 양단했어."
"추적자가 요인을 사살하는데 망설임은 전혀 없었나?"
"없더라고. 깔끔하게 일 마치고 퇴각하더라."
처음부터 무조건 사살 명령이 내려졌거나, 생포를 우선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그 시점에서 우리 임무는 추적자를 쫓아 섬멸하는 것으로 바뀌었어. 그 이후로는 보다시피야. 뒤를 쫓다가 반격당해 부상을 입었고, 본진으로 복귀하기엔 거리가 멀어 여길 잠깐 들렸어."
"말해줘서 고맙군."
레이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제국이 성공적으로 요인을 사살했다면 일단은 시그니 산맥에서 2차 충돌이 발생할 확률은 거의 사라졌다.
문제는 임무를 실패한 레인저들이 보복 조치라며 이쪽으로 검을 겨누는 경우인데...
"복수하겠다고 엄한 우리를 들쑤시진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너 확실히 머리 돌아가는 게 빠르구나. 그래... 불안해 할만 해. 화풀이할 상대는 필요한 법이니까."
브랜딜이 허리와 다리의 상처를 붕대로 동여맨 후 손으로 꾹꾹 눌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국과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는 건 위에서도 원하지 않을 거야. 나도 아랫것들이 돌발 행동을 하지 않게 신경 좀 쓸게."
"빈말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레이가 현관 손잡이를 붙잡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빨리 재정비해서 떠나. 사람 해치지 말고."
"육포 잘 먹을게.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평생 볼일 없었으면 좋겠군."
달칵!
현관문이 닫히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
"중대장님..."
"왜, 쓸데없이 정보를 너무 많이 누설한 것 같아?"
필립스 백작령에서 벗어나, 시그니 산맥을 넘어가던 브랜딜이 옆을 돌아보았다.
브랜딜과 10년을 넘게 시그니 산맥을 지켰던 레인저, 모리와 머록.
둘다 표정이 안 좋았지만, 모리는 특히 대놓고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너무 과하셨습니다."
모리는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브랜딜이 작전 정보를 누설해서 불만인 게 아니라,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도 될 자리에 굽히고 들어간 게 불만이었다.
"제국민에게 기밀 사항을 공휴한 것,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의 귀에 들어가면 문제가 크게 되겠지. 너희들이 위에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바로 목이 달아날 거야."
"그럼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보험이야, 보험."
"..."
모리가 곧장 침묵했다.
브랜딜은 또다시 위험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었다.
"모리,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지만, 제국을 함부로 적대해선 안 돼. 체급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제국이 대륙을 평정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루비하 왕국은 제국을 견제하되 적대해선 안 됐다.
때문에 이번 일은 선을 넘었다.
제국이 로얄가드 급을 대거 동원했다.
대규모 전쟁에서라면 모를까, 후방 지원도 제대로 안 되는 특수 임무에 그래듀에이트를 분대 단위로 동원 가능한 세력은 제국에서도 황실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황실이 이렇게 격분할 사안이라면, 루비하 왕국도 훨씬 신중했어야 했다.
"하아, 단장 바뀐 뒤로 분위기 뒤숭숭하더니 지금 우리 꼴을 봐. 제국이랑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고?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
"요인 보호에 실패했으면 거기서 그만 포기해야지. 추적 섬멸 명령을 내려?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
"단장이란 놈이 강경파랍시고 헛짓거리만 골라 하는데... 그러니 저쪽에 미리 신뢰 좀 사 놓자는 거야."
저쪽이라면 필립스 백작령이다.
모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망명이라도 하시려고요?"
"그건 아니고. 왕국과 제국 간 갈등이 거세지면 저쪽도 쫄리기는 마찬가지니까, 혹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미리 끈 좀 만들어 놓자는 거지."
"그 깡촌 놈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모리, 아까 그 종자 놈이 머록의 검을 부러뜨리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침묵하던 머록이 입을 열었다.
"외견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맹한 마나의 기류였습니다."
"봐봐, 종자 놈이 벌써 엑스퍼트야. 저 백작령 기사들도 죄다 만만치가 않아. 난 젠킨슨 걔 처음 만났을 때 놀랐다니까."
"후우..."
한숨을 푹 쉰 모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중대장님 마음은 알겠습니다. ...저한테 뒤통수 안 맞게 조심하십쇼."
"안 그래도 요즘 불안불안 하더라."
브랜딜이 반쯤 진심을 담아 답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
레이는 브랜딜과의 대화 후에 곧장 영주성을 찾아갔다.
브랜딜 일행 말고도 다른 레인저가 백작령에 숨어들었을 수 있었다.
모든 레인저가 브랜딜처럼 융통성이 있지는 않을 터다.
레이의 보고를 받은 백작은 기사들을 비롯해 레이, 지미, 매튜의 의견을 수렴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함부로 병력을 움직였다가 숨어 있던 레인저들이 날뛰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루나와 알레시아의 바람 정령이 정찰에 동원됐다.
바람 정령은 정찰에 있어 굉장한 전술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정령의 활약 덕분에 브랜딜 일행을 제외하고도 레인저 세 명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인저 두 명은 위치가 발각된 후 당연히 저항하려 했다.
허나 기사들은 미리 챙겨놨던 군장을 건네주며 차분히 레인저를 설득했다.
설득 내용은 간단했다. '우린 너희와 적대하고 싶지 않다. 물자를 지원해줄 테니 조용히 떠나라.'
레인저 둘은 조금 떫은 얼굴로 군장을 받아든 후 시그니 산맥으로 떠났다.
남은 레인저 하나가 문제였는데, 발견 당시 이미 은신을 위해 백작령 주민 셋을 죽인 후였다.
"선을 넘었군."
디디에가 레인저의 턱을 붙잡아 부수었다.
사방을 포위한 기사들이 차례차례 레인저의 관절에 검을 박아넣고 비틀었다.
기사들의 검에 검기가 피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검기는, 사람을 너무 쉽게 죽게 만들었다.
기사들은 레인저를 세심하게 찢어발긴 후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목을 효수했어야 하는데."
안타깝지만, 대놓고 레인저를 죽였다고 광고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살해당한 일가족의 시신을 뒤로한 채, 레인저가 은신했던 집에서 걸어나왔다.
레이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고민했다.
'이번에 죽었다는 귀족이... 엄마에게 해를 끼친 그놈인가?'
앞뒤 정황을 보면 그럭저럭 아귀가 맞긴 했다.
뭐, 시체를 들고 와 벨라에게 확인받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도 벨라에게 해를 끼쳤던 잡놈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제 레인저만 날뛰지 않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한동안 필립스 백작령 전체가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기사와 병사들의 경계 근무 시간과 강도가 가파르게 치솟았고, 레이는 보육원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크게 줄였다.
허나 다행히, 그날부터 두 달하고 보름이 지나서도 필립스 백작령에 특별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다.
다들 조금씩 마음을 놓으려던 차에.
폭탄이 터졌다.
"엄마, 뭐라고?"
레이가 눈을 부릅뜬 채,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벨라에게 되물었다.
벨라가 귀 아래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요즘... 달거리가 안 오네? 속도 좀 메스껍고..."
"아 시발 엄마!! 지금 제정신이야?!"
"아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