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 (2)
90화
콰앙!!!!
아르노의 이빨이 부러지고 두 시간 뒤.
라일락의 저녁 1층에 있던 탁자가 벽을 파고들었다.
굉음과 함께 벽이 내려앉고 탁자가 바스러졌다.
아르노에게 불려왔던 잡스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 산산조각이 난 탁자는 4인용 탁자로, 평범한 인간이 홀로 집어 던질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허나 레이의 손에 잡힌 탁자는 몇 미터를 날아가 벽을 때려 부쉈다.
잡스는 눈앞의 소년이 기사의 종자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똑바로 인식했다.
평범한 사람은 우습게 반으로 찢어 죽일 수 있는 초인. 그게 레이였다.
"레, 레이..."
당황해서 물러나는 잡스의 다리를 레이가 경고 없이 걷어찼다.
뻐억!!
정강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잡스의 몸이 옆으로 회전한다.
레이는 바닥을 향하는 잡스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다리가 부러진 고통 탓에 잡스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허나 그보다 빨리, 레이가 잡스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쫘악!! 쫘악!!
레이의 팔이 기계적으로 돌아갔다.
피와 이빨이 잡스로부터 후두둑 떨어져 나왔다.
레이는 잡스의 목이 옆으로 돌아가지 않게 머리끄덩이를 붙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잡스의 팔다리가 얼마 못 가 축 쳐졌다.
레이가 반쯤 기절한 잡스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옆을 돌아보았다.
레이의 옆에는 조직원들이 도열해서 고개를 숙인 채 두 팔을 등에 붙이고 있었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꾹 눌렀다.
"니들이 화대를 나눠 받는 이유가 뭐야?"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이가 다시 물었다.
"니들 같은 양아치 새끼들한테 돈 쥐여주는 이유가 뭐냐고."
여전히 침묵이 일었다.
레이가 옆에 있던 탁자를 붙잡았다.
나무로 된 탁자의 모서리가 레이의 악력에 단숨에 뜯겨나갔다.
담담했던 레이의 눈동자에 거친 파문이 인다.
"야 이 새끼들아."
부글거리는 분노가 목소리에 뒤섞여 터져 나온다.
"돈을 쳐 받았으면 밥값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짐승을 닮은 살기가 공간을 잠식한다.
자리에 선 모두가 벌벌 떨기 시작한다.
그꼴을 본 레이가 헛웃음을 토해내며 조직원들 앞에 섰다.
"내 어머니가 그리될 때까지 니들은 뭘 했어?"
"그... 그..."
"어머니 목이 졸리는 소리를 빤히 듣고도, 귀족 눈 밖에 날까봐 아무것도 안 했지?"
뻐억!!!
레이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조직원의 명치 아래를 가격했다.
허공에 붕 떴던 조직원이 뒤에 있던 탁자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꺼어억...! 컥!!"
조직원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가슴을 붙잡고 각혈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또 다른 조직원의 턱을 붙잡았다.
"귀족은 무섭고, 나는 만만하게 보였지?"
턱을 으스러트릴 듯이 강하게 쥔 레이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비명이 터지고, 아랫니가 박살 난 조직원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야, 지금 내가 묻잖아."
레이가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조직원들을 돌아봤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냐고."
모두가 레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재차 분노가 터져 나왔다.
"대답을 해!! 이 새끼들아!!!"
탁자 하나를 더 날려 먹은 레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이 시발년들아."
까앙!!
레이가 던진 술병이 여자들이 서 있던 방향의 벽과 충돌해 산산이 조각났다.
부서진 유리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유리조각에 살갗을 베인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얼마 안 가 입을 다물었다.
가장 크게 비명을 지른 여자의 얼굴을 레이가 벽면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니들 뒤치다꺼리할 순번이냐?"
레이는 말을 하면서도 두통이 올라와 콧잔등을 강하게 쥐었다.
벨라의 얼굴과 목을 가득 뒤덮었던 멍 자국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갔다.
벨라가 자진해서 '그 방'에 들어가려 했다고 해도, 눈앞의 양아치들이 대가리가 달렸다면 무조건 벨라를 막았어야 했다.
"진짜 이 개좆같은 연놈들이... 내가 허구한 날 헤실헤실 웃으며 니들 잡일이나 도와주고 있으니까 세상 우습게 보이지?"
스릉!
레이가 검을 뽑아들었다.
거친 감정이 마나를 진동시켜 시푸른 섬광을 발하게 만든다.
레이가 이를 갈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우리 구역이야. 젠트리든 귀족이든... 그 어떤 새끼든 우리 허락 없이는 백작령 안에서 까불어댈 수는 없어. 근데 지미 패밀리에 발을 걸쳤다는 새끼들이..."
레이의 검에서 검기가 폭발적으로 뻗어나왔다.
"내 어머니가 그 꼴이 될 때까지 방치해놔!!!"
카가가가각!!!
레이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나온 검기가 천장을 갈라낸다.
천장 일부가 붕괴되며 위층에 있던 침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바닥을 기던 잡스가 머리 위를 덮치는 침대를 보고 경악했다.
꼼짝 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던 순간.
어느새 나타난 지미가 잡스의 다리를 붙잡아 당겼다.
콰앙!!
침대가 잡스 바로 위에 떨어졌다.
지미가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나가! 팔다리 멀쩡한 놈은 못 움직이는 사람 챙겨서 빨리 꺼져!"
지미의 명령에, 창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레이의 눈치를 급히 살폈다.
괴물에 가까운 레이의 무력을 코앞에서 경험했던 터라 지미의 말만 믿고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허나 다행히도, 레이는 지미가 나타난 직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침묵을 지켰다.
지미의 재촉에 조직원과 매춘부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 안이 텅 비자 레이가 뒤늦게 한숨을 쉬었다.
지미는 백작령과 자작령을 아우르는 '지미 패밀리'의 수장이다.
레이가 그리 만들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지미의 '권위'를 지켜줘야 했다.
남들의 눈앞에서 대놓고 항명할 수는 없었다.
지미가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화는 좀 풀렸냐?"
"글쎄요."
레이는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는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레이의 미간은 여전히 깊게 구겨져 있었다.
지미가 난감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벨라 일은 미안하게 됐어."
"아뇨, 뭐... 알고는 있었어요."
그래, 알고는 있었다.
무식하고 못 배운 놈들일수록 오냐오냐 해주면 사람 쉽게 보고 기어오른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저 개잡놈들이 주제 파악 못 하고 나 우습게 보는 거, 모르진 않았어요."
기강을 잡을 거였으면 진작 주기적으로 자근자근 밟아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이 홍등가에서 만큼은 웬만하면 '벨라의 아들' 역할에 충실했다.
레이는 벨라의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되도록 침범하고 싶지가 않았다.
벨라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아... 어쨌든 오늘 일은..."
마른 세수를 한 레이가 지미를 마주 봤다.
"화풀이도 화풀이고... 엄마도 슬슬 이런 일은 그만두려고 마음을 잡았으니까... 그래서 더 거칠게 반응했어요."
레이는 더는 벨라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보기 싫었다.
만약 벨라가 별일 없이 은퇴했다면.
패밀리의 조직원들이나 창관의 고객들은 길거리에서 벨라를 마주쳤을 때 생각 없이 저급한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을 터다.
은퇴한 매춘부 따위, 정말 만만한 상대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작정하고 손을 썼다.
남들의 기억에 똑바로 각인되도록.
어쭙잖은 새끼들이 벨라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진상한테 쫄아서 여자 방치하는 일도 더는 있어선 안 되잖아요. 패밀리 기강이랑 위계도 바로 잡을 겸 화 좀 냈어요."
"잘했어. 그리고 벨라 일은 정말 미안해."
"엄마 그렇게 만든 놈, 누구인지 알아냈어요?"
"나한테 보고도 늦게 들어온 데다, 그놈들이 창관에서 일을 벌인 당일 아침에 말을 타고 빠르게 백작령을 벗어나서 쫓지 못했어. 네가 원한다면 사람을 풀어서..."
"됐어요. 하지 마세요."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필립스 백작령 내에서라면 상대가 귀족이든 뭐든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백작령 밖이라면 다르다.
범인 찾겠답시고 일 크게 벌여봤자 사건의 당사자인 벨라만 곤란해질 확률이 높았다.
"덮고 넘어갑시다."
"...괜찮겠냐?"
"괜찮아야죠."
레이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벨라가 바라지도 않는 복수 때문에 벨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건 병신 짓이었다.
허나 만약에라도, 이번 사건의 범인이 다시 필립스 백작령을 들린다면.
그때는 반드시 찢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만 나가요. 여기 금방 무너질 것 같은데."
"...그러게. 아예 다시 지어야겠네."
돈 나갈 곳이 또 생겼군.
지미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
라일락의 저녁을 깔끔히 부숴 먹고 하루가 지났다.
레이는 이런저런 볼일을 보다 해가 완전히 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는지라, 늦게 돌아왔다고 잔소리할 사람은 없었다.
덜컥!
레이가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 순간.
검기에 휩싸인 검이 레이의 목덜미에 닿았다.
철컥!
아직 열려 있던 문이 다른 이의 손에 닫혔다.
레이가 집 안을 훑어봤다.
목에 검을 겨눈 불청객을 제외하고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두 명 더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브랜딜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허락받지 않고 들어와서 미안해. 근데... 우리 구면이지? 시그니 산맥에서 봤잖아."
".."
레이는 침묵한 채 브랜딜을 살폈다.
브랜딜의 호흡은 꽤나 거칠어져 있었다.
집안에서 피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상처를 입은 듯했다.
레이의 시선을 느낀 브랜딜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해치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한테 문제가 조금 생겼는데, 잠깐 재정비만 하고 떠날게."
"..."
레이가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검기가 서린 검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엄지와 검지의 피부가 검기와 맞닿아 찢어져 나간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검신에 접촉시켜 마나를 흘려 넣었다.
한 자루의 검에 두 명의 마나가 뒤섞이며 충돌했다.
까앙!!
검의 중앙이 부러져 나갔다.
레이에게 검을 겨눴던 레인저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브랜딜과, 브랜딜 곁에 있던 레인저가 레이를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레이가 부러진 검신을 들어 보이며 퉁명스레 물었다.
"여기서 나랑 싸우려고? 감당 가능해?"
"..."
방금 전 퍼포먼스를 봤을 때 레이는 최소 엑스퍼트였다.
절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가 제삼자에게 들키면 레인저들은 필립스 백작령을 벗어나기 대단히 힘들어졌다.
브랜딜이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산맥에서는 실력을 숨겼었구나."
"실력을 내보일 필요가 없었을 뿐이지."
레이가 주방으로 걸어가 보존 식품 몇 개를 꺼내 브랜딜 앞으로 던졌다.
"이름이 브랜딜이라고 했나? 시그니 산맥에서의 트러블을 원만히 해결해준 빚이 있으니, 선심 좀 써주도록 하지."
"...오, 예상보다 굉장히 호의적인데?"
"재정비하고 한 시간 안에 떠나. 경고하겠는데, 백작령에서 사람 해치면 내가 직접 쫓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새겨두도록 할게."
브랜딜을 비롯한 레인저가 주섬주섬 보존식을 챙기기 시작하자 레이가 말을 덧붙였다.
"그거 공짜는 아니야."
"원하는 거라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꼴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는지 전부 불어."
"흠..."
정보를 내놓으라는 반협박에 브랜딜이 침음을 흘렸다.
"어리다고 얕봤는데 만만치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