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 (1)
89화
사방을 포위한 레인저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젠킨슨이 뒤로 한발 물러서며 턱에 힘을 주었다.
정말 골치가 더럽게 아팠다.
당장 레인저들과 정면으로 맞붙으면 이길 수야 있다.
허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레인저의 원한을 샀다가는 굉장히 곤란해진다.
레인저가 작정하고 시그니 산맥을 넘나들며 필립스 백작령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마물이라도 몰아서 백작령에 있는 마을로 돌진하게 유도하면 피해가 무지막지하게 커질 터다.
레인저라면 테러 행위를 자행할 때 쉽게 증거를 남기지도 않을 거고, 필립스 백작가가 어렵사리 증거를 모아 황실에 탄원한다 해도 황제가 제대로 관심을 가져줄까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젠킨슨은 지금 상황을 최대한 무력 충돌 없이 끝내고 싶었다.
일단 전투가 발생하면 이겨도 무조건 손해였다.
레이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괜히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레인저들에게 잡혀 왔었다.
허나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름만 레인저지 다들 양아치구만.'
정예병을 모은 특수부대라 하면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으나, 현실은 아니었다.
'하긴 전생에서도 최강의 특수부대란 놈들이 카누잉 같은 시체 능욕은 기본에 온갖 전쟁 범죄엔 다 엮여 있었으니...'
지구만 해도 그 꼴인데 이쪽 세계라고 다를 리가 없다.
눈 내린 산맥에서 활동하며 스트레스를 쌓아 가던 레인저들은 이번 기회에 여러 갈증을 풀어낼 생각인 것 같았다.
레이는 무던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충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일단 맞붙으면 무조건 전멸시켜야 했다.
'기사 둘에 루나까지 있으면 애들은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포박을 찢고 일어나 옆에 놈 칼부터 뺏어볼까.
그리 결론 내리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혀를 차는 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에헤잇, 분위기가 왜 이래?"
브랜딜이 어둠 속에서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걸어나왔다.
적막한 산속에서 박수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좋게 좋게 가자고, 좋게 좋게. 이러나 저러나 이웃 사이잖아."
넉살 좋게 입을 놀리던 브랜딜이 젠킨슨을 보고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오우...! 아는 얼굴이군. 이름이... 젠킨슨이라 했었나?"
"오랜만이오, 브랜딜."
"아, 정말로 오랜만이지."
브랜딜이 손을 내밀었다.
젠킨슨이 쓰게 웃으며 브랜딜의 손을 맞잡았다.
젠킨슨은 서임을 받고 얼마 안 되어 시그니 산맥에 훈련을 나갔다가 브랜딜과 만났었다.
기 싸움을 하다 이름을 교환하고 헤어진 기억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둘 다 신참이었는데, 이제는 완숙한 기사와 레인저였다.
브랜딜이 젠킨슨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애들 훈련 때문에 왔다고?"
"그렇소."
"이동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데. 그 실력에 뭘 가르치겠다고?"
"끄응."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냈다.
브랜딜이 기운 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젠킨슨, 자세한 건 말 못 해주지만, 요즘 우리가 좀 분위기가 안 좋아. 민감하다고."
"알겠소, 알겠다고. 주의하겠소."
"그래. 한동안은 신경 좀 써줘. 괜히 부딪치면 피곤하잖아? 그냥 이쪽에 얼씬거리지 마."
"충고 고맙소."
"오늘 일도 남한테 떠벌리고 다니지는 말고."
"브랜딜."
젠킨슨이 어깨동무를 풀고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확언하지. 우리는 레인저와 마찰을 빚을 생각이 전혀 없어. 황도는 멀고, 시그니 산맥은 코앞이거든."
썩 솔직한 답변에 브랜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럼 이쯤에서 끝내지. 그쪽은 가던 길 가고, 우리도 돌아가자고."
터덜터덜 물러나는 브랜딜을 향해 다른 레인저가 하나 다가왔다.
"중대장님, 재고해주십시오. 지금 저들을 그냥 보내는 건..."
"이봐, 괜히 일 키우지 말자고. 산을 하나 박살 낸 고위 마법사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
브랜딜의 확고한 주장에 레인저가 입을 다물었다.
브랜딜이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자자, 이만 제국령을 벗어난다. 거기 묶여 있는 친구는 좀 풀어주고."
레인저들이 암흑 속으로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풀려난 레이가 기지개를 피고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돈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젠킨슨이 레이의 몰골을 보고 피식 댔다.
"천벌 받았구나."
"마스터, 첫 마디가 그거예요? 종자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입 놀리는 거 보니 멀쩡한 거 같구나."
"아이고, 검 남는 거나 한 자루 주세요."
젠킨슨이 예비용 검을 한 자루 던져주었다.
레이는 허리춤에 검집을 묶고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카렌이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흔들려다가, 곧장 정색했다.
카렌은 다급하게 자기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얼굴엔 시커먼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몸을 씻지 못한지는 며칠이 지났다.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니... 왜?"
"그, 어, 어쨌든 가까이 오지 마!"
레이가 피식거렸다.
저리 기겁하니 괜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룬데? 가까이 갈 건데?"
"오지 말라고오-!"
카렌이 레이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레이가 혀를 차는 시늉을 하며 카렌을 설득했다.
"카렌, 며칠 못 씻어서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오지 말라고 했잖아아!!"
퍽!!
결국 돌맹이가 날아왔다.
카렌이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손에 잡히는 대로 돌맹이를 던져 댔다.
레이가 가드를 올린 채 소리쳤다.
"알겠어! 알았다고! 안 붙을 테니까 돌 좀 그만 던져!"
그 광경을 보며 요하나는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레이가 더 다가왔다면, 그도 모자라 머리카락이라도 만지려고 했다면 진짜로 검을 휘둘렀을지도 몰랐다.
결국 레이는 아이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시그니 산맥을 이동했다.
열심히 행군한 결과 다음날 오전쯤에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계획보다 조금 짧아지긴 했지만, 어쨌든 힘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성취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군장을 정비하고 목욕을 마친 후 보육원으로 귀환하면 됐다.
레이는 신나서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과일장수 잭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 드디어 돌아왔구나!"
"...잭, 무슨 일 있었어요?"
"바로 교회에 가봐야 할 것 같다."
"...?"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잭이 그제 있었던 사건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레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잘 발달한 도시의 경우 치료소가 별개로 존재했지만.
크기가 작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선 신성 교단의 교회가 치료소의 역할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립스 백작령의 교단 또한 교회 내부에 침상을 갖춰 치료소의 역할을 겸임하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지금, 레이가 교회에 마련된 환자용 침상 옆에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꼴을 보고 벨라가 깔깔 웃었다.
"우리 아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엄마..."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장소가 교회인데다 혹시나 환자에게 감염의 위험이 있을까봐 다급하게 씻고 온 탓에 차림새는 깨끗했다.
허나 레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구겨져 있었다.
"엄마는 지금 웃음이 나와?"
벨라의 얼굴엔 피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길게 뻗은 아름다웠던 목에는 강하게 졸린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말이다.
팔 다리에 묶여 있는 붕대는 덤이었다.
"아오... 돌아버리겠네."
"왜 그리 심각하니? 일하다 보면 진상도 좀 만날 수 있는 거지. 어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유난 떨지 마."
"..."
레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춘업을 하다 보면 진상 만날 확률이 높긴 했다.
손님 중 태반이 술 한 잔 걸친 상태이다 보니 특히 그랬다.
주먹 한두 대 얻어맞는 경우야 충분히 있었다.
허나 레이가 본 벨라의 상처들은, 손찌검 한두 번이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러게 빨리 은퇴 좀 하시라니까."
"원래 일 그만둘 때쯤 되면 사고도 한 번씩 터지고 하는 거야. 나쁜 운을 훨훨 털고 새로 시작하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게 더 불안했을걸?"
벨라는 액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가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손을 휘저었다.
"됐고... 완전히 나으실 때까지 휴식이나 충분히 취하세요."
"여기 계속 있으려면 헌금을 많이 내야 하지 않니?"
"엄마, 제발 돈 걱정 좀 하지 마. 돈 같은 거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으니까."
레이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벨라가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아들. 한 2~3주 머물렀다 돌아갈게. 엄마 심심하니까 간간이 찾아오렴."
"매일 들를 테니 걱정하지 마."
"엄마 집에 없어도 밥 잘 챙겨 먹어야 돼?"
"걱정 마셔."
레이가 세상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 번 더 벨라의 목덜미를 살폈다.
목울대를 움푹 파고든 검붉은 멍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만 가 볼게. 잘 쉬고 있어."
인사를 건넨 레이가 교회 밖으로 나왔다.
지미 패밀리의 간부, 아르노가 교회에서부터 레이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운이 나빴어."
아르노는 사건이 벌어진 당시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부 전해 들었다.
이번 일은 정말 운이 나빠서 발생한 사고였다.
갑자기 귀족 나으리처럼 보이는 작자들이 창관에 들러 문제를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 벨라에게 폭력을 행사한 놈이 사실 귀족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귀족이라 판단한 것도 벨라였고 그들을 접대하겠다고 나선 것도 벨라였으니, 결국 벨라가 책임질 일이었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지. 어디 못 쓸 정도로 크게 상한 건 아니잖아. 벨라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야. 하하."
아르노는 나름 위로한답시고 그딴 말을 지껄이며 짧게 웃었다.
직후 시야가 점멸했다.
"...?"
감각이 엉망이었다.
아르노는 한참을 꿈틀거리다 자기가 땅에 엎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신음 소리가 입술을 빠져나온다.
"끄, 끄윽...?"
혀에서 비린 맛이 느껴진다.
왼쪽 뺨 전체가 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근육이 놀란 탓인지 목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노는 그제야 자신이 따귀를 얻어맞았다는 걸 알아챘다.
레이가 쓰러진 아르노의 목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크억! 컥!"
"지금 웃음이 나오지?"
낮게 깔리다 못해 금속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아르노의 귓가를 울렸다.
호흡이 막힌 아르노가 레이의 다리를 붙잡고 바둥거렸다.
이대로 목을 분질러 버릴까.
레이는 그런 충동을 뒤로 미루며 아르노의 턱을 붙잡았다.
"어디 한번 계속 쳐웃어봐."
뚜둑!
레이의 엄지에 걸린 아르노의 이빨이 하나 부러진다.
아르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저항하려다, 레이의 메마른 눈동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레이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진짜로 죽을 수 있다는 걸.
레이는 아르노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너희들은 귀족은 무섭고 나는 만만하지?"
"크억.... 큭...!"
"잘 들어. 두 시간 줄 테니..."
공허한 레이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물든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마나의 기류가 땅을 헤집어 대기 시작했다.
차디찬 바람이 살을 에워싼다.
"그날 라일락의 저녁에서 근무했던 연놈들 전부 집합시켜."
"크으... 크억...!"
아르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늦지 마. 오래 안 기다릴 거야."
한놈이라도 미적거리거나 내빼면, 턱을 모조리 뽑아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