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4)
88화
"아그그그그극..."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암석 줄기를 피해 옆으로 기었다.
공간검을 활용해 열선을 옆으로 안 비켜 냈으면 정말로 죽을 뻔했다.
"무슨 위력이 이러냐..."
시그니 산맥이 마나가 넘쳐 흐르는 장소라 마법의 위력이 한 층 더 강화되긴 했겠지만.
그를 감안해도 도저히 2서클이 내보일 만한 화력은 아니었다.
"갑주 좀 맞춰야겠다..."
이런 광범위 열에너지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는 건 정말 비효율적인 짓거리였다.
레이는 반쯤 녹아내린 검을 던져 버리고 땅을 기어가 아직 녹지 않은 눈에 몸을 파묻었다.
레이 주변에서 연기가 풀풀 올라온다.
입에 한 움큼 눈을 베어 문 레이가,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움직임을 멈췄다.
들끓었던 몸의 체온이 내려가며 정신이 알딸딸해졌다.
"으어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슬슬 일어나보려고 팔다리를 움찔거리는데 생소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저건 뭐야? 사람인가?"
"사람 맞습니다아...!"
레이가 손을 위로 들어 흔들었다.
짐은 홀랑 증발했고 옷도 반쯤 탔다.
이대로도 귀환은 가능하겠지만, 육포나 목포라도 한두 개 얻어가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레이가 희망찬 상상에 빠진 사이.
가죽 갑옷을 입은 레인저가 성큼성큼 걸어와 레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제국민이냐?"
"네네, 제국민 맞습니다."
레이는 상대가 레인저인 것을 알아보고 최대한 해맑게 웃었다.
레인저가 레이의 몰골을 찬찬히 살피더니 뒤로 던져 버렸다.
"포박해."
다른 레인저들이 달려들어 레이의 손발을 묶기 시작했다.
레이가 당황해서 바둥거렸다.
"여, 여기 제국령 아닙니까?! 제국민에게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레이의 항변과 관계없이 레인저들을 금세 레이를 손가락도 함부로 못 움직이도록 묶어버렸다.
눈알을 굴리는 레이의 목에 단검이 겨누어진다.
심문의 시간이었다.
*
루나는 마법을 발현한 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서 휘청였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강력한 마법을 발현한 탓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젠킨슨이 얼른 루나를 붙잡았다.
디디에가 다가와 젠킨슨에게 속삭였다.
"젠킨슨 경, 훈련은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루나가 펼친 마법의 규모가 예상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레인저를 비롯해 시그니 산맥에 머물고 있는 존재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아이들까지 데려온 상황에서 훈련을 조금 더 하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복귀로 가닥을 잡는 사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맞은편 산을 내려봤다.
"산이 녹았어..."
"마법 엄청 대단해요!"
"마법사들은 다 이런 마법 막 쏠 수 있는 거예요?"
해맑은 물음에 젠킨슨이 자기 이마를 붙잡았다.
"모든 마법사가 루나처럼 대단했으면 진작 세상이 두 쪽 났을 거다."
고개를 저은 젠킨슨이 디디에와 함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그만 복귀한다."
아이들이 작게 환호했다.
집 나와서 개고생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젠킨슨은 탈진한 루나를 업어 들었다.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복귀까지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다.
디디에가 앞에 서고 젠킨슨이 뒤를 경계하며 헥헥 대는 아이들을 이끌고 산맥을 타고 움직였다.
나름대로 빨리 움직인다고 움직였고, 이동 흔적을 지우려고도 노력했다.
허나 상대가 나빴다.
레인저들은 기사와 아이들의 흔적을 쉽사리 발견하고 추격했다.
다음 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경계 근무를 서던 디디에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아이들 곁에서 쪽잠을 자던 젠킨슨 또한 빠르게 눈을 떴다.
사박!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디디에가 낭패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사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기척을 은폐할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디디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시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을 울리자 아이들도 하나둘 잠이 깼다.
레인저들이 암흑 속에서 걸어 나왔다.
디디에와 젠킨슨이 곧장 검기를 발현했다.
푸르게 빛나는 섬광이 어둠을 잠깐 몰아낸다.
"이곳은 제국령이오. 그대들의 임무는 알고 있으나, 그리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면 이쪽도 곤란하오."
"..."
레인저들이 침묵 속에서 거리를 더 좁혔다.
젠킨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느껴지는 레인저들의 숫자만 열을 넘었다.
레인저가 기사에 비해 평균적인 무력은 좀 떨어진다지만 여긴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기사 하나가 레인저 둘을 맡기도 벅찼다.
'레인저가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다고?'
레인저의 분대는 통상 3~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정도면 한 소대 이상이 투입되었다는 건데, 거기다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루나의 마법 때문인가? 그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인데?'
츠즈즈즉!
레인저 측에서도 몇 명이 검기를 발현한다.
계속되어 악화되는 분위기에 요하나를 시작으로 아이들도 긴장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삼켰다.
충돌을 최대한 피해야 했지만, 만약 충돌한다면 '그놈'이 무조건 필요했다.
'이놈은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으려는 거야?'
"마스터!"
마침 종자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레이라면 치를 떨던 젠킨슨이지만, 이번만은 반갑게 화답했다.
"레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을 돌렸다.
포박 당한 레이가 밧줄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
너무나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얼을 탄 젠킨슨이 뒷목을 잡았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냐?"
"붙잡혀서 끌려온 건데요?"
"..."
젠킨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레이의 몰골을 살피니 반 쯤 태워 먹은 옷부터 산발이 된 머리까지 아주 엉망이었다.
"레인저에게 당한 거냐?"
"아뇨,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서."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머리를 굴려본 젠킨슨이 이내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챘다.
마법.
루나의 마법에 뒤따라오던 레이가 당한 거다.
"으끄끄끅..."
젠킨슨이 숨 넘어가는 소리로 낄낄대기 시작했다.
심히 꼴 받게 하는 젠킨슨의 웃음소리에 레이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런 씨...!"
신경질을 내려는 레이의 등을 레인저 중 하나가 곧장 걷어찼다.
퍼억!
"으윽!"
"닥쳐라. 사담이나 나누라고 데려온 게 아니다."
"끄으응...?"
아픈 흉내를 내던 레이가 긴장을 바짝 끌어올렸다.
강대한 존재가 현현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
레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차디 찬 얼굴로 손아귀를 말아 쥔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정령 꺼내지 마...!'
레이에 이어 디디에도 거세진 바람을 확인하고 다급히 루나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은 안 된다...!"
"..."
디디에의 속삭임에 루나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거세졌던 겨울 바람이 다시 가라앉는다.
레이와 디디에가 동시에 힘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한편 젠킨슨은, 검을 지면에 내려놓고 레인저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시푸른 칼날이 목 가까이 다가왔지만 젠킨슨은 크게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레인저들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잖소? 대체 왜 이러시오?"
"시그니 산맥에는 무슨 볼일이지?"
뒤에 서 있던 레인저 중 하나가 물었다.
젠킨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들에게 생존 훈련을 시키기 위해 좀 깊게 들어왔소. 보면 알 수 있잖소?"
젠킨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한눈에 봐도 다들 쪼끄만한 애들이었다.
레인저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마법사는 어디 있지? 대규모 마법을 펼친 이유가 뭐야?"
"아, 그거 말인데..."
젠킨슨이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레인저들은 이미 레이의 심문을 끝냈을 터다.
젠킨슨도 눈치껏 입을 맞추어야 했다.
"...이번에 백작님께서 새로 고용한 마법사가 실험해볼 마법이 있다고 우리와 동행했소."
"..."
"근데 실험을 마치고 혼자 휙 떠나버려서 말일세. 우리도 괜히 그쪽 눈치가 보여 백작령으로 복귀하고 있었소."
"거짓말 마라. 너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마법의 흔적을 보았다면 그분이 보통 마법사가 아님은 눈치챘을 텐데. 레인저의 추적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만능은 아니잖소?"
우회해서 말했지만 결국 레인저들이 마법사의 흔적을 놓쳤다는 소리였다.
질문을 해왔던 레인저가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마법사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군."
왜 굳이 혹을 달고 시그니 산맥을 올라 마법 하나를 갈기고 홀로 귀환했단 말인가?
젠킨슨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마법사들이 괴짜 짓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소?"
"..."
젠킨슨의 말은 정론이라면 정론이었다.
만약 마법사가 어떤 수작을 벌이려고 했다고 해도, 기사들과 아이들에게 정보를 공유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레이의 증언과 젠킨슨의 증언이 대략 일치하기도 했기에 딱히 더 따지고 들 내용이 없었다.
젠킨슨이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물었다.
"이제 보내주시면 안 되겠소?"
"..."
레인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보내준다? 큰 문제는 안 될 터다.
레인저들의 반응이 좀 과민했다고 떠들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허나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레인저들은 뒷처리의 프로였다.
또한 오랜 산악 생활 탓에 그 성정과 손속이 거칠어진 자들이 다수였다.
어떤 레인저의 시선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요하나의 검을 향했고, 어떤 레인저의 시선은 덜 여물었으나 생생한 소녀의 여체를 훑었다.
입을 삐죽인 레이가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마스터, 제거할까요?"
"넌 좀 닥치고 있어 봐."
젠킨슨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레인저와 무력 충돌은 이기든 지든 정말 달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
정돈되지 않은 흙바닥을 말 두 필이 거칠게 질주했다.
말들은 덩치가 좋고 갈기에는 윤기가 가시지 않았으나, 혹사 탓인지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바들댔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낡은 갑옷을 대충 덧대 입은 남자가 말했다.
차림새만 보면 소일거리를 받아 살아가는 사냥꾼이나 용병처럼 보였다.
낡은 갑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쏘아붙였다.
"휴식? 대체 어디서?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곧 산맥을 넘어가야 합니다. 체력을 비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관보다는 창관이 나을 듯합니다. 추적을 조금 늦춰줄 겁니다. 다만..."
낡은 갑옷의 남자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의심을 덜기 위해선 여자를 품은 게 좋으실 겁니다."
"..."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낡은 갑옷의 남자는 외면했다.
얼마 안 가 둘은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했다.
낡은 갑옷의 남자는 주민들에게 물어 가장 인기 좋은 창관을 찾아갔다.
남들 눈에 그 둘은 여자에 굶은 실력 좋은 용병처럼 보였다.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가 그럴 듯한 간판이 걸린 창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라일락의 저녁은 표면상으로는 식당인지라 여자를 사기 위한 손님 몇 명이 1층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미 패밀리에 속한 잡스가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를 보고 눈을 빛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물 빼러 왔나?
뭐 그런 가벼운 인사를 건네려던 차.
뒤에 서 있던 벨라가 잡스의 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서 원을 두 번 그렸다.
조심해야 할 상대라는 신호였다.
눈썰미가 좋고, 세간에 고급품으로 취급되는 옷감을 접할 기회가 잦았었던 벨라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의 낡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내의의 옷감이 대단한 고급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악취미를 지닌 귀족 나리가 창관을 들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연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잡스는 눈치껏 필요 없는 이야기를 배제하고 딱딱하게 상대를 응대했다.
라일락의 저녁 건물에 붙어있는 작은 마구간이 말 두 마리로 꽉 찼다.
사내와 남자는 말 없이 가벼운 식사를 마쳤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에게 잡스가 물었다.
"마음에 드시는 여인이 있으신지...?"
"알아서 올려보네."
"알겠습니다."
손님이 사라진 후 여자들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가 멀리 마실 나온 귀족이라도 된다면 팁을 좀 더 받을 순 있겠지만,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제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라일락의 저녁은 필립스 백작령에선 가장 유명하다고 하나, 결국 평민들이 이용하는 창관이다.
귀족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다면, 못 볼 꼴을 볼 확률이 꽤 높았다.
벨라가 한숨을 쉰 후 먼저 나섰다.
"왼쪽 방의 분은 내가 모실게."
"어... 잘 부탁해."
잡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가 치장을 단정히 한 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내가 들어간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달칵!
벨라가 고개를 낮춘 채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침대와 함께 목욕을 위한 통에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목욕을 도와드릴...?"
쫘악!!
벨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손에 든 바구니가 엎어지며 접대를 위해 준비해왔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뺨이 화끈거렸다.
벨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내가 머리채를 잡아 침대 위에 던졌다.
"아윽!"
"이 빌어먹을 천한 것이...!"
사내가 벨라 위에 올라탔다.
억쎈 손길이 벨라의 목을 조른다.
컥컥 대는 벨라를 향해 사내가 이를 갈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내가 누구인지 아느냔 말이다...! 어딜 감히...!"
사내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만스러운 듯 흉포한 감정을 토해내면서도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었다.
벨라는 계속 컥컥대면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붉게 빛나는 눈빛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는 모습이 비쳤다.
길고 힘겨운 밤이 될 것이다.
벨라는 각오를 다진 후 두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