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3)
87화
루비하 왕국에서 제국으로 통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짧은 경로는 시그니 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마물들이 잔뜩 살아가는 험지를 가로지르는 건 대단히 힘겨운 일이다.
때문에 루비하와 제국의 교역은 대부분 동쪽으로 크게 도는 육로, 혹은 서쪽으로 도는 항로를 사용하곤 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의 경우 영지 끝자락에 존재하는 항구 덕분에 교역을 중개하며 꽤 짭짤한 이익을 남기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상단은 시그니 산맥을 가로지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해도 호위에 들어가는 병력을 생각하면 정말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짓거리였다.
대규모 군사 활동 또한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루비하 왕국은 엑스퍼트 급이나, 그에 근접한 무력을 지닌 이들로 레인저 부대를 편성했다.
레인저란 단어는 본래 국경 지역을 순찰하며 위험을 조기에 보고하는 병사들을 가리키곤 했지만.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는 제국과의 갈등 상황에 대비한 침투 부대 성격이 강했다.
만약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레인저들은 곧장 산맥을 넘어 남하해 교란 작전을 펼쳐 제국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제국도 이를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 레인저들이 남하해봤자 추가 보급도 없는 상태에선 활동 범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게 제국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고립되어 전멸할 게 뻔했다.
제국이야 변방 땅덩어리를 조금 포기하고 동쪽 육로로 대규모 병력을 진군시키면 됐다.
정 레인저가 껄끄럽다면 시그니 산맥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틀어막는 것도 가능은 했다만.
그건 정말 비효율적인 짓거리였다.
때문에 제국에게 있어, 루비하 왕국이 레인저를 육성하는 것은 귀여운 앙탈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필립스 백작령과 가디 자작령이 국경과 인접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가치 없는 변방으로 취급되며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는 이유였다.
"오해는 하지 마라. 레인저가 제국민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유 없이 제국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젠킨슨이 예전에 한 번 했던 설명을 반복하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동계 훈련을 위해 시그니 산맥에 오른 지도 사흘이 지났다.
루나, 요하나, 카렌, 데런, 이안 등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는 보육원 아이들 열 명이 이번 동계 훈련에 참가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아이들의 인솔을 맡았다.
아이들은 사람 냄새를 가리기 위해 얼굴에 진흙을 펴 바른 채 방금 파낸 구덩이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카렌은 추위를 덜 느끼기 위해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레인저들은 강해요?"
카렌의 물음에 젠킨슨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험지에서의 작전 수행 능력은 기사들보다 뛰어난 편이지."
열약한 환경 아래 보급 없이 오랜 기간 생존하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사냥, 추적, 위장, 냄새 지우기, 방향 잡기, 숙식 해결, 등등.
레인저는 이러한 분야에 있어 평범한 기사들을 많이 앞서 있었다.
"레인저가 아니라 기사라 해도... 최적의 상황에서 싸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급이 끊기거나 부대와 낙오되는 상황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 그런 때를 대비하여 지금과 같은 훈련을 진행하는 거다."
젠킨슨은 아이들 앞에서 무게를 잡으면서도 내심 부끄러움을 삼켰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그 역할이 영지 방어에 치중된 탓에 험지에서의 생존 훈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 와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생존 훈련을 시키려다 보니 도리어 기사들이 헤매고는 했다.
결국 지미나 매튜 같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용병 출신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레이 그놈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맨날 떠들어 대니...'
어린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울 때도 있었지만, 일단은 정론이었다.
"힘들다 불평하지 말고, 오늘 경험을 잘 기억해 두어라."
카렌이 시커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것도 힘든 거였고, 몸을 제대로 닦지 못한 지 사흘이 지났다.
용변 같은 것도 마음대로 못 보고 매번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써야 했고 말이다.
한 이틀 정도는 찝찝해 죽을 것 같았지만, 사흘쯤 되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레인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운이 좀 나쁘다면."
"...정말요? 여긴 제국령이잖아요?"
"레인저가 국경을 넘어 정찰이나 사냥을 나오는 경우도 간간이 있다. 나도 과거에 두 번 마주쳤지. 걱정할 건 없다. 기 싸움 잠깐 하고 손 흔들고 헤어지면 된다."
어차피 마물의 땅인 시그니 산맥이다.
국경을 조금 넘어왔다고 칼부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조금 사이 나쁜 이웃이라 생각해라."
그리 말하며 젠킨슨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아이들 중 체격과 체력이 가장 떨어지는 루나가 반쯤 넋이 나간 채 숨을 헥헥 몰아쉬었다.
카렌이 루나의 짐까지 대신 들어주며 루나를 일으켰다.
"루나, 힘내자!"
"...응."
평소에도 몸을 거의 안 움직이는 루나였다.
지금과 같은 강행군은 역시나 감당하기 힘들었다.
젠킨슨이 가볍게 핀잔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기초적인 체력은 길러야 한다."
"...네."
비실대는 루나를 카렌이 밀어주며 나아가길 잠시.
앞서 걷던 디디에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걸 한 번 살펴 보거라."
쓰러진 나무들, 거대한 발자국, 그리고 무언가가 눈 위에 길게 끌린 자국.
"롱테일이 지나간 흔적일 거다."
롱테일은 도마뱀의 머리, 거대한 상체와 짧은 뒷다리, 그리고 길고 두꺼운 꼬리를 지닌 마물이다.
롱테일의 특징이라면 느림, 단단함, 괴력을 뽑을 수 있다.
직접 사냥을 하기보단 다른 마물의 사냥감을 뺏어 먹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추적해봐라."
"..."
아이들은 긴장을 끌어올린 채 주변을 경계하며 롱테일의 흔적을 추적해갔다.
롱테일이 워낙 거체인데다 흔적이 가까운 곳으로 이어져 있어 아이들은 금방 롱테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롱테일을 찾아낸 아이들이 허리를 숙이고 숨소리를 낮게 가다듬었다.
아이들이 있는 곳보다 조금 낮은 지대에서 롱테일은 다른 마물이 사냥한 듯한 동물을 뜯어먹고 있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롱테일은 단단하고 느렸기에, 루나의 화력을 시험해보기도 좋은 상대였고 돌발 상황에서 기사들이 대처하기도 쉬웠다.
"루나,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해봐라."
"...준비하는데 30분 정도 걸려요."
"알겠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퍽 흥미로운 시선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롱테일 또한 다른 마물과 같이 마나에 관한 감각이 굉장히 예민하다.
과연 루나가 마법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롱테일을 상대로 얼마나 오랫동안 마나의 흐름을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그 또한 이번 테스트에서 확인해 볼 사안이었다.
우웅-!
방대한 마나가 루나로부터 발산됐다가 곧장 서클로 회수됐다.
빛을 발하는 서클이, 가시광선을 왜곡하는 결계에 갇혀 존재를 숨긴다.
차르르륵!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마나가 휘몰아친다.
루나는 로필렌에게서, 서클을 은폐하고 마나의 기류를 안쪽으로 끌어모으는 방법을 가장 먼저 집중적으로 배웠다.
그 성과가 지금 드러난다.
루나가 만들어낸 결계 안은 태풍과 같았지만, 그 외부는 고요함을 유지했다.
두 개로 분열된 서클 위에 수십 개의 룬어가 겹쳐 적혔다가 지워지길 반복한다.
모두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루나가 무슨 마법을 발현하려는 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위력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중요한 건 루나가 현재의 은폐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다.
마법이 완성되어 갈수록 마나의 집합체가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마침내, 롱테일이 반응한다.
"카악?"
"15분. 나쁘지 않군."
손가락을 까닥이며 시간을 재던 젠킨슨이 흡족해했다.
마법을 절반 이상 완성하고 나서야 마물이 반응했다.
어지간히 재능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마법의 발현을 시도하자마자 마물에게 들켰을 터다.
"자, 마법사를 보호해라."
젠킨슨의 명령에 아이들이 비장한 얼굴로 검과 방패를 들었다.
위협적인 마나의 기류를 감지한 롱테일이 쿵쿵 지면을 내딛으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속도는 느렸지만 그 거대한 덩치 탓에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카렌이 먼저 첫발을 내디뎠다.
"가자!!"
"..."
아이들이 카렌을 따라 이를 악 문 채 대형을 갖췄다.
아이들의 목적은 루나가 마법을 완성할 때까지 롱테일의 시선을 끄는 것.
헌데 체급이 말도 안 되게 차이 나는 마물 앞에 직접 서니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 찰나 롱테일이 몸을 빙글 돌렸다.
쫘아아아아악!!!
바람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두꺼운 꼬리가 휘둘러졌다.
데런이 무심코 방패를 들어 올리자 카렌이 칼자루로 데런의 방패를 찍어 눌렀다.
"막지 말고 피해!!"
콰앙!!!
롱테일의 꼬리가 마른 나무 몇 개를 부수고 지나갔다.
몸을 던져 간신히 공격 반경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방패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허나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사들은 이를 알기에 아이들을 롱테일과 맞붙게 했다.
롱테일의 공격을 몇 번 피하다 보면 거대한 마물과의 전투가 빠르게 익숙해질 터다.
팔에 들린 방패는 혹시나 즉사하지 말라고 쥐여준 거였다.
"일단 회피에 집중하며 주의를 끌어!!"
카렌은 꽤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이끌었다.
요하나는 물론이고 데런이나 이안보다도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카렌이었지만 평소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은 성과가 지금 발휘됐다.
콰앙!! 콰앙!!
롱테일은 주위에서 알짱거리는 아이들을 노리고 계속해서 꼬리를 휘둘렀다.
허나 유의미한 피해는 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보다도 빠르게 롱테일의 공격에 익숙해졌다.
롱테일은 확실히 인간을 한참 뛰어넘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느렸다.
적응이 되니 슬슬 까부는 애들이 생겼다.
몇 번이나 여유롭게 롱테일의 공격을 피한 이안이, 롱테일의 두껍고 단단한 각질에 검을 휘둘렀다.
캉!!
씨알도 안 먹혔다.
그래도 상대를 농락하는 듯한 재미가 있어, 이안은 웃음꽃을 피우며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허나 이안은 신중하지 못했다.
아직 시그니 산맥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 아래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는 밟기 전까지 모르는 법이다.
뚜둑!!
"어...?!"
지면을 내디뎠다.
그리 생각했는데, 눈을 파고든 발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균형을 잃은 이안이 휘청이는 사이 롱테일이 날카로운 각질이 삐죽삐죽 박혀 있는 앞발을 철퇴처럼 휘둘렀다.
이안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찰나 카렌이 이안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당겼다.
콰앙!!
"우앗!!"
"우악!!"
롱테일의 앞발이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내리친다.
간신이 살아난 이안이 헉헉 대면서 검과 방패를 다시 주워들었다.
카렌은 아직 밟지 않은 땅을 밟을 때 무게중심을 함부로 옮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야를 넓혀 아이들을 살폈다.
누구보다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카렌을 보고 디디에와 젠킨슨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 순간 롱테일이 꼬리를 지면에 강하게 때려박으며 루나가 서 있는 방향을 직시했다.
불길한 마나의 기류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깔짝대는 날파리를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쿵! 쿵! 쿵!
롱테일이 덩치를 믿고 전진하기 시작한다.
아이들 중에 롱테일의 돌진을 제지할 수 있는 실력자는 없었다. 요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흡!"
요하나가 숨을 들이쉰 후 지면을 가볍게 박찼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요하나를 향해 롱테일이 앞발을 내려찍었다.
요하나가 살짝 몸을 뒤로 뺀다. 거칠게 뻗어나온 각질 조각이 요하나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쿠웅!!
땅이 울린다.
땅의 울림조차 반동 삼아 몸을 띄우는데 보탠 요하나가 롱테일의 등허리에 올라탔다.
롱테일은 머리 위에서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요하나가 롱테일의 머리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뛰어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검신에 맺힌다.
촤악!!
"카아아아악!!
검기를 향해 대가리를 들이댄 꼴이 된 롱테일이 비명을 내질렀다.
상처가 깊진 않았으나, 6개의 눈 중 하나를 잃었다.
롱테일의 주의가 요하나에게 옮겨간다.
요하나가 시간을 끄는 사이, 루나의 마법이 완성됐다.
"...이제, 쓸 수 있어요."
"모두 물러나라!!"
젠킨슨의 호통에 아이들이 우르르 루나의 뒤로 뛰어갔다.
롱테일이 쿵쿵 거리며 쫓아왔지만 여전히 그 속도가 느렸다.
아이들이 전부 물러나자마자 젠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실력 좀 보자."
까각!
마나의 기류를 은폐하던 모든 결계가 벗겨졌다.
그 찰나 강력한 열풍이 주변으로 터져나왔다.
루나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젠킨슨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눈밭을 굴렀다.
쿠당탕!!
"?!"
젠킨슨은 자세를 바로 할 생각도 못 한 채 눈을 부릅떴다.
루나를 둘러 싼 반경 3 m의 서클이 룬어로 가득 채워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방을 잠식하던 모든 열에너지가 한 점으로 집약된다.
루나 발밑에 쌓여 있던 새하얀 눈이 삽시간에 증발했다.
점으로부터 시작한 붉은 섬광이 마나를 잡아먹으며 크기를 불린다.
젠킨슨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드 레이(Red Ray)...?"
그럴 리가.
레드 레이는 4서클 혼합 마법이다.
2서클 마법사가 고작 30분 투자해서 발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란 말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4서클 마법이라 해도 저따위로 거대한 열에너지를 구체 형태로 압축시켜 머금지는 못했다.
루나가 뒷걸음질 치는 롱테일을 향해 마법을 겨누었다.
찰나 간 주변에 몰아치던 바람이 멎는다.
직후.
롱테일을 향해 직경만 3 m에 이르는 초고열의 열선이 방사됐다.
쫘아아아아아아아악!!!!!!!!!
롱테일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초고열의 열선에 닿는 순간 형체가 뭉개지며 허공으로 증발했다.
롱테일을 소멸시킨 붉은 빛줄기가 맞은편 산의 산기슭에 닿는다.
루나는 생전 처음 손에 쥔 막대한 에너지를 끝까지 제어하지 못하고 팔을 하늘로 치켜 들었다.
붉은 빛줄기가 산을 타고 오르다 하늘로 치솟는다.
화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열풍이 재차 주변을 강타했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아이들을 몸으로 덮은 채 마나의 흐름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수십 초가 지나서야 바람이 잔잔해졌다.
젠킨슨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 루나의 곁에 섰다.
레드 레이.
4서클 마법이 만들어낸 초고열의 열선은 직경만 3 m에 이르렀고, 실제로는 직경 10 m 안의 모든 물체를 불태웠다.
맞은편의 산이 보인다.
맞은편 산에는 방금까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맞은편 산의 정상에서부터 산기슭까지 일직선으로, 용암처럼 변한 암석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의 좌우에는 여전히 눈이 가득 쌓여 있어, 그 풍경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졌다.
언뜻 보았을 때는 흡사 산이 좌우로 갈라진 것만 같았다.
젠킨슨은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레이 그 개자식이..."
레이가 루나의 마법 좀 맞아달라고 했을 때 허락했다간 황천길을 건널 뻔했다.
젠킨슨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천벌 받을 놈..."
*
레이는 꽤 떨어진 거리에서 훈련을 받는 아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훈련에 동행해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카렌이나 요하나가 하루종일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댈 게 뻔했다.
유사시 신호탄을 터뜨렸을 때 달려갈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던 레이가 문뜩 고개를 들었다.
꽤 강력한 마나의 기류가 느껴졌다.
'루나가 마법 쓰려나 보네.'
레이는 마나의 기류가 휘몰아치는 곳으로 안력을 집중했다.
여전히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전투의 소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물이랑 싸우나?'
덩치를 보니 롱테일처럼 보였다.
레이는 육포를 까먹으며 싸움이 결착 나길 기다렸다.
10분이 좀 넘었나 싶었을 때, 마나의 기류가 급격히 강렬해졌다.
"오, 드디어 캐스팅 끝났나?"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세가 매우 강력했다.
레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앞의 산을 올려다봤다.
촤악!!
붉은 열선이 마물과 나무들 따위를 증발시키고 뻗어나왔다.
"오오...?"
감탄하려던 레이가 의문을 품었다.
'열선이 왜 저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초고열의 열선이 앙상한 나무에 가려졌던 레이를 향해 내리꽂힌다.
레이가 양손의 검을 뽑아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아악!!!!!!!
*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 브랜딜은 산봉우리 위에서 시그니 산맥을 지켜보고 있었다.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온통 새하얬지만, 그렇기에 붉은 선으로 양단된 산이 더더욱 눈에 띄었다.
"고위 마법사...?"
무슨 마법을 갈겨놨는지는 몰라도 아티펙트 도움 없이 저만한 화력을 내려면 고위 마법사는 되어야 했다.
"곤란한데..."
저 산은 제국령 안쪽에 위치해 있다.
평소라면 산 하나를 불태웠다고 해도 조심히 접근했을 터다.
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제국 고위 귀족이 이쪽 루트로 망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상관에게 들은 지 며칠도 지났지 않았다.
"정찰 정도는... 해봐야겠군."
브랜딜이 차가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차디찬 겨울 산맥에서 일을 크게 벌이기 싫은 건 왕국이 자랑하는 레인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