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86화 (86/446)

실전 (2)

86화

해가 지나 레이는 14살이 되었다.

허나 아직 겨울이 다 지나가지 않아 날씨가 꽤 쌀쌀했다.

그나마 땔감으로 쓸 목재가 충분한 지역이라는 게 영주민들에겐 다행이었다.

레이는 계속해서 필립스 백작에게 황자와 관련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근에 1황자가 황태자 위에서 축출되고 2황자가 권력을 잡아가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됐다.

2황자는 성격이 냉정하고 잔혹하여,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세력들이 많다 했다.

'뭐, 고모는 괜찮다고 하시니...'

알슈테인 가는 저번 습격 사건을 황실에게 따지고 들어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고 한다.

2황자가 황태자가 된다고 해도 황실이 실책을 저지른 건 변하지 않는다.

알슈테인 가가 선만 남지 않으면, 황실에게 이것저것 더 뜯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 세리아의 위명은 하늘 높게 치솟고 있었다.

로얄가드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 승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진실로 여기고 있었다.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위명이 높아져서 나쁠 건 없지...'

처신에 주의를 좀 해야겠지만 말이다.

레이는 마지막으로 봤던 세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저를 들었다.

늦은 아침이다. 벨라가 차려준 식사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레이가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네 후 포크로 계란을 푹 찍었다.

맞은 편에 앉은 벨라가 레이를 바라보다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다다음 달쯤 은퇴하련다."

"그래?"

레이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은퇴하고 뭐 할 거야?"

"글쎄."

벨라가 한숨 쉬었다.

모아 놓은 돈만 해도 먹고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에게 들어가는 돈도 없다시피 했고 말이다.

다만 집구석에서 가만히 늙어가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사람으로서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벨라는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찾아봤으나 크게 마음 가는 일이 없었다.

"아이나 키우고 싶은데..."

"지금 나 키우고 있잖아?"

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자기를 가리켰다.

벨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은 키우는 재미가 너무 없어."

가만히 내버려 둬도 혼자 알아서 잘 날아다니니 지켜보는 부모 입장에서 좀 키우고 가르치는 맛이 떨어지긴 했다.

레이는 착잡한 감정을 숨긴 채 마주 웃었다.

벨라가 본래 가졌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처지에서,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벨라는 레이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봤다.

보육원에서의 봉사 활동은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던 차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레이가 먼저 일어서서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젠킨슨이 굳을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오, 마스터. 여기까진 웬일이에요?"

레이의 말을 듣고 벨라가 황급히 다가와 무릎을 낮췄다.

"안녕하세요, 젠킨슨 경."

"안녕하시오."

젠킨슨은 나름대로 예를 갖춰 벨라의 인사에 답했다.

신분 격차만 따지면 까마득했으나, 벨라가 레이의 의모인 이상 감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벨라는 인사를 올린 후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가 젠킨슨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데요?"

"요하나가..."

"사고라도 쳤어요?"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

"...?"

레이가 장난스레 웃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

오전부터 영주성이 꽤나 떠들썩했다.

요하나는 젠킨슨의 수업 도중 검기를 발현했고, 젠킨슨은 곧장 요하나를 영주성으로 데려갔다.

시간이 비었던 기사들은 소식을 듣고 죄다 영주성으로 몰려왔다.

백작은 요하나를 영주성 안뜰로 데려가 기사와 알레시아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검기를 시범해보게 했다.

요하나는 집중 끝에 재차 검기를 발현하는데 성공했다.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하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해맑게 웃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레이와 젠킨슨을 발견했다.

"그... 한 번 더 해볼게요."

요하나가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압축된 마나가 검을 타고 흐르며 점점 더 밝게 빛난다.

이윽고 섬광이 된 마나의 기류가 강렬한 예기를 발생시켰다.

완벽하진 않으나, 명백한 검기였다.

호흡을 고른 요하나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콰앙!!

쏘아진 검기가 10 m가량 떨어져 있던 나무 표적을 두들겼다.

비록 어설픈 검기인지라 나무 표적조차 완전히 부수지 못했지만, 요하나의 나이가 이제 열넷인 걸 감안하면 정말 믿기 힘든 성과였다.

젠킨슨이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레이에게 물었다.

"너 대체 애들한테 뭘 먹이고 키웠길래 저런 녀석이 자꾸 나오냐?"

"...그러게요?"

레이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초월자에게 부여받은 권능이 고아 가챠 확률업은 아니었을까?

이쯤 되니 개소리도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젠킨슨이 투덜댔다.

"저 아이가 검을 일찍 배운 것도 아니잖느냐."

젠킨슨 말마따나, 기사들이 요하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은 기껏해야 5년 내외였다.

14살에 엑스퍼트도 굉장한 성과인데, 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쳤다면 엑스퍼트에 오르는 시기가 더 빨라졌을 것이다.

'운이 정말 좋았다면... 하르시아와 같은 나이에 엑스퍼트에 올랐을 수도 있겠어.'

물론 요하나가 하르시아와 비견되는 재능을 지녔다는 뜻은 아니다.

하르시아는 요하나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서 엑스퍼트의 경지를 개척했다.

황제의 자손이었던 하르시아는 의식주 측면에선 요하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호사를 누렸을 테지만, 그는 서자였다.

보는 눈이 많아, 검술을 배우긴커녕 황제의 허락 없이 함부로 검조차 쥐기 힘든 위치였단 뜻이다.

그럼에도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

'뭐, 어쨌든...'

요하나가 정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음은 틀림없었다.

요하나는 모두의 찬사를 받는 와중에도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차마 먼저 앵기지는 못하고, 레이가 빨리 다가와 칭찬해주길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알레시아가 레이를 붙잡았다.

"으음,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는 근래 체중 조절에 성공하여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는데, 어째 지금 목소리는 크게 풀이 죽어 있었다.

알레시아가 고민 끝에 말을 이었다.

"첩을 들여도 세 명까지는 눈감아주도록 하마..."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알레시아가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 투덜댔다.

"다들 너무하는구나..!"

신분은 천한 주제에 왜 이렇게들 잘났는지 모르겠다.

루나는 웬 집채 만한 정령과 계약을 맺어 데리고 다녔고, 요하나는 열넷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으며, 카렌은 입고 있는 옷은 꾀죄죄한 주제에 그 미모만은 아름답게 빛났다.

알레시아로서는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가 몇 달 전보다 조금 높아진 레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관대하니 내가 준 돈으로 첩에게 값비싼 장신구를 사주어도 용서하도록 하마."

레이는 최대한 웃음을 참아가며 대꾸했다.

"기왕 인심 쓰는 거, 여섯 명까지 늘려주시는 게 어때요?"

"첩을 여섯이나 들이겠다는 것이냐...?!"

"요일마다 다른 여인의 마중을 받는 게 제 꿈이었던 지라."

"나의 기사는 변태로구나...!"

곧 죽어도 '나의 기사'는 버리지 못하는 알레시아였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농담입니다, 아가씨. 어쨌든 애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세요. 언젠가는 도움받을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첩들과 친하게 지내라니, 나의 기사는 잔혹하구나아..."

"첩 이야기는 그만하고요."

레이는 요하나가 삐치기 전에 얼른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하나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틱틱거리면서도 레이의 손길은 쳐내지 않았다.

다음 날 요하나는 디디에의 종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이상 아무래도 소속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디디에는 종자로 들이게 된 요하나를 보고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젠킨슨이 떫은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녀석은 종자 복이 터졌군."

요하나처럼 재능 넘치고 귀엽고 부지런한 종자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는가.

젠킨슨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자기 종자를 돌아보았다.

'돌겠군.'

이걸 종자라고 데리고 다녔나 싶어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한편 레이 또한 디디에가 요하나의 뺨을 찰싹 소리만 나게 가볍게 치는 장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차피 오래 얼굴 보고 지낼 거 저렇게 훈훈하게 계약을 마무리하면 얼마나 좋은가?

헌데 자기 마스터란 작자는 거칠게 무두질한 장갑까지 직첩 챙겨오는 잔혹함과 찌질함을 보였다.

'하여튼 속이 좁아서는.'

젠킨슨과 레이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눈으로 욕을 했다.

그렇게 요하나가 스콰이어가 되고 얼마 안 가.

루나가 2서클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루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2서클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대마법사라 추앙받는 천재 중엔 본격적으로 서클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두 달도 안 되어 2서클에 오른 자도 있었다.

허나 루나의 서클은, 평범한 서클이 아니었다.

이를 명확히 아는 자는 루나 본인과 로필렌 정도였다.

물론 레이와 백작가 기사들도, 루나가 서클의 숫자에 비해 훨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레이는 로필렌에게 마법 수업을 충실히 이행한 보상으로 리실로테 레코드의 백도어 좌표 중 하나를 공유해주었다.

로필렌은 희희낙락거리며 레이를 향해 몇 번이고 이마를 지면에 박았다.

로필렌이 리실로테 레코드를 구경한다고 일주일 동안 휴가를 신청해 골방에 박힌 사이.

레이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민에 잠겼다.

'루나가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걸 좀 보고 싶은데...'

마법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1서클일 때도 '점화' 마법으로 숲 일대를 불태웠던 루나다.

지금은 화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또한 대인전에서 충분한 대처법을 익혔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루나."

"...?"

"날 적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마법으로 공격해볼래?"

루나가 곧장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못 해요."

칼같은 거절에 잠깐 얼을 탄 레이가 옆에 있던 젠킨슨을 가리켰다.

"그럼 젠킨슨 경은 공격할 수 있어?"

"...그건 할 수 있어요."

"그럼 젠킨슨 경에게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전력으로 펼쳐 볼래?"

이야기를 듣던 젠킨슨이 기겁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루나도 이제 실전 감각을 길러야 하잖아요. 결투 상대 좀 해주시면 안 돼요?"

"거절한다. 다른 상대를 찾아봐라."

"마스터, 쫄았어요?"

젠킨슨이 뒷목을 잡으며 이를 갈았다.

"쟤가 평범한 2서클이냐? 봐주면서 쟤를 상대하다간 내 목이 날아갈 거다."

루나를 기습해서 단칼에 목을 날린다면 모를까.

젠킨슨은 루나의 화력을 견뎌내면서 손발을 맞춰줄 자신은 없었다.

젠킨슨의 거절에 레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에이. 걱정 마요, 마스터. 안 죽어요 안 죽어."

"확신하냐?"

"에이, 확신하죠."

"정말 확신하냐?"

"엠창이라도 찍을까요?"

"이런 미친놈이."

결국 젠킨슨이 무사할지는 자신할 수 없단 소리였다.

격분한 젠킨슨이 칼을 뽑아 레이에게 휘둘렀다.

레이는 약 5분간의 결투 끝에 젠킨슨을 제압한 후 덤덤하게 물었다.

"그럼 마스터, 이번 동계 훈련은 좀 깊숙이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더 깊숙이라면..."

"길면 한 열흘 정도 잡고 진행하는 거죠."

필립스 백작령 옆에는 시그니 산맥이 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훈련을 진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물론 깊이 들어갈수록 위험해지기에, 기사들은 보육원 아이들을 데리고 합동 훈련을 진행하면서도 보통은 산맥 외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근데 이제는 애들 머리도 좀 컸잖아요? 더 깊이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많이 위험할 수 있다."

마물도 마물이었고, 시그니 산맥의 너머에 존재하는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아주 작게나마 존재했다.

물론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과 적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들이 설치해 놓은 마물용 함정에 빠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레이가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루나를 확인하곤 젠킨슨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도 뒤에 따라갈게요. 애들 몰래."

"끄응."

이러나저러나 레이는 믿음직한 전력이었다.

또한 아이들의 실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젠킨슨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사들과 논의해 보마."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