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1)
85화
레이는 오랜만에 디나르에 들렸다.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는 애초에 레이의 영향력이 적어 레이가 없는 기간 동안 큰 혼란은 없었다.
레이는 피에트로와 약속을 잡고 가디 자작가의 영주성에 들렀다.
응접실에서 피에트로를 기다리고 있자니 리파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언제나처럼 눈웃음을 흘린 리파가 다과 접시를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레이가 리파를 붙잡았다.
"아, 선물 가져왔어."
"선물요?"
"응."
리파도 나름 레어 등급 고아였다.
레이는 따로 챙겨두었던 필기구 세트가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한 번 열어 봐."
"...!"
상자를 연 리파는 테두리가 금으로 장식된 필기구 세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신분이 천한 사람에게 줄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요...!"
"어떻게 받긴 뭘 어떻게 받아. 그냥 받아서 잘 쓰면 되지."
"제가 한 게 뭘 있다고 이런 걸...!"
"네가 피에트로 님 보좌하느라 고생하는 건 영주성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 않아?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받아."
레이의 설득에도 리파는 거듭 선물을 사양했다.
레이가 한숨을 쉬며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리파, 내가 이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
"네 아버지, 칼 말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레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혹시 자기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홀로 남을 딸을 부디 챙겨달라고."
"...!"
리파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헉 소리를 냈다.
레이가 준비했던 선물을 직접 리파의 손에 쥐여주며 따뜻하게 웃었다.
"리파, 난 홀로 훌륭하게 성장한 네가 자랑스러워. 칼도 분명, 자랑스러워 했을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걸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리파가 눈시울을 붉히며 레이의 선물을 가슴에 안았다.
"고마워요."
"그래, 그만 나가 봐. 그건 잘 쓰고. 혹시 도둑맞으면 이야기해. 범인은 꼭 찾아서 족쳐줄 테니까."
리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갔다.
리파가 나가고 얼마 안 돼 피에트로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자네는 키가 조금 큰 것 같군."
레이와 피에트로는 반갑게 손을 맞잡은 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잘한 잡담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울트와 티티에 연관된 화제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피에트로는 울트가 여전히 밖으로 돌고 있다고 말했다.
울트와의 연락책이 말하길, 울트의 겉모습은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고 했다.
"씁..."
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작게 혀를 찼다.
울트와 티티가 도달할 최악의 결말은 레이가 막아냈다.
허나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가에 대해 레이는 꽤 막막했다.
티티의 소멸을 막아야 하는가?
혹은 타락할 운명을 타고났던 울트를 죽여야 하는가?
그게 아니면,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되겠는가?
'편안히 소멸한 티티를 보고 단념한 울트가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지, 특정 선택지를 골랐다면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마음속에 응축됐던 분노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티티 건이든, 황위 계승 건이든.
미래도 모르고 정보도 부족하니 사안이 조금만 거대해져도 함부로 간섭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을 피하겠다며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어쩌면, 당장 틀어막아야 할 어떤 사태를 방치하고 있는 꼴일지도 몰랐다.
'황위 계승... 1황자와 2황자...'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1황자가 황태자 직위를 잃고 2황자가 그 자리를 대신할 확률이 높았다.
2황자는 유능하나 잔혹하다.
2황자가 권력을 얻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나? 1황자가 홀로 날뛰도록 방치하면 안 됐나?
모르겠다.
지금 고민해봤자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만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알 수 있을 터다.
'뭐... 그래도 여기가 변방이니 다행이지.'
황태자가 바뀌든 황제가 바뀌든 당장은 괜찮을 터다.
레이는 그리 생각했다.
*
레이는 피에트로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
영주성 밖으로 나와 마을을 걸으니, 아침부터 자신을 쫓아오던 인기척이 여전히 느껴짐을 알 수 있었다.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엔 인내심을 가지고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지만, 상대는 디나르까지 쫓아와서도 접근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며칠이고 그림자를 붙이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레이는 골목을 도는 척 하며 슬쩍 몸을 숨겼다.
뒤따라오던 인영이 골목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어...?'
요하나가 눈을 깜박인다.
그 순간 레이가 불쑥 나타나 뒤에서 요하나를 들어 올렸다.
"우왓!"
하늘로 휙 떠오른 요하나의 몸이 레이의 어깨 위에 안착 안착했다.
목마를 탄 모양새가 된 요하나가 기겁을 했다.
"내, 내려 줘!! 내려 줘!!"
요하나는 자기 허벅지 안쪽이 남의 살갗에 맞닿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더군나다 디나르까지 따라오느라 몸에 땀이 꽤 찼다.
요하나는 진심으로 레이의 머리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레이는 좀 버텨보려다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자 얼른 요하나를 내려놨다.
"아이고야..."
얼얼한 정수리를 비비며 레이가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졸졸 쫓아왔어?"
"..."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요하나가 허리에 매달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레이에게 고맙다는 감정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던 우리를 거두고, 지키고, 그리고 과분한 '무기'까지 선물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흑... 흐윽...!"
입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울먹임 뿐이었다.
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요, 요하나...? 왜 그래?"
"으으...! 흑...!"
요하나는 울음을 참아보려는 듯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허나 얼마 못 가 땅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씨이...! 나도 목걸이 받고 싶었단 말이야...! 흐윽...!"
주체하지 못한 서러움이 눈물로 변해 줄줄 흘러나온다.
요하나가 결국 엉엉 울기 시작했다.
"검 같은 거 필요 없단 말이야...!!"
요하나도 알고는 있다.
지금 이러는 게 철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레이는 요하나가 감히 상상키도 힘든 가치를 지닌 검을 선물해주었다.
기사들조차 요하나의 검을 보며 탐욕을 쉽게 숨기지 못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요하나는, 비록 싸구려일지언정 예쁜 장신구를 선물 받고 싶었다.
"나 열심히 했잖아아..."
요하나는 무술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재능을 타고 났다.
허나 요하나가 검술이 좋아서 기사들의 교육을 열심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검술 실력에 나름의 성취감은 느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요하나는 검술을 익힐수록 손발에 늘어나는 굳은살이 싫었다.
썩어가는 마물의 내장에 얼굴을 집어넣는 훈련이나, 며칠을 굶어가며 산을 기어오르는 훈련도 싫었다.
모두가 요하나를 천재라 추켜세워주었지만.
요하나는 결국 멋진 기사님보다 예쁜 공주님을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럼에도 요하나가 검을 놓지 않은 것은, 어떤 대단한 목적이나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친구, 선생님, 기사.
그리고 레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었다.
"나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했는데 나는 왜 목걸이 안 주는데...! 흐아앙...!"
요하나는 레이가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나 서러웠다.
그래서 도저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하기 힘들었다.
레이가 펑펑 우는 요하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사춘기 소녀다운 번민과 앙탈과 고집이 썩 귀엽게 느껴졌다.
레이는 요하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허나 레이의 입꼬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요하나."
"흐윽...?"
"너는 더 열심히 해야 해."
레이가 마른 눈으로 요하나를 마주 봤다.
그 차디 찬 시선에 요하나가 잠시 울음을 그쳤다.
"요하나, 너는 더 열심히 해서,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요하나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며, 레이는 턱에 힘을 주었다.
리실로테가 만든 미궁에서 데어터 쪼가리가 지껄였던 내용들.
하르시아의 코어, 심장을 대체하는 장기, 불임과 내장 파열 등의 극심한 부작용, 그리고 죽음.
상황의 여의치 않으면, 결국 레이도 선택을 해야 할 터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열심히 노력해서, 날 빠르게 뛰어넘어야 해."
내가 널 더 몰아붙이지 않을 수 있도록.
혹은.
내가 너희에게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너는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날 뛰어넘어야 한다.
"난 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 없으니까."
요하나는 차갑게 굳은 레이의 시선에서, 잠시잠깐 슬픔이란 감정을 느꼈다.
훌쩍이던 요하나가 레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멋대로 만지지 마...!"
잠시 망설인 요하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락 받고 만져...요."
"아이고~!"
레이가 요하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연스레 한탄이 이어졌다.
"우리 요하나가 어쩌다 이리 컸을까. 옛날엔 우리 요하나 만큼 솔직한 애가 없었는데."
"...!"
요하나는 레이의 품에서 몇 번 바둥거리다 이내 몸에서 힘을 뺐다.
꽤 오랜 시간, 요하나는 빨갛게 충혈된 눈가를 레이의 어깨 위에 비볐다.
"...우리 두고 멀리 가지 마."
요하나가 불쑥 말했다.
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레이가 요하나를 고쳐 안으며 킥킥 웃었다.
"그건 힘들고..."
이 거지 같은 세계를 구하겠답시고 까불다 보면 장거리를 이동해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제트기 같은 것도 없는 세상인지라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왕복하는데 시간이 보름 이상 깨졌다.
"정 내 옆에 붙어 있고 싶으면, 너희가 날 따라다닐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지."
전력도 안 되는 꼬맹이들을 데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요하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는 치사해."
*
보육원으로 돌아온 요하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카렌이 목걸이의 보석을 보며 히죽이다 말고 황급히 목걸이를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색하게 웃는 카렌을 향해, 요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뻗었다.
짤랑!
요하나가 카렌의 목걸이를 밖으로 보이게 빼냈다.
요하나는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를 살피다가 입을 삐죽이며 툴툴 댔다.
"나 계속 열심히 할 거야."
검술도 열심히 배우고, 신체도 열심히 단련해서 싫으나 좋으나 레이 곁에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엔 나도 목걸이 받을래."
마치 선전포고처럼 느껴지는 요하나의 박력에, 잠시 당황했던 카렌이 배시시 웃어주며 요하나를 끌어안았다.
"알겠어. 요하나라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목걸이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카렌은, 요하나의 재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레이가 재능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나는 요하나를 따라잡지 못해.'
시간이 지날 수록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요하나가 레이 곁에 서 있을 때, 자신은 레이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고 버려질 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카렌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같이 열심히 하자."
"...응."
친구의 미소를 보며 요하나도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
카렌이 요하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뜀박질을 하는 카렌의 목에서 목걸이의 체인이 짤랑였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하고, 또한 레이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며 성장해 간다.
그렇게 다음 해 봄이 찾아오기 전에.
요하나는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