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5)
84화
레이는 백작령으로 귀환한 후 계속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어수선해진 보육원 분위기를 바로잡고 아이들의 성장을 점검하는데 시간이 꽤 깨졌다.
평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낸 레이가 조금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
레이가 살짝 인상을 구겼다.
오늘은 벨라가 일을 쉬는 날이었는데, 집 안에서 사람 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손님 왔어?"
레이가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카렌과 시선이 딱 맞았다.
카렌의 목에서 황금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찰랑였다.
카렌은 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뛰어와서 레이의 품에 안겼다.
"레이 왔다!"
"...너가 왜 내 집에서 나오냐?"
벨라가 주방에서 나오며 레이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내가 좀 머물다 가라고 했어."
"...엄마가?"
"그래. 밥은 먹었니?"
"어... 먹고 오긴 했어."
"그럼 사과 좀 깎아 올 테니 그거나 좀 먹어."
이야기를 듣던 카렌이 냉큼 손을 들었다.
"제가 깎아올게요!"
부엌에서 칼 다루는 법도 나름 열심히 배워놨던 카렌이다.
자신만만한 카렌의 태도에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맡겨볼까?"
카렌이 레이에게서 떨어져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벨라를 쳐다봤다.
집에 손님을 들이는 경우야 간간이 있었지만, 벨라는 언제나 해가 저물기 전에 손님을 집 밖으로 내보내고는 했다.
"웬일이야, 엄마?"
"으음..."
졸음을 참듯이 미간을 찌푸린 벨라가, 얼마 못 가 쿡쿡 웃기 시작했다.
"목걸이 예쁘더라."
"...?"
"네가 선물한 목걸이라며?"
"그...렇지?"
벨라의 웃음소리가 한 층 커졌다.
"오늘 아침에 집으로 오다가 카렌을 만났어."
카렌은 우연히 벨라를 마주친 것처럼 행동했지만, 벨라는 한참 전부터 카렌이 '라일락의 저녁'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렌은 벨라와 함께 길을 걸으며 눈치를 보더니 얼마 안 가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레이가 선물해준 목걸이라고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워낙 값비싼 물건이라 남들에겐 함부로 내보이지도 못하고, 또래 아이들에게 자랑해봤자 불화만 생기니, 자랑할 사람을 찾다 찾다 결국 나를 찾아온 것 아니겠니. 그래서 마음껏 자랑해보라고 집에 데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벨라는 잠도 못 자고 카렌과 몇 시간이나 레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렌은 레이가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말했다.
그래서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벨라는 자기 아들을 이토록 좋아해 주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 참 즐거웠다.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엄마한테는 못 생긴 약재나 몇 개 던져주고는 귀여운 여자애한테 저리 예쁜 목걸이를 사줘?"
"아니 엄마, 뭔 열셋 먹은 애한테 질투를 하고 그래?"
벨라가 깔깔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며느리야?"
"하하, 글쎄."
레이가 의자에 등을 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 좀 더 굵어지고 나면 다른 남자한테 홀딱 반해 도망갈지 어떻게 알고."
"어머, 이 주변에 우리 아들보다 잘난 남자가 있었던가?"
"그리 따지면 황도를 뒤져도 없긴 해?"
능청스러운 대답에 벨라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벨라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며느리라...'
레이는 딱히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정도 붙지 않았고, 그보다 살림 차려봤자 좋은 꼴을 볼 것 같지 않았다.
골골 거리다 일찍 뒤질 남편을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좋아하려나?'
전생에 인터넷 좀 구경하다 보면 남편 좀 빨리 뒈지라고 고사 지내는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레이가 실소를 흘리고 있자니 카렌이 주방에서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접시에 가득 담아 가져왔다.
조심스레 사과 접시를 내려놓은 카렌이 눈치를 보다가 레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레이가 카렌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옷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목걸이가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네.'
확실히 예쁜 목걸이였다.
이쪽 세계의 장신구 치고 디자인이 점잖은 편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레이가 사과를 한 조각 씹어 먹은 후, 불쑥 입을 열었다.
"카렌."
"으, 응...?"
한껏 긴장한 카렌을 향해 레이는 덤덤하게 말했다.
"열심히 해. 기회가 될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검술도 열심히 배우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놔."
"어... 응? 알겠어!"
카렌이 파닥파닥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말없이 사과를 다시 집어먹었다.
슬슬 카렌의 눈높이를 따라잡고 있었다.
편식하지 말고 이것저것 열심히 먹어야 했다.
*
로필렌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루나를 보고 지긋이 입술을 씹었다.
루나에게 본격적으로 마법 교육을 시작한 후, 로필렌은 식은땀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
루나를 마주하고 있자면 자꾸만 속이 거북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로필렌은 처음에 자신이 루나의 재능을 질투하고 있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로필렌은 루나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모든 마법사는 처음에 하나의 서클을 지닌다.
그리고 심장을 회전하는 하나의 서클을 분열시켜 고리의 개수를 늘려간다.
서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고차원의 마나 연산이 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더욱 강력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된다.
마법의 분류도 서클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데, '6서클 마법'이라 함은 최소 여섯 개의 서클이 있어야 발현 가능한 마법을 가리킨다.
서클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다.
분열된 서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활용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마법사라 해도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서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그에 따른 부담이 거대해졌다.
인간이 닿을 수 있는 끝자락이라 여겨지는 9서클.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의 숫자가 한 손에 꼽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아이는...'
루나는, 서클의 성능이 평범한 마법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하나의 서클만으로, 2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특혜였다.
'그게 끝이 아니야.'
리실로테가 남긴 유산들.
황실 마탑보다도 패러다임이 앞서 있는 괴이한 수학 지식들.
그리고 불가해한 수준의 이해력과 계산력.
루나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로필렌은 확신했다.
루나가 3서클만 되어도, 충분한 시간과 지원이 갖춰지면, 제한적이나마 대마법조차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이 아이는 괴물이 될 거야...'
루나가 그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다면, 설령 전성기의 하르시아라 해도 맞상대가 될까 의문이었다.
로필렌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제 손으로 꽃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로필렌을 자꾸만 두렵게 만들었다.
로필렌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물었다.
"루나, 너는... 꿈이 뭐니?"
루나가 무엇을 갈망하든, 세상은 그녀를 막아 세울 수 없을 터다.
로필렌은 쾅쾅 뛰는 가슴을 짓누르며 루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착한 마법사요."
"...?"
로필렌이 눈을 깜박이다 다시 물었다.
"꿈이 뭐라고?"
"착한 마법사요."
로필렌이 잠깐 고민했다.
착하다는 형용사가 마법사란 명사 앞에 올 수 있는 단어였나?
고개를 갸웃거린 로필렌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 왜?"
"..."
루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검게 변한 시야를 언젠가의 풍경이 뒤덮는다.
루나는 남기고자 하는 기억을 잊지 않고 저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루나는 아직도, 그날들의 기억을 밤마다 돌려보곤 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혹은 일백의 암흑 정령이 숲을 뒤덮었던 날.
한 소년이, 터져 나간 관절 사이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비틀대면서도.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주던 광경을.
소녀는 소년을 향해 어째서 나를 구하려고 애 쓰냐고 물었다.
그때 소년은 낄낄 웃으며 답했다.
너는 착한 아이니까.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너한테 떡고물 좀 얻어먹으려고 그랬다고.
뒷말이 거짓말인 것은 소녀 또한 알고 있다.
소년은 다만, 소녀가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되길 바랐다.
그러니까 루나는 착한 마법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마법사도 될 수 있겠지.
때문에 루나의 꿈은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루나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저는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예요."
소녀의 광기 어린 맹목을, 로필렌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과연..."
로필렌이 실소했다.
과연, 눈앞의 아이는 타고난 마법사였다.
맹목은, 마법사의 가장 우선 되는 자질이었다.
"부디 그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게."
자리에서 일어선 로필렌이 책상을 치웠다.
루나가 추후 어떤 존재로 발아하든 그건 레이, 그러니까 하르시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로필렌은 그저 맡은 소임을 다하면 되었다.
"루나, 네가 레이에게 받은 아공간 좌표값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로필렌은 이미 리실로테 레코드가 무엇인지 레이에게 전해 들었다.
로필렌은 오늘 루나에게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처음엔 너무 이르지 않나 싶었지만, 루나의 재능이라면 '극한'을 경험한다 해도 압도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리는 간단해. 결계를 활용해 아공간에 새겨진 정보를 눈앞에 구현하는 거야."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에 정보를 새기기가 어렵지, 간단한 결계의 생성과 유지쯤은 서클 한두 개로도 해낼 수 있었다.
루나는 로필렌의 인도에 따라 결계를 펼쳤다.
로필렌이 루나의 결계를 점검한 후 한 발 떨어졌다.
"자, 레이가 준 좌표로 접속해보렴."
후욱!
루나의 시야가 일변 했다.
"...?"
루나가 자기 몸을 내려보았다.
미리 들었던 것과 달리, 육체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루나는 의아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반짝이는 검은 공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루나가 서 있는 곳은, 별이 흐르는 우주 한가운데였다.
"안뇽~ 반가워."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루나가 고개를 돌렸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허공을 딛고 있었다.
"아! 대답은 하지 마. 나는 사념 덩어리나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가 아니라 녹화된 영상에 가깝거든.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니 그냥 입 다물고 듣기만 하면 돼."
루나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소녀가 말을 이었다.
"부디 하르시아의 계승자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골랐길 바랄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멍청이에겐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거든. 하지만... 네가 정녕 나의 후계에 적합하다면..."
삑!
검은 공간 사이로 행성 하나가 붉게 점멸한다.
대지와 바다를 지닌, 루나가 얼굴을 아는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그 행성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수많은 숫자들이 우주를 뒤덮기 시작한다.
삑!삑!삑!삑!삑!삑!
소행성, 위성, 행성, 그리고 불타는 거성들.
그 모든 것들의 위치와 궤도가 숫자로 변해 우주를 뒤덮는다.
"오벨리스크에서 수백 년을 넘게 관측하고 분석해 제작한 우주 지도야. 부디 네 재능이 충분하길 바랄게. 이건 이용하기에 따라..."
루나와 눈을 마주한 소녀의 입가가 황홀하게 일그러졌다.
"도시를, 나라를, 대륙을, 지면 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 있는..."
별의 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