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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83화 (83/446)

성장 (4)

83화

루나는 성공적으로 고위 정령과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최종적으로 루나는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둘, 상급 정령 하나, 고위 정령 하나를 아래에 두게 되었다.

어지간한 그래듀에이트나 고위 마법사와 비견해도 모자람 없는 전력이었다.

레이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어, 음..."

계약한 정령들을 일렬로 세워 놓으니 그 위세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루나는 고위 정령과 계약 각인을 맺어 놓고도 셀로미어에 여유가 꽤 있는 듯했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두 눈을 마주했다.

"루나, 똑똑한 너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

"네게 귀속된 정령들의 힘은 강대하고 치명적이야.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돼."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래, 착하다."

피식 웃은 레이가 정령들을 돌아보았다.

정령이 다섯이나 되긴 하는데 죄다 바람 정령이었다.

'기회가 되면 종류별로 하나씩 루나와 계약시켜봐야겠어.'

정령들은 보통 다른 계열의 정령을 다루는 마법사와 계약을 맺기 싫어했지만.

정령들의 호불호에 대해 레이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었다.

[크르륵...!]

고위 정령 칼가가 정신을 좀 차렸는지 레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레이가 비웃음을 흘렸다.

"어이, 정령 5호기. 눈 안 깔아?"

[내 이름은 5호기가 아니라 '칼가'다. 빌어먹을 하르시아의...]

"루나, 저놈 사람 말 좀 못 하게 해."

"...알겠어요."

[크르르륵!]

루나의 명령에 따라 소통이 막힌 칼가가 레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정령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는 순전히 개체 차이였다.

중급 정령 중에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개체가 있고, 최고위 정령 중에도 인간과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한 개체가 있다.

칼가의 경우 꽤 유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레이는 칼가가 입을 놀리게 둘 생각이 없었다.

'저놈 아가리 방치해봤자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나지.'

몇 번 더 입을 뻐끔거리던 칼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친 기세를 뿜어냈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검을 뽑으려는데, 그보다 앞서 루나가 정령들을 움직였다.

콰가가각!!

루나와 계약한 상급 이하의 정령들이 칼가를 할퀴어 대기 시작했다.

고위 정령을 공격해야 하는 상급 이하의 정령들이나 아랫것들에게 몰매를 맞아야 하는 칼가나 둘 다 죽을 맛이었다.

결국 기가 눌린 칼가가 고개를 다시 지면에 처박았다.

나름의 항복 표시였다.

레이가 칼가의 뺨을 툭툭 쳤다.

"앞으로 잘하자?"

[...]

칼가는 더는 기 싸움을 하지 않고 레이와 눈을 피했다.

로필렌은 그 광경을 보며 기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타고난 정령사라 해도 단기간에 강력한 정령들과 유리한 계약을 맺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허나 루나는 레이의 도움을 받아 하루도 안 되어 고위 정령사라 불릴 만한 힘을 얻었다.

더군다나 아직 셀로미어에 여유가 충분하다고 한다.

'저기에 마법까지 본격적으로 배우면...'

얼마 안 가 로커스트와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을 지닌 마법사가 탄생할 것이다.

물론 지능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고성능의 서클을 지녔다고 해도 마법을 제대로 익힐 수 없다.

허나 레이는 분명, 루나가 굉장히 독보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

'어쩌면 정말...'

리실로테를 넘어서는 대마법사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로필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짓누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숨을 헐떡이는 로필렌을 향해 레이가 루나를 데려왔다.

"로필렌 님."

"?"

"그만 돌아갑시다. 돌아가는 길에 루나에게 정령 다룰 때 주의해야 할 것들 좀 설명해 주세요."

"어, 응. 알겠어."

"아, 그 전에..."

레이가 상의를 탈의했다.

살갗에 눌어붙었던 천이 떨어지며 화상을 입은 부위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레이가 세리아에게 받아왔던 포션 뚜껑을 따서 로필렌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상처에 뿌려주실래요?"

로필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레이의 타들어 간 살가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벌써 몇 번째일까.

흉측한 상처를 입은 레이의 등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적이.

루나의 기억 속에서 레이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안심하라는 듯 환히 웃어주고 있었다.

더는 그 웃음을, 루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

요하나는 며칠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은색 검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요하나는 속을 헤집는 짜증과 자괴감에 탓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레이가 선물한 은색 검을 거들떠도 안 보고 싶었다.

허나 요하나가 은색 검을 아무 데나 던져둘 때마다 루나가 매번 낑낑거리며 검을 들고 찾아왔다.

요하나는 그런 루나의 강요 아닌 강요 탓에 하는 수 없이 은색 검을 메고 다녔다.

요하나는 정말로 정말로 은색 검이 싫었다.

여자들은 아무도 요하나가 선물 받은 은색 검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은색 검을 보고 눈을 빛내는 건 전부 남정네들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는 남정네엔,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오오...! 오오오옥...!!"

아이들의 검술 수련을 돕기 위해 보육원에 들렀던 피코르가 입을 쩍 벌린 채 되다 만 탄성을 토해냈다.

"이게 진품이라고...?!"

피코르가 컥컥 숨을 몰아쉬며 동행한 젠킨슨에게 물었다.

젠킨슨은 피코르의 반응을 백번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마탑에서 레이가 제플린 님께 직접 구매한 거다."

"오옥...!! 오오옥...!!"

이리 격한 반응을 보인 건 피코르 하나만이 아니었다.

평소 진중하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기사들이 피코르의 이야기를 듣고 우르르 보육원으로 달려왔다.

요하나의 검을 본 기사들은 하나같이 침을 질질 흘리며 탐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과묵한 디디에조차 털썩 무릎을 꿇으며 탄성을 질렀다.

"내가 살아생전 제플린의 X 시리즈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요하나에게 검을 빌려 손에 쥔 디디에의 눈동자가 탁하게 풀렸다.

"세상에...!! 진짜 X 시리즈야...!!"

기사도를 중시하며 사치를 멀리했던 디디에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되는 기사들의 꼴불견에 요하나는 점점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좋은 검을 선물해주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허나 요하나는, 레이가 선물해준 검의 가치가 기껏해야 애들한테나 조금 비싼 정도일 줄 알았다.

헌데 항상 으리으리한 갑주를 입고 다니는 기사들마저, 레이가 선물한 검을 보고 충격을 받아 픽픽 쓰러져 갔다.

'연기... 하는 건가? 레이랑 짜고서?'

요하나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요하나는 얼마 못 가 자기 추측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항시 백작의 곁을 지키던 모하메드마저 소식을 듣고 보육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제플린의 X 시리즈가 여기 있다고...?!"

"아버지!! 이리 와보십시오!!"

헐레벌떡 디디에에게 다가간 모하메드가 매끄럽게 뻗어 나온 은색 검신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심스레 은색 검을 손에 쥔 모하메드가 요하나에게 비굴한 태도로 부탁했다.

"요, 요하나, 네 검에, 딱 한 번만 검강을 덧씌워봐도 되겠니...?"

"...괜찮아요."

요하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하메드가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검신을 타고 흘러들어 간 마나가 삽시간에 압축되어 검강을 생성한다.

모하메드는 전율했다.

검강이 이토록 부드럽고 신속하게 발현될 수 있음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을 보며 기사들이 홀린 듯이 박수를 쳤다.

"오오오...!!"

"우오오오...!!"

"과연 명품은 이름값을 하는군...!!"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기사들을 향해 요하나가 어렵사리 물었다.

"그거... 많이 비싼 검이에요...?"

"맙소사!! 많이 비싼 검이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내뱉고 자빠졌...?!"

호통을 치는 피코르의 뒤통수를 젠킨슨이 가볍게 갈겼다.

피코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제플린이라는 이름 높은 장인이자 마법사가 제작한 검이란다. 특히 X 등급은 물량이 거의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이지."

요하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제플린이니 X 등급이니 기사들이 떠들어봤자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요하나는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비싼 검인데요?"

1,000 골드? 아님 5,000 골드?

요하나는 나름대로 굉장한 숫자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불안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나눈 후 요하나와 거리를 좁혔다.

검의 가격이 밖으로 새나가 봤자 전혀 좋을 게 없었다.

"요하나..."

모하메드가 요하나의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으며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

"남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 레이가 네게 선물한 건 정말 가치 높은 보검이야. 이 검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모하메드가 잠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2~30만 골드 정도 필요했나?"

"경매에 나오면 4~50만 골드는 우습게 넘어간다고 들었습니다."

"귀족들 간의 자존심 싸움이 붙어 100만 골드에 낙찰된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

요하나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20만? 100만? 그럼 0이 대체 몇 개 붙는 거지?

1골드면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빵만 10개를 구매할 수 있다.

자기 옆구리에 달린 검을 팔면 빵 10,000,000 개를 구매할 수 있단 소리다.

"...?"

요하나의 눈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젠킨슨이 정신을 못차리는 요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아이에게 맡기기엔 너무나도 귀한 물건이나..."

젠킨슨은 연이어 요하나의 허리춤에서 은색 검을 검집 째로 뽑아냈다.

"네가 지닌 찬란한 재능에 비하면 초라한 물건이기도 하다."

스릉!

찬란히 빛나는 은색 검신이 뽑혀 나온다.

젠킨슨은 레이가 준비했던 평범한 검집에 은색 검을 납검한 후 다시 요하나의 허리에 동여매 주었다.

"요하나."

"네, 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요하나를 보고 젠킨슨이 따뜻하게 웃었다.

"레이 그놈이 눈치 없는 짓을 하긴 했다. 아주 고약한 짓을 했지."

한참 때의 소녀에게 아무리 좋은 검을 선물해봤자 값싼 장신구보다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젠킨슨은 오랜 시간 레이를 지켜봤다.

그의 헌신을, 그의 노력을, 그의 고통을 지켜봤다.

불가해의 재능을 타고나서도 남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태우길 마다 않는, 레이의 뒷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봤다.

"단언컨데... 너희가 평생을 살아가도..."

인간이란 본디 호의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생물이다.

허나 젠킨슨은, 아이들이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 녀석만큼 너희를 아끼고 사랑해준 존재를 만날 수는 없을 거다."

부모조차 버린 너희를.

세상의 악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너희를.

레이는 제 살을 깎아가며 거두었다.

"그러니까 레이와 얼른 화해했으면 좋겠구나."

젠킨슨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요하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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