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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82화 (82/446)

성장 (3)

82화

펜리르와 피닉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중급 정령 두 마리를 데려왔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은 루나를 보더니 퍽 호의적인 태도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 광경을 보고 알레시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정령들이 사람을 차별하는구나아..."

모너클인 알레시아와 네추럴인 루나를 대하는 정령들의 태도는 크게 차이 났다.

알레시아가 축 늘어진 채 입술을 삐죽 내밀자 펜리르가 다가와 위로하듯 뺨을 핥아주었다.

피닉스가 '애쓴다 병신아' 쯤 되는 표정으로 펜리르를 지켜봤다.

한편 새로 나타난 정령들이 주변을 계속 맴돌자, 루나는 로필렌의 도움을 받아 계약 조건을 정령들에게 제시했다.

[...]

극악하기 짝이 없는 계약 조건에 살랑거리던 정령들의 꼬리가 바짝 세워졌다.

당장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정령들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은 후 작게 그릉거리며 계약 조건의 조율을 주장했다.

상당히 신사적인 응대였다.

루나가 어찌할까 싶어 고개를 돌리니, 레이가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며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정령이... 계약 거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항거였다.

곧장 검이 휘둘러졌다.

[깨갱, 깽깽!!]

[빼애애액!!]

한바탕 정령들의 비명이 몰아친 후.

중급 정령 두 마리는 바닥을 기어가며 루나와 노예 계약에 가까운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알레시아가 루나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했다.

"너도 이제 나와 같은 정령사가 되었구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령을 다루는데 궁금한 것이 생기면 영주성으로 부담 없이 찾아오거라! 요령을 알려줄 테니!"

알레시아는 숙련된 정령사라도 된 것 마냥 목에 힘을 주었다.

레이는 가볍게 웃으며 알레시아의 자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알레시아 님,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해야 할 일도 마쳤으니, 영주성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알겠도다. 그럼 루나, 다음에 보자꾸나!"

레이는 알레시아를 영주성까지 데려다 준 후, 다시 숲 속 공터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정령과의 계약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몸을 푸는 레이를 향해 로필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아이 정도의 정령 친화력이라면... 강압을 동반하지 않아도 유리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 거야. 굳이 극단적인 조건을 걸어야겠어?"

"그럼요. 정령은 루나에게 완벽히 속박되어야 해요."

레이가 목을 옆으로 당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말했잖아요.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절대 배신하지 못할 아군이 필요하다고."

로필렌은 레이의 말을 이해했다.

허나 정령과의 노예 계약이 정령사에게 있어서도 꽤 비효율적인 선택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필렌이 나름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고위 정령 이상의 존재를 계약 각인으로 속박하려면 어마어마한 용량의 셀로미어가 필요해. 상급 정령 몇 마리를 휘하로 두고, 고위 정령과는 일반적인 계약을 맺어보는 게 어떨까?"

"음... 고려해볼게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고위 정령을 낚는 게 가능한가부터 확인해봐야 했다.

레이가 새롭게 계약을 맺은 정령들 앞에 섰다.

"잘 듣도록. 정령 친구들."

레이의 검에서 검기가 불쑥 솟구쳤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두 정령을 향해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둘 중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을 낚아오는 녀석은, 노예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이 기회 놓치면, 수십 년은 노예처럼 묶여 사는 거야."

정령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반드시 옆에 놈보다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을 데려와야 했다.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는 정령들을 보고, 로필렌은 가슴 깊이 감탄했다.

과연 역사에 새겨진 대영웅이었다. 사람과 짐승 다루는 솜씨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꽤 흘러, 사라졌던 정령 두 마리가 팔아치울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흠..."

새롭게 나타난 정령은 둘 다 중상급이었다.

레이가 흡족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정령들의 괴상한 비명이 재차 숲 속을 울렸다.

그렇게 루나는 수월하게 네 마리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레이는 약속대로, 약간이나마 힘이 더 강력한 중상급 정령을 데려온 놈을 노예 계약에서 풀어주었다.

"자, 그럼..."

레이가 바닥을 기고 있는 중상급 정령들을 쳐다봤다.

써먹을 레퍼토리는 동일했다.

"둘 중 한 놈만 노예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

그 짓을 3번 반복하니 루나의 곁에는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둘, 상급 정령 둘이 남게 되었다.

레이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상급 정령 쯤 되니 드잡이질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격 자체가 아래 등급과 완전히 다르다는 고위 정령 쯤 되면 본체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을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루나 몸 지키는 데는 충분할 것 같고...'

굳이 고위 정령과의 노예 계약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얼굴은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레이가 정령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중에 나는 고위 정령을 낚아올 자신이 있다, 손들어."

상급 정령 하나가 냉큼 머리를 치켜들었다.

레이가 말했다.

"출발."

래이가 명령을 내리고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상급 정령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레이는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정령과의 만남에 방해되지 않도록 거리를 벌렸다.

'고위 정령이라...'

로커스트와의 일전이 떠올랐다.

최고위 암흑 정령의 위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더군다나 그날의 모습이 최고위 암흑 정령의 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계약 내용에 따라 이끌어낼 수 있는 정령의 힘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오늘은 고위 정령 얼굴까지만 보고 끝내자. 가벼운 계약을 맺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과유불급이라 했다.

루나는 아직 어린 소녀였고, 하루아침에 필요 이상의 거대한 힘을 쥐여주는 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한 셀로미어를 굳이 꽉꽉 채워 놓을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쐐애애애애애액!!

흡사 태풍이 찾아온 것처럼 강풍이 불어닥쳤다.

나무가 휘청이며 뿌리가 박혔던 지면까지 같이 요동친다.

레이가 검을 땅에 박아넣고 로필렌이 마법으로 몸을 지탱했다.

오직 루나만이,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처럼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임시 실체화로 이 정도 위력이라...'

확실히 지금까지의 정령들과 수준이 달랐다.

마침내 고위 정령, '칼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과 등허리를 뒤덮은 갈기, 고릴라와 유사한 체형, 좌우로 쭉 뻗어 나온 날개, 그리고 바람처럼 매끄러운 피부.

신장만 수 m에 이르는 고위 바람 정령이 거대한 얼굴을 루나에게 들이댔다.

[...]

탐색하듯 루나를 훑어본 칼가가, 입꼬리처럼 보이는 주름을 길게 찢었다.

칼가는 눈앞의 어린 마법사가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으나 아직 개화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서클을 늘리지도 못한 애송이 주제에 고위 정령과의 계약을 시도하다니.

칼가는 어린 마법사의 오만이 참으로 유쾌했다.

쿠웅!

칼가가 앞발을 내디뎠다.

고위 정령인 칼가는 임시 실체화를 한 상태에서도 꽤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강맹한 바람이 몰아치며 루나를 옥죈다.

폐로 들어갈 공기까지 바람에 뒤섞여 휘몰아친 탓에 루나가 숨을 쉬지 못하고 컥컥 댔다.

명백한 겁박이었다. 내가 원하는 계약 조건을 따르라는.

"이런..."

로필렌이 인상을 썼다.

고위 정령이 저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었다.

어찌 보면 루나라는 존재가 아직까지는 우습고 하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이었다.

"저 멍청하고 무지한 미물이 제 무덤을 파는구나."

로필렌이 조소했다.

레이가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흔들리는 지면 위로 한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하여튼 마법사고 정령이고..."

믿을 새끼가 하나 없다.

레이는 저런 개새끼들은 어설픈 계약으로 묶어둘 생각을 싹 버렸다.

레이나 칼가나 하는 짓이 비슷하긴 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레이는 짜증과 혐오를 느꼈다.

본디 내로남불과 동족혐오는 인류의 오래된 특성이었다.

끼긱!

아공간에서 제국의 신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로스를 손에 쥔 레이가 코어를 세차게 회전시켰다.

검기 두 줄기가 동시에 압축되며 나선 형태로 모로스를 휘감았다.

고작 두 줄기의 검기를 활용한 어설픈 검강 흉내였으나, 모로스가 그 힘을 증폭시킨다.

모로스에서 터져 나오는 섬광을 보며 로필렌이 무의식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아..."

황홀한 웃음을 머금은 로필렌을 뒤로 하고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어마어마한 가속과 함께 레이가 삽시간에 칼가의 측면을 지나쳤다.

쫘아악!!!

칼가의 날갯죽지가 하나가 그대로 찢어져 나갔다.

뇌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칼가가 괴성을 지르며 실체화를 해제하려 했다.

칼가의 주변이 통째로 흐릿해진다.

레이는 사방에 한기를 흩뿌리며 흐릿해지는 공간에 억지로 몸을 끼워 넣었다.

실체화를 풀어가던 칼가가 중첩된 공간에 발을 들이는 레이를 보고 경악했다가,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

이 중첩된 공간 속에선 칼가 또한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크르르륵!!!]

바람의 칼날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레이는 바람의 칼날을 받아내다 문득 인상을 썼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바람 정령의 권능이 몸을 침범한다.

마나가 덧씌워지지 않은 피부가 점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까다롭긴 하군."

칼가가 발하는 공격도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레이를 가장 곤란케 한 건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지면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근력이 좋아도 허공을 박차는 것만으론 추진력을 제대로 얻을 수 없다.

레이가 혀를 차며 모로스를 한 바퀴 돌렸다.

중첩된 공간을 헤집으며 쏘아진 도약 검기가 칼가의 등허리를 후려쳤다.

콰가각!!!

[키에엑!!]

레이는 재차 모로스를 빙글 돌려냄과 동시에 심장의 서클을 역회전시켰다.

코어를 제어하기 위해 조율된 서클이라 마법 발현에 적합하진 않았다만, '점화' 정도의 간단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다.

콰앙!!

레이의 후방에서 화염이 터져 나왔다.

레이는 그 후폭풍을 활용해 곧장 칼가를 향해 쇄도했다.

칼가가 대응하려는 순간 허공을 찢고 도약 검기가 떨어져 내린다.

콰가각!!

도약 검기가 칼가의 다리 하나를 박살 냈다.

레이는 고통 탓에 정신을 못 차리는 칼가의 갈기를 붙잡았다.

모로스를 나선형으로 타고 오른 두 자락의 검기가 거칠게 공명하며 휘둘러진다.

촤악!!!

레이가 하나 남은 칼가의 날개를 베었다.

칼가가 힘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콰아앙!!

칼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뒷발로 지면을 디디고 섰다.

여기서 더 밀려나면 중첩된 공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 되면 실체화를 풀고 도망가는 것도 어려워졌다.

[키에엑!!]

칼가가 바로 옆에 추락한 레이를 향해 앞발을 휘두른다.

인간의 주먹질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 같았지만, 거기엔 고위 정령의 권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레이는 곧장 관절 사이에 마나를 집약시켰다.

관절 사이의 마나가 터져나가며, 신체가 극한까지 가속된다.

콰앙!!!!

칼가의 앞발이 휘둘러졌을 때, 레이는 이미 칼가의 품 안에 있었다.

검기에 휩싸인 모로스가 칼가의 오른쪽 가슴을 파고든다.

칼가는 지독한 고통과 함께 균형을 잃었다.

콰가가강!!!

칼가의 거대한 몸뚱이가 산맥을 구른다.

칼가는 중접된 공간에서 벗어나고도 수십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린 후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는 칼가가 도망갈 수 없도록 칼가의 위에서 모로스를 겨눈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저 너머에서 루나가 허겁지겁 뛰어온다.

칼가 앞에 도착한 루나가 거칠어진 호흡을 주체 못하며 레이를 올려봤다.

레이가 루나를 향해 맑게 웃었다.

"얘랑도 계약해볼래?"

그리 말하는 레이의 몸뚱이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상만 다섯 군데에, 등에는 화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맑게 웃고 있었다.

루나는 가슴 한편이 쓰라렸으나,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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