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81화 (81/446)

성장 (2)

81화

다음 날.

레이가 잘게 간 라푸마를 찻잔에 넣은 뒤 끓인 물과 함께 휘휘 저었다.

라푸마와 섞인 물이 산뜻한 녹색을 띠기 시작한다.

물 위로 번져 나오는 은은한 빛 무리를 확인한 레이가 찻잔에 입을 댔다.

맹맹한 단맛이 혀에 가득 퍼졌다.

썩 마음에 드는 맛은 아니었으나 레이는 불평 없이 삼켰다.

'효능이 괜찮으면 좋겠는데...'

일단 세리아가 준 걸 먹어보고 효능이 있다 싶으면 백작을 쪼아서라도 잔뜩 구비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레이가 고개를 들어 지미와 매튜를 마주 봤다.

"별일 없었나요?"

그래도 몇 달 만에 만났다고, 둘의 얼굴이 썩 반갑게 느껴졌다.

지미가 툴툴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렌이 널 얼마나 찾아댔는지는 아냐? 다른 애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난리도 아니었다."

지미는 한참 동안 레이가 없는 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 떠들었다.

듣던 매튜가 말을 덧붙였다.

"새로 들어온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지금 있는 애들 대부분은 네 손을 너무 탔다. 그 애들에게 있어 너는 부모와 크게 다를 게 없어. 제대로 책임을 질 거라면, 애들 머리가 좀 굵을 때까지는 곁에 있어줘라."

"알겠어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갈수록 보육원을 향한 지원이 많아진 덕분에 이제 와선 레이가 없어도 보육원이 잘 돌아갔지만.

초창기 보육원은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레이가 직접 챙겨야 했다.

그 시절 보육원에 발을 들인 아이들한테는 레이가 보육원이었고 보육원이 레이였다.

레이가 과거를 되새기며 찻잔에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는 레이를 향해 지미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오늘 길에 습격받았다며? 산적이라도 만난 거냐?"

"하하..."

잠시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지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네놈은 어째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냐?"

"제가 원래 운이 좀 많이 안 좋은 편이어서요."

'그렇지 않으면 친구 대신 다른 세상에 끌려오지도 않았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는 레이를 보고 지미가 질린 얼굴을 했다.

"근데 로얄가드를 상대로 너 혼자 시간을 끌었다고?"

"시간을 끈 게 아니라 제가 죽였습니다."

"...?"

지미와 매튜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레이는 곧장 서클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지미와 매튜에게 공유한 비밀이 워낙 많았다.

이제 와서 서클 같은 걸 숨긴다고 해도 전혀 이득이 없었다.

'차라리 명확히 인식시켜 주는 게 낫지.'

당신들이 눈앞에 두고 있는 아이가 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트드득!

마나가 요동친다.

찻잔을 넘어, 탁자가 얼어붙어 나가기 시작했다.

금세 벽면까지 번진 성에를 보고 지미와 매튜가 입을 쩍 벌렸다.

레이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성취가 좀 있었어요. 하르시아의 발자취를 좇아가다 보니 공간검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겠더라고요."

매튜가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이, 혹시나 해서 말한다만...."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제국에게 쫓길 게 아니면 밖으로 내보일 성취는 아니죠. 하지만 알고는 있으라고요. 당신들이 투자했던 아이가, 대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한 마디로 나 이렇게 잘났으니 앞으로도 잘 좀 하자란 의미였다.

지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탁자에 서린 얼음막을 매만졌다.

"그, 앞으로도 여기서, 필립스 백작령에서 머물 거냐?"

"방금 말했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애들 좀 클 때까지는."

필립스 백작령.

분명 작은 물이긴 하다.

허나 인재를 성장시키기 위한 준비는 전부 갖춰져 있었다.

백작은 보육원에 호의적이었고, 지원도 빵빵했으며, 아이들을 가르칠 고급 전력도 확보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큰 물도 체험시켜줘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1~2년만 바짝 가르치면... 슬슬 조합을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챠. 승급. 성장.

그 다음은 역시나.

'루나랑 요하나를 주축으로 구성을 갖추면 괜찮을 것 같긴 해...?'

덱짜기였다.

*

하루 종일 카렌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레이가 보육원으로 돌아온 데다, 레이에게 아름다운 목걸이까지 선물로 받았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목걸이의 체인이 들썩이며 피부를 간지럽힌다.

그때마다 카렌의 머릿속엔 온갖 망상이 꽃폈다가 수그러들길 반복했다.

비록 레이가, 연애 감정으로 목걸이를 선물한 게 아님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기대'까지 떨쳐내긴 어려웠다.

물론 카렌은 나름 자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육원 아이들 중 장신구를 받은 건 카렌 하나였다.

아무래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쉬웠다.

더군다나 요하나가 이번 일로 제대로 삐쳐버렸다.

카렌은 절대 목걸이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옷으로 가리고 다녔다.

예쁜 목걸이를 자랑하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카렌이 나름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방증이었다.

요하나는 어제 이후 말이 없었다.

여전히 카렌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지만 대화 한 마디 없었다.

카렌은 그런 요하나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 다시 식사 시간이 됐다.

카렌은 요하나와 마주 앉아 차디찬 분위기 속에서 빵을 입에 넣었다.

팔이 움직이자 어깨 근육도 같이 움직이며 목걸이를 옆으로 밀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목걸이의 자극에 카렌의 얼굴이 바보처럼 풀렸다가 다시 굳어졌다.

요하나는 그 하나하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증났지만 화를 풀 곳을 찾지 못하고 수저를 강하게 씹었다.

그때 레이가 식당에 나타났다.

콰앙!

레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식탁을 내려친 요하나가 씩씩거리며 식당을 나갔다.

레이는 멀어지는 요하나의 뒷모습을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쟤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꽤 막막한 심정이었다.

카렌과 비슷한 장신구를 하나 사서 선물한다 해도 화만 돋울 것 같았고, 교육적인 측면에서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

'일단 좀 지켜보자...'

평소 요하나가 하는 짓이 귀엽긴 했다만 다루기는 가장 힘들었다.

일관성 있게 틱틱 대는 아이였던 만큼 더 주의했어야 한다고, 레이는 뒤늦게 반성했다.

"으음, 루나."

레이가 요하나와 같은 식탁에 앉았던 루나에게 다가갔다.

"식사 끝내고 시간 좀 괜찮을까?"

"...지금도 괜찮아요."

본래 식사를 적게 하는 루나는 배를 어느 정도 채운 것처럼 보였다.

레이는 사양 않고 루나를 이끌었다.

"가자. 널 가르쳐줄 선생님이 새로 오셨어."

*

시그니 산맥 초입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필렌이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저 너머에서 레이가 루나와 알레시아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미리 목을 가다듬은 로필렌이 루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네가 dinareu san..."

레이가 곧장 로필렌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반쯤 비틀었다.

그 상태로 로필렌을 숲 속으로 끌고 간 레이가, 루나와 충분히 거리가 벌어지자 로필렌을 놓아주곤 작게 속삭였다.

"지금 뭐라고 말하려 했어...?!"

"네, 네?"

로필렌이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저, 저 아이의 이름이 'dinareu san rejeondeurigoa' 아니었습니까?"

드물긴 하지만 이름 사이에 폰, 오브, 압 같은 지역 특유의 전치사를 삽입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드물긴 했으나 미들네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로필렌은 레이가 소개해주겠다는 아이의 이름이 'dinareu san rejeondeurigoa' 인줄 알았다.

마법사였던 로필렌조차, 설마 레이가 '디나르에서 수집한 레전드리 등급의 고아'란 뜻으로 루나를 그리 칭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쟤 이름은 루나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dinareu san rejeondeurigoa는 무슨 의미..."

"그건 잊어."

레이가 눈을 번뜩이며 강요하자 로필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와 로필렌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루나는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괜히 헛기침을 하는 사이 로필렌이 루나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안녕, 루나? 나는 로필렌이라고 한단다. 레이에게 네 마법 수업을 부탁받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오게 되었어. 잘 부탁한단다."

로필렌의 입가에 따뜻한 웃음이 걸렸다.

루나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할게요."

인사가 끝나자 레이가 숲 속 공터를 가리켰다.

"루나, 로필렌 선생님께 마법 좀 보여 드려."

"보여 드려도... 돼요?"

이미 마법, 그러니까 서클을 함부로 선보였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던 루나다.

루나의 실수로 인해 레이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가며 전투를 치러야 했다.

걱정스러운 눈을 한 루나의 머리카락을 레이가 장난스레 헤집었다.

"걱정 마. 이분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로필렌은 레이가 아는 마법사 중엔 그나마 믿어봄직한 마법사였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숲 속 공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이가 로필렌에게 속삭였다.

"불 끌 준비해."

"예."

사실 로필렌은 아직까지 헷갈렸다.

루나라는 아이가 정말 대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났는지, 아니면 레이의 호들갑이었는지 말이다.

레이, 그러니까 하르시아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활용한 인물은 아니다.

로필렌이 생각하기에, 하르시아가 루나의 마법적 재능을 오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뭐, 보면 알 수 있겠지.'

주변의 마나가 요동친다.

루나의 서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냈다.

체내에서 심장 주위를 회전해야 할 서클이 타인의 시야에 잡혔다는 말이다.

로필렌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

뭐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거대한 원형의 띠가, 지금 서클이라는 건가?

"말도 안..."

츠즉!

거대한 서클에 빛이 한 번 점멸했다.

직후 숲속에 있던 공터가 삽시간에 불꽃과 함께 터져나갔다.

콰앙!!

"..."

로필렌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방금 루나가 행했던 마법은, 굳이 정의하자면 '점화'였다.

그 간단한 마법이 거대한 서클과 공명하여 저만한 위력을 낸 것이다.

"다비드가 저 아이의 심장을 뽑겠다고 설치기에 내가 직접 목을 베었다."

로필렌의 눈동자가 레이에게로 돌아갔다.

"로커스트 또한 저 아이를 탐내기에 온몸을 난도질해 죽였다."

레이가 로필렌에게 물었다.

"넌 어찌할 것이냐?"

로필렌은 무릎을 꿇으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선 채로 답했다.

"저는... 힘이 아니라 지식을 탐하는 자입니다."

심장을 뽑아 아티펙트로 가공해 서클과 마나를 늘린다고 로필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 믿어주십시오."

"믿어보도록 하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음이 잦아들고 후끈한 공기가 숲을 달군다.

로필렌이 마법으로 잔불을 꺼트렸다.

루나가 로필렌이 보여주는 마법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레이의 눈치를 쓸쩍 본 로필렌이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선 계약 각인을 맺어야 해. 괜찮겠니?"

루나는 레이가 말 없이 지켜보는 걸 확인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내 인도에 따르렴."

로필렌이 루나와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레이가 권능을 사용해 혹시 계약 각인에 불순한 내용이 포함되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로필렌은 레이를 앞에 두고 헛수작을 부리지는 않았다.

무사히 계약 각인을 마친 로필렌이 잠시 어색해하며 물었다.

"이제 나와 너는 사제관계가 되었단다. 잘 부탁해."

"...네, 잘 부탁드려요."

"으음... 돌아가서 바로 첫수업을 시작할까?"

"그 전에."

레이가 끼어들었다.

"루나, 너도 정령이랑 계약 좀 맺어보자."

세상엔 루나의 재능을 탐할 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로필렌조차, 언제까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루나, 너를 보호해줄, 너에게 헌신할, 오직 너만의 아군이 필요해."

레이는, 드물게 안쓰러운 눈을 하고 루나를 바라봤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알레시아가 펜리르와 피닉스를 실체화 시켰다.

"펜리르! 피닉스! 친구를 데려와 줄 수 있겠는가?"

[...]

[...]

평소에 말을 잘 듣던 펜리르와 피닉스는 알레시아의 부탁에 괜히 딴청을 피웠다.

당황한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중얼거렸다.

"레이... 나의 정령들이 친구들을 불러오는 걸 내켜하지 않는 것 같구나."

레이가 떫은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아이, 씻팔."

검에서 검기가 솟구친다.

"공간검 맛 좀 볼래?"

좆 같은 인간 새끼.

펜리르와 피닉스가 눈으로 욕을 하고 몸을 감췄다.

18